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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필요한 건 “우리”가 아니라 “나”야.

영화 <결혼 이야기>


당신이 원하면 약속이고 니콜이 원하면 상의인가요?
-영화 <결혼 이야기> 중 노라 변호사와 피터의 대화 중에서-

(이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결혼 이야기>는 이혼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제목이 ‘결혼 이야기’인 이유는 결혼 생활의 최전선에 이혼이 놓여 있기 때문일 테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이혼이라는 고통스러운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되니까. 영화의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주인공 니콜과 피터는 관객이 기대하는 재결합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해피엔딩이 아니다. 하지만 새드엔딩은 더더욱 아니다. 대신 각자의 공간에서 일상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선택한다. ‘이게 뭐야?’라고 할 관객도 있겠지만 결혼과 이혼 어디쯤에 있는 부부가 관객이라면 아마도 니콜과 피터의 이 어정쩡한 선택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니콜은 피터를 더 많이 사랑하기에, 그리고 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공간을 떠나 기꺼이 피터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는 뉴욕으로, 그가 감독으로 있는 극단으로, 그리고 그의 마음으로. 그러나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 할수록 피터의 공간에 ‘우리’의 자리는 있어도 ‘나’의 자리는 없다는 걸 점점 느끼게 된다. 피터는 자신의 일에는 완벽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공평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피터의 이런 장점은 결국  단점이 되어 다시 니콜에게 돌아왔다. 피터에게 니콜은 ‘우리 가족’의 좋은 구성원에 불과했고, ‘우리 극단’의 괜찮은 배우 또는 피터의 능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동료들 중 한 명이었다. 적어도 그에게 니콜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니콜은 괜찮은 배우로 인정받고 싶었다. 남편이 아닌 능력 있는 감독 피터에게,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지만 피터의 공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피터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피터가 성공할수록 니콜은 허탈하고 또 화가 난다. 결국 니콜은 피터의 공간에서 나가기로 결심한다. ‘나’를 오롯이 봐주는 원래의 공간으로. 그렇게 그녀는 이혼을 결심한다.

피터는 니콜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별로 궁금하지 않는다. 그는 늘 자신감이 넘쳤고 지금까지 삶에 큰 불만이 없었다. 그는 뉴욕이라는 멋진 공간에서 잘 나가는 연극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스스로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평탄한 일상 탓에 그는 연극 감독으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LA로 돌아가자는 니콜과의 약속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상의로만 존재했다. 사실 피터로서는 이 ‘상의’를 ‘약속’으로 이행하기 어려웠다. 아니 싫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곳은 니콜의 공간이지 자신의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니콜은 피터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공간을 포기하고 그의 공간으로 기꺼이 들어갔지만 피터는 니콜처럼 할 마음이 없다. LA로 가게 되면 지금처럼 많은 것을 누릴 수 없다. 피터는 자이 가지고 있는 것 중 어떤 것도 놓치고 싶지 않다. 명예, 돈, 아이, 가족. 그러나 그가 이 모든 것을 쥘 수 있었던 배경에는 피터의 뛰어난 능력이 아닌 니콜의 암묵적인 양보가 있었다는 걸 모른다. 왜냐면 피터의 성공에 ‘우리’를 가장한 니콜의 희생과 양보는 늘 당연시되었기 때문이다. 이 불공평한 방식이 피터에게는 너무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니콜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건 이러한 방식이 둘 사이의 약속이라고 착각했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문제없이 잘 지내왔으니까.

결국 이혼 소송을 당한 그는 양육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LA의 낯선 공간에 집도 마련하고 좋은 아빠로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 노력은 오로지 자기만족일 뿐 누구도 원치 않는 노력이란 걸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가 노력하면 할수록 모든 일은 어그러지고 엉망진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피터는 느낀다. 지금껏 윤택하고 만족스러운 일상을 지낼 수 있었던 건 그의 천재적인 재능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익숙한 공간에서 한발짝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자기 멋대로 만든 ‘우리’라는 울타리를 그럼에도 니콜이 지켜주었기 때문이라는 것. 이 공간에서 잘 나가는 천재적인 ‘감독’ 피터는 없다. 아이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려다 아이의 화만 돋우기 일쑤인 이기적이고 고집만 센 한 남자만 있을 뿐이다. 무능한 자기 꼴을 보고 있자니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자신이 엿 먹이려는 니콜을 두고 볼 수 없다. 자신을 이렇게 바닥으로 끌어내린 니콜이 너무 저주스럽다. 그는 니콜에게 더 이상 심할 수 없는 모욕을 던진다. 그러나 둘은 안다. 이 모든 상황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었다는 걸.

둘은 결국 각자의 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살기로 한다. 이 영화가 결혼에 대한 기대감이나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면 니콜과 피터가 재결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대부분의 부부들은 현실적인 문제, 돈, 아이, 사회적 시선 등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또다시 희생과 양보를 타협안으로 선택한다. 문제는 희생과 양보 그 자체가 아니라 타협이란 건 내가 원하면 ‘약속’이고 타인이 원하면 ‘상의’가 된다는 것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상의는 이야기만 잘하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가까운 관계일수록, 눈치껏 서로 넘어가고 넘어가주는 경우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습관적으로 한 사람은 끊임없이 양보와 희생만 하게 되고 남은 한 사람은 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결혼만큼이나 이혼이 쉽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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