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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와 Jul 09. 2019

부모의 삶

2018.7.9

부모님이 각방을 쓴 건 한달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전부터 둘 사이가 삐걱댔다. 아버지와 만난건 올해로 19년. 19년 전, 서른 여섯의 뜨거운 청년에게 갑자기 딸 둘이 생겼다. 첫눈에 반한 어느 여인과의 결혼을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인이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하고 죽기살기로 돈을 벌고 있었던 시절. 21살에 결혼해 아이들만 키웠던 35살 여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막막하고 두렵기만 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에 둘째, 그 여인은 남매들 중 가장 기가약했으며 성별, 체력, 처세술 모든 부분에서 다른 형제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녀의 이 악물고 버틴 유년시절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공부했던 그의 유년시절. 그 둘은 이미 만날 때부터 마음에 생체기가 많았다. 함께 있으면 못할 것이 없었겠지만 관계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화목하게 살아내기 위해 그 두 사람은 많은 것을 버려야했다.


꿈, 야심, 일상, 자신.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 중요한 거 하나를 버리는 일은 모든 걸 버리는 일과 같은건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버린지도 모른채 서로를 버려왔고, 가진지도 모른채 버린 것을 서러워하는 삶을 버텨왔다.


무엇이 눈을 가린건지, 무엇이 귀를 막은 건지, 무엇이 마음을 잠근건지도 모른채 그들의 몸은 나이들어갔고, 마음은 썩어갔다. 그렇게 두명의 딸이 자신들의 삶을 살기위해 떠났을 무렵 둘에게 천천히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조급함이 밀려들었다.


원인이 무엇인지 몰라 말할 수 없었고, 어떤 마음인지 들여다볼 줄 몰라 끙끙 앓았다. 그래도 늘 그렇듯 가족들 앞에서는 웃으려고 노력했으며 이따금 아픈 속을 알아주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툭툭 상처를 주고는 했다.


그렇게 보낸 19년의 세월, 자신이든 남이든 무언가를 탓하지 않으면 일상을 살아낼 수 없어진 두 사람은 또 다시, '상처를 입히는 순간 스스로가 상처입는' 시간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그 두 사람이 버린 자신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두 사람과 보여지는 두 육체, 그 둘은 마주보면서 그 사이에 있는 자신을 봐야할 때였다.


지켜내지 못한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서로를 동시에 바라봐야하는 이 시간. 그렇게해야 다시 나를 내게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이 시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다시 어느순간 오뚜기처럼 되돌아가 다시금 서로의 설움을 받아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다.


마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이 없는 곳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기다리겠다고 말하면 고통일까. 응원한다고 말하면 서운할까. 고마웠다고 말하면 이별을 고하는 것 같을까. 그들의 깊은 사랑을 받아먹고 자란 나는 큰 딸.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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