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은밀한 야매 사혈침
아무것도 해볼 수 없는 일 앞에서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두 아니라고 말해도 끝까지 해결책을 찾아 헤매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거나. 대부분의 사람은 전자로 시작했다가 결국 후자로 옮겨간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늘 노력하면 이뤄낼 수 있는 것들 속에서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애원해 적이 없다. 비굴할 바에는 내가 더 노력하고 말지, 믿을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다고 채찍질하며 살아왔다. 간절한 사람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신이 된다. 이성적인 판단이 어렵다. 절박함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고, 조급함은 믿고 싶은 말을 믿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그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시간과 돈을 다 쏟아부었는데, 그 믿음이 전부였는데, 결국 안 된다면? 그 시간과 돈을, 상처받은 마음을 누가 보상해줄까.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런 사람에게 당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아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걸 믿었어?” “그게 가능했으면 왜 거기 있겠어. 전 세계가 난리 나고 논문에 실렸겠지.” 그 말을 듣는 나는 생각할 것이다. 사실은 거짓인 걸 알았다고. 그래도 그냥 믿었다고. 믿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고. 희망이 아주 작게라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때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아빠와 엄마가 희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귀한 정보를 얻었다고 했다. 난임이었던 유명한 배우 부부가 여러 병원을 전전해도 임신을 못했는데, 여기 다니고 나서 아이를 가졌다는 거였다. 아는 사람 소개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고, 굉장히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곳인데 친한 선배를 통해 겨우 소개를 받았다고 했다. 그 부부 말이야? 그게 진짜야? 진짜라고 했다. 나도 내심 기대가 됐다.
어느 주말 저녁, 우리 셋은 비장한 각오로 그곳을 향했다. 아빠 엄마는 '한의원 같은 곳'이라고 했는데, 주말 저녁에도 운영을 하는게 맞나. 우리를 위해서 열어주는 건가. 차 뒷좌석에 앉아 물었다.
"엄마, 그래서 거기가 정확히 어딘데?"
"아잇, 그냥 병원같은데라니까 그냥 가봐."
불이 다 꺼진 골목길 사이의 어떤 상가였다. 호출을 하자 어떤 아저씨가 건물의 유리문을 덜컹 열어줬다. 무슨 비밀 공간이라도 되는 듯 우리를 들여보내고 문을 다시 잠궜다. 건물은 껌껌했고, 잠시 불이 켜진 반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에 유일하게 있던 상아색의 낡은 철문을 열자 예전에 할머니와 다녔던 오래된 내과처럼 벽 하나를 채운 진한 갈색의 선반, 그리고 다닥다닥 채워진 알 수 없는 상자들이 보였다.
아빠랑 엄마는 굽신굽신 인사했다. 영광이라면서 H형님 소개를 받아서 왔다고 했다. 나는 분명 한의원 같은 곳인 줄 알고 왔는데, 이 기이한 풍경이 당황스러웠다. 잘 부탁드린다, 이런 일이 생겼다, 하는 아빠 엄마의 말들을 뒤로하고 그 공간을 살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응접실 같은 곳이었다. 그 곳 한가운데는 목욕탕에서 볼 법한 때밀이 침대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아저씨는 의자에 앉아 우리를 한 번 훑어보더니 다소 거만하게 말을 꺼냈다.
“여기 오는 사람들, 다 마지막에 와. 이제 여기 왔으니 뭐든 다 낫겠네”
유명한 배우 부부도 여기 와서 해결이 됐고, 큰 병 걸린 사람도 자기를 찾아와서 나았다고 했다. 병원에서 해결 못한 사람들 여기 많이 온다고. 병원은 원인을 못 찾는다고 했다. 몸에 어혈이 생기면 장기가 멀쩡해도 기능이 떨어지는데 그걸 풀어주는거라고. 초면에 반말을 하는데도, 아빠와 엄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그 선반을 다시 바라봤다. 벽을 가득 채운 갈색 나무 선반, 그리고 그곳을 가득 채운 상자들. 그 상자들을 자세히 살피니 전부 다 부황을 뜨는 도구였다. 이곳이 정말 사람들을 낫게 하는 곳이 맞나.
그런데도 아무도 의심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믿기로 하고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게 그 공간에 앉아 있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여기가 치료하는 곳이라는 걸 알게됐다. 이 창고 같은 곳에서? 만약 기구를 파는 곳이라면, 눈 딱 감고 속아서라도 한번 해볼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치료라니. 심지어 침으로 막힌 피를 뚫는 게 아니라 부황으로 피를 빼는 방식이었다. 한의학에서 종종 쓰는 '부황사혈' 방식이라는데... 의학적 허가도 없이 이런 일을 해도 되는건가.
우리 엄마는 의료인인데, 엄마가 저기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면 정말 믿을만 한건가. 그런데 저 이상한 아저씨랑 얘기하는 우리 엄마 눈이 너무 간절해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아빠 엄마를 여기까지 오게 하다니 큰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기도했고, 내 인생도 어찌되려나 마음이 아팠고 복잡했다. 삐걱대는 철문을 두고 펼쳐진 이상한 곳. 여기서 사람 하나 죽어도 모를 것 같은데.. 나는 엄마 옆이 앉아 옷깃을 잡아 끌었지만 엄마는 모르는 척, 아저씨만 쳐다봤다.
한시라도 이 곳을 나가고 싶었지만, 나가자고 하면 내가 이상해지는 분위기였다. 아저씨는 내 손목을 잡고 혈을 짚더니 생식기 쪽이 꽉 막혀있다고 했다. 1년 정도 치료를 하면 좋아질거라고, 완치가 될거라고 했다. 나에게 저렇게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가 너무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말해서,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 눈물이 핑 돌고, 마음이 놓일 지경이었다. 오늘 직접 방문했고, h씨 소개로 왔으니 특별히 오늘 먼저 여기서 사혈을 해주겠다며 저기 침대에 누우라고 했다. 지금요..?
묻는 내게, 아빠랑 엄마는 옆에서 등을 떠밀었다.
"얼른 누워봐. 선생님이 해주신대잖아, 바쁘신 분이야."
기분이 이상했지만, 일단 누웠다.
그는 나에게 팬티를 내리라고 했다. 배와 생식기 사이에, 생식기 근처의 피를 뽑아야한다고 했다.
말도 안되는 주문을, 너무 당당하고 당연한 표정으로 하고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본 아빠와 엄마도 너무 당연하게 얼른 내리라는 듯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갈등했다. 그냥 눈 딱 감고 믿어볼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잖아. 정말 이 사람의 말이 진짜 일 수도 있잖아. 아빠랑 엄마는 옆에서 계속 "얼른 내려! 지금 해봐야지. 얼른!" 날 재촉했다.
이 세 사람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압도되었고, 그 사이에 누운 나는 녹아내릴 것 같았다. 어지러웠다.
결국 나는 그건 못하겠다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엄마랑 아빠를 잡아 끌었다. 그리고 우리는 도망치듯 그 곳을 나왔다.
#조기폐경 #사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