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의 라떼는 말이야
1989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는데, 명목만 대학생일 뿐, 실제로는 차마 학생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녹두거리에 있던 자취방에서 어슬렁 어슬렁 학교에 가서 학생회 실로 등교하고, 오늘의 투쟁일정, 세미나 일정(전공 세미나 아님) 확인하고, 수업은 거의 전폐하고 있다가 일정에 따라 세미나 하고 투쟁하러 가고, 아니면 족구나 하는 그런 녀석을 어찌 학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해 가을이었나 여름이었나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간 전교조 서울지부 결성식이 열렸다. 극비리에 집회 소식이 학생회로 전달되었지만, 이미 전경들이 정보를 다 알고 있어서 교문이 원천봉쇄되었다. 그래서 사범대 학생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사수대가 결성되었고, 관악산 뒷길을 통해 전교조 선생님들을 교내로 모셨다. 그렇게 집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당시 서울지부 결성식 참석 인원이 요즘 전교조 전국단위 집회보다 많았다.
원천봉쇄했던 전경이 "빡이 돌았다." 그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인지 당시 지명수배중이던 전교조 지도부의 이수호, 이부영 등의 선생님들을(다른 분들이었을 수도 있다) 체포한다며 밀고 들어왔다. 이 와중에 상당한 물리적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비겁하게 도망간것이 아니다. 전경들이 밀고 들어오기 전에 지도부 선생님 들을 빼돌려서 달밤에 관악산을 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달밤이라고 해도 들킬까봐 랜턴 하나 안 켜고 이동했기 때문에 중간에 몇번 씩 산 속에서 길을 잃었고, 그야말로 가시밭길을 해쳐가며 산을 넘었다. 그렇게 간신히낙성대역에 도착했을 때는 온 몸이 흙투성이 상처투성이였고, 바지는 거의 걸레처럼 찢어져 있었다.
그 꼴을 하고 여친 자취방에 가서 일단 죽은듯이 골아 떨어졌다가 다음날 아침 다시 그 꼴로 학교로 갔다. 그랬더니 아주 흉한 소식이 와 있었다. 전날 밤 전경들이 밀고 들어올 때 선배 누나 하나가 경찰들에게 심하게 맞아서 골절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갔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때 매 맞으며 고통스러워 하던 그 누나의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다음날 한겨레 신문 표지에 떡 하니 나와 있었다. 그런데 기자는 그 누나가 학생이 아니라 서울지부 선생님인줄 알았나 보다. 그 기사 타이틀이 "오늘날 이 땅의 매 맺는 선생님" 이었다. 참고로 그 누나는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었다. 돈을 많이 벌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름은 제법 알려졌다. 이 쯤 되면 누군지 감이 오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분노했고 규탄 집회를 하기로 했다. 급히 사범대학 각 학과에 통문을 돌렸다. 말하자면 번개 투쟁을 소집한 것이다. 하지만 어제 큰 싸움을 하고 난 다음이라 웬만한 싸움꾼은 다 자취방에서 뻗어 있었고, 결국 100명 정도 되는학생들이 모였다. 그나마 남학생은 10여명 정도. 아마 어제 싸움 끝나고 엄청 퍼 마신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모였으니 행진을 해야지. 그 100여명 중 그래도 남자랍시고 10여명이 손에 손에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지금 생각해 보니 참 골때리는 시대이긴 했다) 앞장을 섰고, 그 뒤를 따라 100여명의 학생들이 "폭력경찰 처단하라." 따위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그렇게 사범대학 페다고지 광장에서부터 10여분을 걸어 후생관 까지 내려가서 다시 10여분을 걸어 교문까지 갔다.
그런데 이게 뭐냐? 교문에 전경이 없다. 원래 교문을 전경이 가로막고 그러면 우리는 굳이 돌파할 마음은 없지만 돌파하려는 것 처럼 드잡이질 하고, 사람을 때려 눕힐 생각은 없으면서 각목, 쇠파이프로 애꿎은 방패만 두드려 패고, 그러다가 최루탄 팡팡 터지면 뒤로 물러나서 돌 좀 던지고 (화염병은 고가의 무기라 아껴야 했다), 그래야 그림이 되는데, 전경이 없다.
어쩌겠는가? 교문 밖으로 계속 행진할 수 밖에. 그랬더니 망할, 전경들이 교문에서 200미터 쯤 떨어진 삼성고등학교 건너편에 벌떼같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100미터 쯤 전진했다. 이제야 전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봐도 우리보다 두배는 되어 보였다. 난감했다. 100여명의 적은 병력으로 그렇게나 적진(?) 깊숙히 들어가가면 그냥 보쌈 당해버리고 어어 하는 사이에 전부 닭장차 신세가 될 것이 뻔했다. 잠시 행진을 멈추고 참석한 학과의 과회장들이 지도부 회의를 열었다. 전진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
솔직히 무서웠다. 아마 다들 무서웠을 것이다. 무기라고는 쇠파이프 4정, 각목 5개가 전부이고, 주로 여학생으로 이루어진 100명 정도의 대열. 돌도 화염병도 없고. 만약 저놈들이 와 하고 달려오면 그냥 박살 나는 거고, 쇠파이프니 각목이니 들고 있던 사람들은 그냥 현행범으로 아작나는 것이다. 당시 전경들은 현행범을 검찰에 넘기고 그런거 안했다. 그냥 현장에서 다굴쳐 버렸지.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회의가 길어질수록 나는 답답하고 초조해졌다. 투쟁의 열기, 싸우고 싶은 열망 때문이 아니다. 오줌이 마려웠다. 방광이 점점 수용 한계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당연히 교문밖 100미터 지점이라 화장실 따위는 없었고, 가장 가까운 화장실은 다시 뒤로 돌아가서 10분을 달려 후생관 까지 가야했다. 그렇다고 그자리에서 노상방뇨를 할 수도 없다. 대열의 대부분이 여학생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나는 좀 괴짜이고 파격적인 행동을 하긴 해도 근본은 신사다.
대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노상방뇨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대열에서 뒤로 가면 마치 투쟁 포기하고 도망가는 것 같아 보일것 같아 모양이 빠졌다. 그렇다면 대열 앞으로 좀 떨어진 곳 까지 가서 노상방뇨 하는 거다. 할 수 없이 대열보다 앞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다시 말하면 혼자 대열에서 튀어나와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간 것이다. 여학생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고 한다. "아, 저 오빠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나의 목표는 전경들의 팔랑크스가 아니라 그 앞에서 도도히 흘러가고 있는 도림천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경이 10미터 거리에 있는 지점, 그리고 대열이 90미터 떨어져서 내 모습이 구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지점, 도림천 다리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개천을 향해 시원하게 노상방뇨 했다. 뒤에서 보는 학우들은 그냥 전경 바로 앞에까지 가서 폼 잡고 서 있는 것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자 전경들 중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녀석들이 나왔다. 나도 웃었다. 너무 시원해서.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시 여유롭게 전경들을 등뒤에 두고 대열을 향해 저벅저벅 돌아왔다. 저놈들 중 몇명이 뛰어와서 뒷덜미를 채갈까봐 등골이 서늘했지만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저벅저벅 걸었다. 마침내 내가 대열에 합류하자 학우들이 밝은 모습으로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철수했다. 나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우리의 항의가 충분이 전달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셈이긴 했다. 보통 반문화 운동하는 사람들은 조롱과 항의의 뜻으로 엉덩이를 깐다. 그렇다면 나 역시 전경들 앞에서 좀 더 격렬한 항의와 조롱의 뜻을 표현한 셈이다. 물론 전경들은 그냥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어 했겠지만 말이다.
요즘 *86들 아재들이 20대들에게 라떼를 시전하며 가르치려 드는 모양이다. 심지어 80년대를 겪지도 않은 40대 아재들이 더 그러는 것 같다. 그게 하도 같잖아서 이런 시덥잖은 글 하나 남긴다.
라떼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