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했다. 알던 사람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마음이 어떤 좁은 통로를 비집고 들어가려는 듯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많아졌다. 찰나의 표정이나 말에 섞인 단어같은 것들로 불안이 증폭되었다.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고 나도 신경쓰지 않는 일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위해서는 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문제를 맞닥들이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도망은 무엇도 해결해주지 않고 도망치는 스스로를 탓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심지어 나조차 모르게 벽을 쌓았고 그 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꺼워졌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적당한 답변을 해주는 일은 계속 일어났다. 아무리 '적당'해도 그 안에 진심은 조금씩 묻어나왔다. 진심으로 대하면서 밀어내는 일, 잘 생각해보면 그만큼 나쁜 일이 있을까. 나는 다 알았다. 나쁘고 싶기도 했으므로 그냥 그 시간을 버텼다.
그렇게 되면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벽을 부수고 싶거나 그 방안에서 견딜수없이 아플때 일어난다. 내가 벽을 쌓고 있었다는 것, 그 원인이나 사정에 대해 모르는 친구들은 나의 아픔이 낯설고 무엇이 어려운지 모른다. 몰라서 조심스럽고 조심스러워서 다가와주지 못한다.
그럴 때 나는 더욱 고통스럽게 혼자인 것을 실감한다. 더이상 나의 진심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고, 벽을 부수려고 노력했던 일이 좌절되는 것을 너무 크게 느낀다. 그렇게 벽은 점점 더 견고하고 두꺼워진다. 그런 시간이 오랜 사람은 온 세상이 낯설고 어려우며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죄스러워하게 된다.
지금 나의 상태는 어디쯤일까. 벽은 부숴지지 않은 것 같고, 외롭기는 한 것 같다. 그러나 문을 새로 단 기분이 오늘은 든다. 열고 싶을 때 언제든 열 수 있으니 닫고 싶을 때도 닫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은 그렇다한들 내일은 또 알 수 없다. 매시간, 매일 나의 상태가 변하기 때문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저자가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십오분) 강연에서 '기분부전장애'를 진단 받았다고 했다. 책과 강연에서 하는 이야기가 꼭 내 이야기같았다.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면 진단받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일단 스스로의 상태를 잘 진단해 그때그때 나만의 방법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런 내 노력을 누군가 알아주고 애썼다, 기특하다 칭찬해주면 좋겠다. 따뜻한 말 한마디면 다 되는데.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해도 괜찮은지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고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불안. 이걸 이해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을까? 어릴 때 자주 죽고싶어했지만 이젠 죽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조금 강해진 것 같다. 오늘은 내게 칭찬해줘야지. 따뜻하게.
해와야, 죽지마. 넌 강하고 근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