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훈 Mar 25. 2021

기록의 이유

3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오늘은 평소보다 바쁜 날이었다. 더 정확히는 이동이 많았고,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난 날이었다. 오전에는 강남에 있다가 점심은 합정에서 먹었다. 다시 한강 남단으로 넘어와 어느 공유 오피스를 방문했다가, 해질녘에는 고속도로를 1시간 정도 달려서 저녁을 먹으러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와 주차를 하며 계기판에 표시된 기록을 보니 출근부터 퇴근까지 4시간 동안 120km을 운전 했던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이동 하던 길에 전화가 한 통 있었다. 63빌딩을 왼쪽에 두고 강변을 달리던중이었다. 오전에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생각나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얼마전 프로젝트를 함께 한 본부장님이었다.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오전에 전화 주셨는데 제가 못받았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죄송합니다를 뒤에 덧붙이지 못한 것이 내심 찔렸다. "아. 안녕하세요 . 다름이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가 이번주로 완전히 마무리가 되거든요. 수고 많으셨다고 말씀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본부장님의 말을 듣고나서는 죄송합니다를 덧붙이지 않은 것이 나를 더욱 깊숙이 찔러서 아팠다. 본부장님과 나 사이에는 사연이 조금 있었다. 업무 메일을 통해 일 관련 이런저런 소통을 하던 중, 내용 전달에서 내가 경솔한 단어 선택을 한적이 있었다. 차분하게 소통을 이어오던 본부장님은 바로 내게 전화를 걸어서 불같이 화를 내셨다. "당신 말투가 왜 그런식입니까?" 매우 격앙되어 있으셨고, 본인 앞자리에 있는 책상을 주먹으로 탕탕 내리치면서 따지는 듯한 모습이 수화기 너머로 그려졌다. 나는 곧바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사과드렸다. 충분한 설명을 듣고 난 뒤에는 내 사과를 받아주시고 아무쪼록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과 함께 전화를 끊으셨다. 이후에도 오고 간 수많은 언행이나 텍스트 전달에서 조금 더 신중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 마지막 소통이 오늘의 전화였다. 서로 고생했다는 의례적인 덕담을 나누며 본부장님께서 통화를 마무리하시려던 찰나에 내가 몇마디 덧붙였다.

"본부장님 지난번에 제가 본부장님께 혼났었잖아요. 어쨌든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때 있었던 일 다시 한번 죄송하기도 했었고 또 그 이후에 감사했었다는 말씀 한번 더 전달드리고 싶었습니다. 많이 찜찜하더라고요 ㅎㅎ" "아 네 전혀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말씀해주셨으니까 저도 몇 마디 덧붙여드리면, 저도 이번에 처음 진행하는 것이라 후회도 되고 힘들기도 했는데, 마치고 나니 참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많이 배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음에도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나니 남부터미널 옆으로 줄서 있는 차들이 보이는 곳까지 와있었다. 어쩌면 하루 종일 체력적으로 지칠법한 날이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은 본부장님과의 전화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오늘처럼 이곳저곳을 다니며 뿌리고 다니는 이 씨앗이 몇개월뒤에는 본부장님과의 오늘 있었던 통화처럼 돌아올 것이라는 열매로 보였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서는 우연히 3년 전에 적어 둔 일기를 읽었다. 마지막 문단의 첫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창조하고 기획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난 3년 동안의 모습이 빠르게 머리 속을 스쳤고, 꺼진 모니터의 검은 화면 속으로 3년이 지난 지금의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3년 전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나는 누군가의 기쁨과 성장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고, 이것이 내게 꽤나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되돌아보니 아무리 바쁜 날에도 동료와 파트너의 말 한마디에 기운을 차렸으며, 별 일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던 날이더라도 수화기로 들려오는 다그침에 잠들기 전까지 귓가에 무언가 맴돌았던 것이 그 증거였다. 이제는 조금씩 단단해지는 듯 하다. 아직도 한참 부족하지만,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일을 만나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은 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별안간 뜬금없이 이렇게 주절대는 까닭은 3년전에 내가 일기에 이런말도 써놨다. "순간의 기록을 조금 더 치열하게 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지만, 기록을 하는 사람은 무엇이 변하고 있는지 바라볼 수 있다. 나는 나를 여전히 더 잘 들여다보고 싶은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어벤져스 엔드게임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