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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훈 Aug 10. 2018

17년 만에 엽기적인 그녀를 다시 감상하며

전지현의 영화 속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평일 오전에 영화채널을 돌리다 보면 씨네드 살롱이라고 해서 오래된 영화들을 틀어주는 채널이 있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누가 틀어놓은 느낌이라 돌리던 채널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끝까지 종종 보게 된다. 오늘은 엽기적인 그녀가 나오고 있었다. 


2001년 개봉한 엽기적인 그녀를 17년 전 그즈음에 나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중앙공원 야외공연장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상영되는 엽기적인 그녀를 돗자리 펴놓고 잔디밭에 누워 가족들과 함께 보았었다. 그때는 그저 예쁜 누나 전지현의 ‘알겠지?’ ‘죽어~’를 능글능글 코믹하게 받아치는 차태현을 마냥 아무 생각 없이 히죽대며 보았던 것 같다.


엽기라는 단어도 생각해보니 어느새 21세기의 한 흐름 사이로 잊혀버린 단어가 되었다. 그때는 인형 뽑기 방 대신 문방구 앞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인형 뽑기에서 눈이 쫙 찢어진 엽기토끼 마시마로 인형이 가득했었지. 어느새 마시마로는 없어지고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TV로 스쳐 지나가는 엽기적인 그녀를 자주 접하긴 했지만 제대로 앉아 감상다운 감상을 하며 새롭게 눈에 띄는 것들이 꽤나 있었다.  


혹시 영화에서의 전지현의 이름이 무엇이지 기억하나? 아마 차태현이 맡은 ‘견우’는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 거의 웬만한 사람들에게 인지되어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일 테지만 전지현은 이름이 뭐였는지 아무리 되짚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검색창에 엽기적인 그녀를 쳐보았다. 어느새 연극과 드라마 그리고 또 다른 속편 때문에 엽기적인 그녀 1이라고 정확하게 검색해야 나오는 결과 사이로 나오는 전지현의 이름.


‘그녀’ 역 전지현.


그녀는 말 그대로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였다. 하긴 엽기적인 직녀도 아니었고 엽기적인 영숙이도 아니었지. 극 중 이름이 없다는 걸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적인 배우인 건 분명하다. 또 견우가 그녀의 아버지를 독대할 때 주머니 속에서 나왔던 네모나게 포장된 물건이 콘돔이었다는 사실도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전혀 몰랐었지. 견우와 그녀가 서로를 못 보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긴 에스컬레이터가 노원역이라는 사실을 다시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고, 촬영 당시 차태현은 어느새 내가 지나왔던 스물다섯밖에 안 되는 나이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견우와 그녀가 타임캡슐을 묻던 나무는 강원도 정선에 ‘엽기소나무길’이라는 충격적인 도로명 아래 타임캡슐 공원으로 조성되어, 영화를 기억하며 찾아온 연인들이 둘만의 추억을 심을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17년이 지난 감상에서 가장 인상 깊게 다시 다가온 장면은 I believe가 깔리던 그 장면도 아니고, 전지현이 견우와 약속한 2년에서 1년이 더 지나고 타임캡슐을 열어보러 찾아간 나무 아래에서 한 할아버지에게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장면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이 나무가 전에 알던 그 나무와 같은 나무처럼 보이냐고 묻는다. 사실 그 나무는 작년에 벼락을 맞아서 죽어버렸는데 한 남자가 새 나무를 들고 찾아와 심으며 이 나무를 기억하고 찾아올 사람이 있다고 닮아 보이는지 할아버지께 물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이야기 속의 그 사람이 자신임을 알고 뭉클해진 마음으로 견우를 다시 떠올린다.


엽기적인 그녀에는 견우의 바보 같은 웃음과 그녀의 도발적인 매력에 가려진 명대사도 존재하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 재회하는 견우와 그녀 사이로 깔리는 캐논 변주곡과 함께 나오는 차태현의 마지막 대사.


“전 그렇게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너무 우연이라고요? 우연이란 노력하는 사람에게 놓아주는 운명의 다리랍니다.”

견우가 해달라는 대로 다해주는 착한 남자라는 이유로 멋있어 보이진 않았다. 콜라를 마시고 싶어도 커피를 마시고, 다리가 아플 때 구두를 바꿔 신어주고, 맞으면 아파도 안 아프다고 말해서가 아니라 견우는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한 노력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그녀이지만 한 사람과의 약속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하고, 그로 인해 한치 부끄럼 없이 운명이 놓아준 다리를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결국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머리가 커가며 몇 안되지만 나름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임했던 연애들을 나도 거쳐오며, 내가 겪은 경험이 새롭게 쌓인 토대가 된 채로 다시 바라보는 엽기적인 그녀는 오늘따라 왜 그리 새롭게 다가오던지.


흐릿해진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고 멈춰져 있는 기억의 조각들은 대부분 기억하고 싶은 단면으로만 깨끗이 닦아내는 바람에 더욱 또렷하지만, 먼지가 묻어있는 기억의 또 다른 파편을 닦아내는 순간, 반짝이며 드러나는 잊고 있던 기억의 또 다른 단면을 찾아보고 싶은 날. 그런 날 이면 엽기적인 그녀를 늘 돌려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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