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조기폐경 (8) - 아기를 좋아하던 남자친구

사랑은 조건을 넘어설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해야하는 사랑일 때

by 해연

사랑은 뭘까. 난 항상 강렬한 한 장면에서 시작한다. 내가 사랑에 빠졌던 순간들은 모두 선명하다. 왁자지껄한 술집. 구석에 앉아 마주쳤던 나른한 눈동자. 그 눈동자의 색은 진한 갈색이었던 것 같다. 문득 <사랑의 생애>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나는 내 사랑이 낭만적이라고 믿어왔다. 조건이 중요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본다. 정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나. 정녕 사랑의 시작이 큐피드가 화살을 쏜 듯한 그 순간뿐이었을까. 내 머리 속에서는 어떤 계산도 없었을까. 사실 본능은 순식간에 그의 옷차림을 훑고, 나만큼의 경제적 수준이 되는 사람인지 파악하고, 그의 몸을 훑고, 충분히 나를 지켜줄 만한 피지컬을 지녔는지 확인하고, 그의 목소리와 말투를 훑고, 적당한 지적 수준과 대화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가늠해버린 뒤에야 작정하고 화살을 맞을 가슴을 내어준 것은 아닐까.


사랑은 우연처럼 시작되지만, 완전히 무작위는 아니었다. 나는 그를 어떤 조건에서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만약 그에게 큰 빚이 있다면, 치명적인 질병의 유전력이 있다면, 혹은 무정자증이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럼에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조기 폐경을 알기 전까지 나는 연애편지에 수도 없이 적었다. “네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게.” 그러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모습’의 형태는 돌이켜보니 매우 한정적이었다. 네가 뚱뚱해져도, 네 머리털이 빠져도, 네가 늙고 주름이 생겨도… 그 정도였다. 나는 그 정도로 내 사랑이 고귀하고 숭고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주는 사랑도 그럴 거라고 믿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딱 그 수준만큼.


그런데 내 몸의 상태를 알게 된 이후, 그 문장은 더 이상 가볍게 나오지 않았다. '어떤 모습'의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알던 세상은 얼마나 작았었던가. 나는 그에게 충분한 사람일까, 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리고 동시에, 나 역시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내 것을 포기할만큼 사랑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두려워졌다. 나를 사랑하는 눈빛을 볼 때마다 의심했다. 나를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어? 그 눈동자 안을 탐험했다. 찾아내고 싶었다 어떤 확신을. 내가 사실을 말해도 날 사랑해줄거라는 확신을. 너는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을까. 나를 위해.




그에게는 귀여운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 그 강아지와 늘 함께 자고, 늘 함께 했다. 그래서 병을 진단받고 그 사실을 떠올리며, 이 사람이라면 아이 없이 강아지를 키우며 사는 삶도 괜찮다고 해주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병을 진단받은 이후, 그러나 내 안에서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채 수많은 병원을 찾아다니며 오진이기를 바라던 그때도 그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물론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고, 우리는 어렸지만, 나는 자꾸 그를 더 사랑하게 될수록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하게 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속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과, 언젠가 이 사실로 그와 헤어지게 된다면 내가 받아야 할 상처가 무서워 차라리 빨리 말하고 매를 맞는게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뒤엉켜 있었다.




아주 화창한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데이트를 하던 주말. 공원을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원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고, 근처에는 솜사탕도 있었고 번데기도 팔았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주머니도 있었고, 풍선과 작은 장난감을 파는 카트도 보였다. 우리는 작은 장난감을 하나 샀다. 고무줄을 손으로 당겨 하늘로 날리는 조악한 플라스틱 장난감이었다. 우린 온 힘을 다해 아주 높이 날리고 깔깔 웃으며, 한결 선선해진 가을 날씨를 만끽했다.


그때 작은 여자아이 두 명이 우리가 날리는 장난감에 관심을 보였다. '우와' 동그래진 두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양갈래로 머리를 묶고, 바스락거리는 분홍색 옷을 입고, 작은 혀가 보이는 입을 벌린 채로. 그는 그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그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건넸다. 어떻게 고무줄을 거는지조차 모르는 아이들에게 그는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 아주 자상하게 방법을 설명했다. 아이들은 귀 기울여 들었지만 첫 시도는 제대로 날려보지도 못하고 실패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 등만 봐도 그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걸 지켜보는 내 마음이 묘하게 아팠다. 30분 넘게 아이들에게 날리는 법을 알려주고, 아이들이 비로소 우리만큼 높이 장난감을 날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안녕~' 인사하며 장난감을 주고 그곳을 떠났다.


그 공원을 나오며 그가 말했다.

정말 귀엽다.
우리 저렇게 귀여운 딸 하나 낳고 살면 정말 행복하겠다.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게.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옆에서 본 그의 눈가에는 오래 웃어서 생긴 주름이 보였다. 저렇게 행복했구나. 동시에 아주 선명한 두려움이 올라왔다.


이 사람은 아이를 좋아한다. 이 사람은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명확한 세 개의 사실. 이 사람의 삶의 방향과, 내가 줄 수 없는 것이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우리는 깊이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더 선명해진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내가 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더 또렷해진다는 사실이.


그날 밤, 머리 속 우주에선 수십개의 시뮬레이션이 진행됐다. 만약 그가 이런 나를 괜찮다고, 사랑해서 극복할 수 있다고 결심해서 결혼한다면? 정말 고맙다. 정말 이건 낭만적인 사랑이다. 아름다워 눈물이 다 났다. 그러다가 주변 친구들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본다면? 그가 그걸 부러워하는 걸 곁에서 본다면? 애써 나에게 괜찮다고 썩은 미소로 웃어준다면? 그게 더 괴로워서 난 죽어버릴 것이다. 그냥 차라리 홀로 살다가 늙어죽는 편이 좋겠다.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이건 너도 불행하고, 나도 불행한 일이야.

나는 그와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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