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있던 나.

성폭력사건 대책모임을 진행하면서

by 해와

함께 활동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성폭력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있었다. 피해자는 나와 절친한 사이였고, 가해자는 나에게 이런저런 속내를 이야기하려 종종 찾아왔던 친구였다.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소개시켜준 건 나였다. 나는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에게 무슨 책임이 있는가.


처음 피해자에게 그 사건에 대해 간단히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 이 일에 피해를 입은 친구를 위로했지만 그건 큰 힘이 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를 만나 이런저런 충고를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건 피해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고, 이 사건이 진행되는데 있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엔 그 사실을 믿고싶지 않았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이 이들 사이에 발생했다면 내 책임인 것 같았다. 내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그보다 피해자의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은 없었다. 일단 가해자를 멀리하고, 피해자의 곁에 있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가해자가 극악무도한 악질처럼 보였던 것은 아니다. 단숨에 그렇게 관계가 끊어질 순 없었다.


가해자가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나는 가해자 대한 욕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감정이 몹시 불안정하고 복잡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나는 '가해자'라는 단어에 대한 굉장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해자라는 이미지는 내게 용의주도하게 범행을 저지르거나, 아주 잔인하거나 악랄했다. 때문에 가해자가 그 이미지와 곂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해결 되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해자에게 과중되는 이 문제도 바로잡아야 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막막했기 때문에, 또 이런 상황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위로 외에 피해자와 함께 무언가 해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내 피해도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피해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 일어날 수많은 가해는 사실 피해자 본인의 몫이었다. 당사자만큼 그 사건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작은 실수나 걱정에도 날을 지샐만큼 오래 고민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2차가해를 피할 수 없고, 그것도 오롯이 피해자의 몫이며, 재판이 지난하면 지난할 수록 끔찍한 매일매일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도 내겐 명백했다. 더구나 사건 해결을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기분, 감정, 의사소통까지 일일이 피해자에게 신경쓰일 것이 분명했다. 일일히 고마워하고, 일일이 미안해하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었다.


난 그걸 감당하고 있어야 할 피해자를 곁에서 지켜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피해자에게 잔뜩 감정이입을 한 상태라 더 심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가만히 있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피해자에게 필요한 일을 위해 곁에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분명해졌다. 그게 단숨에 그 모든 걱정들을 무너뜨릴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게 성폭력사건 대책모임을 시작했다.


이 사건에 가장 중요한 지점은 피해자가 어디서도 배제되지 않는 것, 피해자가 활동하던 곳에 가해자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을 최대한 막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지역사회에 공론화하고 함께 협력해달라 요청하고 모두가 이런 성폭력사건에 대해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내가 할 수 있는지, 내 말을 이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줄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였다. 대책모임을 시작하고 나는 나의 권리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내가 이 지역 시민사회에 공론화를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 이유는 이 사회에서 나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지역의 시민이고, 지역활동에도 종종 참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어떤 이의제기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당연한 권리가 대한민국 수많은 단체, 공동체에서는 무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권리가 있다면 나는 말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말하기로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이야기를 잘 들어 줄 수 있을만한 권력있는 사람과 함께 이 일을 헤쳐 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좀 더 잘 전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작은 목소리를 가진, 작은 존재로 취급되는 사람들은 그렇게 전략을 세워 일을 해결하기도 한다. 수단이 못마땅해도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책모임은 그 방법을 선택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은 이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이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 그에 우리 모두가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중요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 '00시민사회 성폭력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 입장문을 공개하고, 공문을 보내기로 했다.


이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단체들이 보기에 이런 제목은 불편할 수도 있다. 왠 듣보잡이 시민사회라는 이름으로 공론화를 시도하는가 반발할 수도 있다. 그 반발이 어떤 불편함인지, 그 불편함을 느끼는 자신이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 이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좀 더 객관적으로 이 사건을 바라봐주길. 자신이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던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불편하고 낯설다는 이유로 무조건 방어하지 않길. 대책모임의 영향력이 미미하고 지지기반이 없다고 해서 무시하지 않길. 그리고 무엇보다 옳은 선택을 해서 방향을 잘 잡아주길.


가해자는 무조건 악랄하고, 용의주도하며, 잔인하지 않다. 나도 우리 모두도 언제나 가해자일 수 있고, 나도 모르는 새 가해를 저지르고 있을지 모른다. 가해자가 되면 인생을 망치는가?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가해자가 가해를 인정하지 않으면, 가해자의 가해를 주변에서 잘못된 일이라 말해주지 않으면, 가해자의 가해가 우리 모두가 저지를 수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주변에 알리지 않으면, 그런 사회가 지속되면 세상을 망친다.


처벌을 위한 '미투'가 아니다. 자기반성과 성찰을 위한 '미투'다. 돈을 뜯어내기 위한 피해자의 고백이 아니다. 안전한 세상을 위한 용기있는 고발이다. '나'와 '세상'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성폭력사건앞에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방어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가해자를 위한 나라는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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