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조기폐경 (7) - 이제야 보게 된 것들

위만 보며 살던 내가, 비로소 이면을 보게 된 순간

by 해연

나는 항상 아등바등 살았다.

자수성가한 평범한 부모 아래에서 자랐고, 강북의 평범한 동네에서 눈에 띄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동네 아주머니의 추천으로 버스를 타고 멀리 강남 한복판의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특출난 학생이었는데, 30개의 반으로 줄세워진 대형 학원에서는 평균도 되지 않았다. 외제차에서 내리는 친구들, 그 동네가 고향인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항상 가장 늦게 학원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했고 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수업시간에 엉뚱한 해석을 내놓고 반 전체를 웃음바다로 만든 날도 있었고, 좋아하던 친구의 생일에 고심해서 산 5천원짜리 선물을 건넸다가 이게 선물이냐는 말과 함께 웃음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어떤 악의도 없었다. 대신 나는 너무 눈치가 빨랐다. 울고 싶었지만 울지 못하고 같이 웃어버리는 내가 비참하다고 느껴졌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능숙해 보였고, 나는 점점 작아졌다. 처음에는 창피해서 열심히 했고, 나중에는 정말 잘하게 되어 더 열심히 했다. 자존심과 열등감이 뒤섞인 감정이 내 동력이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외고에 들어갔고, 서울대에 입학했다. 정신차려보니 그렇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난 위만 봤다. 너무 열심히였던 탓에, 유능해져버린 탓에, 계속 더 높은 곳으로 흘러들어갔다. 주변 사람들은 점점 더 커 보였고, 나는 늘 그 아래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그럴듯한 세계, 더 상류의 삶,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따라가려고 했다. 나는 그것을 곁눈질로 배우고 태연한 척 흉내냈다. 본질에는 관심이 없었다. 껍질을 가꾸는 데에만 골몰했다. 내 안을 드러냈다가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 때문이었을까. 속을 보이면 무시당할 것 같았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서 20대의 나는 과장되어 있었다. 노력 없이도 똑똑한 사람인 척, 노력 없이도 예쁜 사람인 척, 사랑을 충분히 받은 사람인 척, 상처가 없는 사람인 척. 그렇게 연기하다 보니 정말 그런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나는 화려했고, 인기도 많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자꾸 거짓처럼 느껴진다. 그걸 따라잡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썼다. 그러니 아래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면을 보는 법을 잊어버렸다. 사람들의 사정, 그들이 짊어지고 사는 무게, 설명되지 않는 고통 같은 것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는 나를 공작새처럼 꾸미는 데에만 바빴다.


그래서 나는 가난이나 장애 같은 것들을, 나와는 아주 멀리 있는 세계인 것처럼 말해왔다.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돌이켜보면 그건 무지가 아니라 방어였다. 나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 세계와 나를 분리해두고 싶었던 것 같다. 모두가 나보다 더 당연하게 잘나 보였기 때문에, 내가 그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야만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로소 내 병을 알게 된 이후에, 자꾸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던 말들, 가볍게 넘겼던 농담들, 누군가를 향해 던졌던 단어들이. 내 친구의 동생이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그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면서도, 나는 친구에게 그런 이면이 있다는 걸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없었겠지. 나는 예쁜 깃털만 주워 나를 치장하는 데에 바빴으니까.


그리고 내가 친하게 지내던 남자애 역시 아주 가난한 집에서 자랐고, 대학을 다닐 때까지 화장실이 밖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정말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둘 다 직장인이 되고 회사 근처에서 맥주를 마시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낯설었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살아온 세계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곧 알았다. 이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한 번도 이어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걸. 부끄러웠다. 미안했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내게 어떤 하자가 생기고 나서야 알게되다니.


척으로라도 할 수 있었던, 노력해서라도 변화할 수 있었던
세계 속의 나는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만큼,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는 걸.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로.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한동안 나를 많이 미워했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반짝이는 깃털만 주우며, 한치 앞만 보며 살아가진 않았을까.


그런 내가 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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