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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우소 Dec 13. 2023

어머니 가라사대

퇴로는 없다

어머니는 물건을 잘 안 버린다. 쓰레기처럼 보이는 것도 기어코 쓸모를 찾으려 노력하신다.


한참을 앉아 택배상자를 하나하나 오려모아 배달원들이 비닐봉지 밑에 깔아 음식이 쏟아지지 않게 나를 수 있도록 전해주신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고 돈 한 푼 안 받아도 하신다. 벽에 스카치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있을 때가 있다. 택배상자에서 뜯어낸 테이프를 다른 것 묶어 버릴 때 한 번이라도 더 쓰려고 그렇게 해두신다. 맨손으로 찬물에 세제도 없이 설거지를 하시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땐 더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왠지 그곳에서 뭘 먹으면 배가 아픈 것 같고 그랬다.


늘 주변을 살피고 상대와 공감하려 노력하신다. 경비 아저씨에게 맡긴 차키를 받을 때에도, 배달원에게 물건을 받을 때에도 음료수 한잔을 꼭 내어주신다. 우리 부부가 아이들과 다녀갈 때도, 다른 누가 와도 빈 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누가 뭘 좋아하는지 기억해두신다. 어머니 달력에는 동그라미가 많다. 기념일과 생일을 잘 챙기신다. 누군가의 생일에는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축하하고 동지에는 팥죽을, 정월대보름에는 부럼을 주신다. 나도 이제는 연초가 되면 새 달력을 넘기며 가까운 사람들의 중요한 날을 떠올리고 명절 즈음이면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런 어머니 곁에는 소녀시절부터 여든이 넘어가는 지금까지 함께 하는 좋은 친구들이 많다. 몇 해 전 수술을 하셨을 때는 한 친구분이 어머니의 빠른 회복을 위해 어린애만한 곰탕솥을 머리에 이고 찾아오셨다. 어머니는 고맙다면서도 한편으로 받은 만큼 베풀 것을 늘 염두에 두신다.


할 말을 다하고 솔직하시다. 이건 이래야하고 저건 저래야하는 기준이 뚜렷해 도무지 애매한 것이라곤 없어 왠지 모를 편안함마저 든다. 그래도 늘 마지막에는 먼저 모든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하려 노력하신다. 안 되는 건 깨끗이 내려놓고 지금도 배우고 변화하신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어머니도 좋고, 누우면 가만히 불을 끄고 이불을 덮어주는 어머니도 좋다. 웃는 어머니도 화내는 어머니도 좋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묻는다. 내가 너희 아빠를 왜 좋아하는지 아냐고. 내 아들이라서 좋아한다고. 나도 그런 어머니가 좋다.


나는 안 쓰는 물건을 잘 치우고 버렸다. 주변에 뭔가 망가지거나 원래의 용도를 다 한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걸 못 봐냈다. 친절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언제나 불편했다. 아니, 내 자신조차 불편할 때가 많았다. 내가 그들에게 해주는 것도 없고 그들에게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저 서로 피해만 안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남편은 어머니를 닮아 잘 버리는 법이 없다. 그래서 흠이 많은 나랑 오래 산다. 말 없는 꽃에 물도 꼬박꼬박 잘 주고, 모든 사람들과 두루두루 편안하다. 신혼 시절 내내 웃었다가 울었다가 분노를 토했다가 넋이 나가있는 내 곁에 변함 없이 매일 같은 시간 돌아와 함께 따뜻한 밥을 먹고, 나를 생각하며 고른 책을 건네고, 언젠가 재미있게 본 영화를 틀어주고, 같이 웃고, 아무 것도 안 묻고 오래 기다려준 인내와 세심한 배려가 고맙다.


나는 이들의 나라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 나도 어머니와 그 아들처럼 나이 들고 싶어서, 좋았던 많은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옮겨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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