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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더러움,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행사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해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축제와 각종 공연이 취소되었다. 극장은 텅텅 비었고 야구장과 축구장과 관객이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관광객도 급감했다. 교육청마다 메르스 상황실이 마련되었고, 일부 학교는 휴교에 들어가기도 했다. 휴교를 결정한 학교는 경기도와 서울에 집중되었다. 비상식량을 대량 구매하는 이들도 있었고, 손 세정제의 판매 역시 급증하였다. 대형 쇼핑몰과 재래시장 역시 손님이 반의반으로 줄었다. 버스나 기차 그리고 지하철을 탈 때 마스크를 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었으며 그렇게 마스크를 쓴 이들을 의심의 눈으로 멀찍이 떨어져 살피는 사람들 또한 많아졌다. 얕은 기침을 한두 번 했다고 식당 출입을 거절당한 사례까지 나왔다. [1]

          

오 년 전 메르스 사태를 다룬 김탁환의 소설 <살아야겠다>에서 묘사된 당시 상황이다. 지역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는 ‘코로나19 사태’를 겪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최대한 외부 접촉을 피하고 장기전을 대비하여 식량을 사재기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경계한다. 물론 지금은 오 년 전보다 정부의 관리‧경계 기준은 강화되었고, 개인의 위생에 대한 자기 검열의 수준 역시 훨씬 높아졌지만 말이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통제 영역을 뛰어넘는 생물체(비 생물체)이라는 점, 모든 생명체는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있음을 전제로 둔다면 ‘바이러스 전멸’이란 말은 인류의 존재하는 이상 모순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이러스에 공격당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수시로 손을 닦고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지 않는 것, 이것이 최전선이다.

기껏해야 이런 것밖에 할 수 없는 내가 바이러스로 인해 일상이 파괴되거나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면 분노가 일게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테다. 먼저 분노를 퍼부으려면 그 대상이 필요하다. 하지만 분노의 대상으로 바이러스는 적합하지 못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분노하는 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지시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 대상을 ‘나쁜 환자’ 혹은 ‘가해자’로 이름 붙여 부른다. 그리고 그들 앞에 붙는 수식어는 (바이러스의) 두려움 대신 (인간의) 더러움으로 대체된다.


늘 그래 왔지만 바이러스 사태에서 가장 만만한 공공의 적은 환자 그 개인이다. 바이러스균을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는 ‘나쁜 환자’, ‘가해자’ 논리는 대중, 언론, 정치판 어디에서든 언급하기 쉬운 논리의 하나로 쓰인다. 물론 지금의 사태는 메르스 사태와 달리 확산 원인에 있어 분명히 다른 결을 하고 있지만 환자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인식, 그리고 구분의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든지 나에게 바이러스균을 침투할 수 있는 불온한 집단. 바이러스를 인식하고 대응하고 이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오 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핵인싸-가해자

     

신천지를 통한 집단 발병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확진자의 동선이 공개되면서 사람들은 특정 확진자에게 ‘핵인싸’라는 유행어를 붙여 불렀다. 동선 범위가 일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유행어 사용에 있어서는 농담조가 내재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환자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동선의 범위가 넓은 확진자일 경우 그 비난의 강도는 더 높았다. “집에서 조용히 처박혀 자가격리나 할 것이지 개념 없이 온 동네를 싸돌아다녔냐”는 비난은 그나마 점잖은 수준이었다. 개인의 동선은 곧 그 사람의 일상일 수도, 또는 생계일 수도 있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지만 이것이 공적 영역으로 환원되면서 환자를 ‘개념을 밥 말아먹은 핵인싸’로 만드는 데 빌미가 되었다. 이런 비아냥을 담은 시선은 다른 환자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었고 국민들의 안전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실시된 동선 공개는 그 의도와 관계없이 코로나 19의 증상으로 “여기저기 싸돌아다님”이라는 웃지 못할 농담을 파생시켰다.


그러다 31번 확진자를 기점으로 핵인싸’는 ‘가해자’ 논리로 본격 전환되었다. 31번 환자와 그가 전염시킨 수많은 사람들이 신천지 예수회라는 종교 단체란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게다가 신천지교가 그동안 지역 공동체에서 했던 만행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공공의 적은 더욱 분명해졌고 가해자-피해자 논리는 강화되었다.(논지에 벗어난 이야기지만 신천지는 종교의 율법을 멋대로 해석하여 지역 사회에서 악영향을 미친 집단으로 알려진 지 오래다. 그들의 행위들이 이제서야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공식적인 표적은 거대 종교 집단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인 표적은 개인으로 쪼개지고 나눠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지역별 온라인 카페에서는 신천지 교인(개인) 색출을 위해 정보를 공유하거나 공익을 명분으로 개인 이름과 주소가 게시되었다. 대부분의 언론도 다르지 않다. 사태의 원인에 대한 객관적 분석 혹은 전달 대신 정부를 무능함을 증명하는 자료에만 집중하거나 ‘나쁜 가해자’들의 일탈과 가십에만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게다가 본질은 뒷전으로 하고 가십만 확대 재생산하여 실어 나르는 유사 언론이 활개 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진짜 가해자는 조용히 숨어서 침묵하고 권력이 이들의 뒷배를 봐주고 있다는 생각은 음모가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에 가까울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개인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위법한 집단이라는 기준 아래 그들을 묶어 모두 ‘가해자’로 규정하는 방식은 매우 위험하다.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며 문제를 야기한 집단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수많은 개인들의 서사까지 모두 범죄로 일괄 취급하게 되면 진짜 가해자는 그들을 방패 삼아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가해자-피해자 논리는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근본적인 곳에 적용되어야 한다. 개인에게 가해자 위치를 일괄 적용하고 몰아가는 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숨은 권력을 통한 조직적 악행을 개인의 일탈로 꼬리를 자르기 않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무조건 대입은 지양되어야 한다. 실제로 이런 문제 해결 방식이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우리는 세월호 사태에서도 겪었고 메르스 사태에서도 겪었다. 소설 <살아야겠다> 역시 이런 단순한 가해자-피해자의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잘 묘사하고 있다.         

  

“메르스 환자 전부 피해자로 둬야 그들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를 거론할 수 있고 법과 제도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습니다. 가해자란 단어엔 책임이 따릅니다. 메르스 환자가 잘못해서, 불결하거나 부정직해서, 전염이 확대된 게 절대로 아닙니다. ‘슈퍼 전파자’란 단어만큼이나 ‘가해자’란 단어도 피해자인 환자에게 책을 전가하는 잘못된 시선입니다. -중략- 다시 강조합니다만, 감염시켰느냐 감염되었느냐 하는 것은 가해와 피해의 기준이 아닙니다.” [2]          


더러운 것들           


두려움이란 감정은 낯선 것, 혹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로부터 위협을 느낄 때 만들어지는 감정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위험으로부터 몸을 피한다. 그래서 두려움은 생존과 직결된 감정이라고 말한다.

바이러스가 두려운 건 언제 어디서 나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것,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극단적 공포 때문이다. 이는 본능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바이러스는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이기에 공포의 대상은 바이러스 그 자체가 아니라 바이러스의 숙주인 인간이 된다. 그런데 나를 위협하는 것이 바이러스에 걸린 ‘타인’이라는 인식이 극단적으로 흐를 경우 (정상적인) 나와 (비정상적인) 타인, (청결한) 나와 (더러운) 집단이라는 사고가 만들어진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두려움은 이제 바이러스를 품고 다니며 여기저기 퍼뜨리는 타인에게로 옮겨진다. 또한 바이러스는 타인의 비말을 통해 전염된다는 과학적 증명에 따라  침, 분비물, 특유의 냄새 등과 같은 것들이 두려움과 결합되면서 이들을 바라보는 감정은 두려움을 넘어 불쾌한 더러움이 되고, 나아가 이 더러움은 혐오 또는 배제로까지 이어진다. ‘더러움’이란 수식어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이런 방식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살아야겠다>에서 주인공 동화는 메르스 완치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결함’, ‘더러움’이라는 낙인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음을 고통스러워한다.         

   

“알아요. 저는 더럽지 않죠. 퇴원하고 나서 일주일은 혹시 내 몸에 나쁜 기운이라도 남았을까 싶어 하루에 네댓 번씩 샤워를 했어요. 씻고 또 씻었죠. 하지만 집 밖에만 나가면 10년 넘게 얼굴 보며 지내던 이웃조차 피해 수군거리더군요. 더러운 인간이라고. 저는 전혀 더럽지 않아요. 제 몸엔 메르스 바이러스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를 더럽다고 손가락질하니, 제 깨끗함을 어디 가서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3]          


전염병을 다룬 대부분의 픽션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근본적 메시지는 질병이나 전염병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우리들의 태도다. 그래서 재난(질병) 서사들은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더러움으로 변하고 더러움이 혐오가 되어가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담고 있다.


 전염병보다 무서운 건 혐오와 공포이기에 이를 해결하는 주체는 백신이나 백신 개발자가 아니라 보편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으며 동시에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개인이다. 구별하고 구분하여 이익을 도모하려는 개인이나 집단, 두려움을 직면하지 않는 대신 더러움으로 치환하고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는 인간의 비겁함은 어떤 문제에서도 해결책으로 쓸모가 없다.              

   

나만 살 것인가, 우리를 살릴 것인가

          

질병 그 자체는 중립적이고 과학적이지만 그것을 규정하는 주체들의 기준, 가치관, 문화적 시선, 관점에 따라 질병(전염병)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 가운데서도 주체들의 권력, 또는 정치적 신념에 따라 질병 대응법이 결정된다는 점은 실로 아이러니하다. 의학적, 과학적 절차에 따라 병을 치료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권력의 이해관계가 불쑥불쑥 손을 뻗어 방해한다. 목적이 위기 극복인지 아니면 편 가르기인지 의심이 든다. 이러한 최악의 예가 메르스 사태였다고 생각한다. 질병을 정치적으로 풀었다가 결국 정부는 비극적인 사망자를 냈다(이 이야기를 다룬 것이 소설 <살아야겠다>이다).

지금도 여전히 메르스를 앓았던 환자들과 그 가족은 트라우마를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더러운 바이러스 덩어리란 낙인은 언제 지워질지 모른다. 재판에서 승소했지만 그것이 고통의 기억을 지워주지는 못한다. 일상은 재판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관계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5년 전 메르스 확산 예방 지침에는 “낙타 만지지 말기, 낙타 고기 먹지 말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웃기려는 수준을 넘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메르스 사태를 겪고 시민들이 깨달은 건 국가는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사실, 그렇기에 개인은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각자도생’이란 말은 한동안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어이자 삶의 지침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국가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각자도생을 생존 원칙으로 삼았던 그때와는 분명히 다르다. 정부 비판론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잘했다는 것도 아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박쥐고기 먹지 말기’, ‘천산갑 만지지 말기’가 예방책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상식적인 대응 방식이 오히려 반갑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엇보다 지난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피로감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전에 경험했던 실패의 경험을 디폴트 값으로 둔 상태이기에 대응방식과 태도에 있어 정부나 시민 모두 한 단계 진보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현 정부는 지난 메르스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고 실무적인 능력을 총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대응법을 모색하고 있다. 시민 역시 그 당시 경험했던 무비판적인 불안과 공포를 지양하고 자가 격리를 서로 권유하며, 정부 지침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등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각자 자기 자리에서 애쓰고 있다. 적어도 오 년 전처럼 각자도생을 외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정부가 그 역할을 무엇으로 규정하고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시민은 생존 대상의 범위를 선택한다. 결국 나인지, 아니면 우리인지는 국가의 역할에 달려 있다.         

                

*참고문헌

[1] 김탁환, <살아야겠다>,  북스피어, 141쪽.

[2] 위의 책, 318쪽.

[3] 같은 책, 400쪽.


* 글은 르몽드 톡톡 3 2일 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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