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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Sep 23. 2021

자기 객관화의 함정 -1

자기객관화가 잘되었다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몇년 전의 일이다. SNS에서 누군가가 나를 저격했다. 그런데 그 저격 문구가 재미있었다. 나를 "놀랄 정도로 자기객관화가 안 되어 있는 인물"이라고 꼬집었기 때문이다. 왜 재미있었냐고? 표적이 완전히 틀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칭찬으로 들을 말을 욕이라고 했으니 재미있을수 밖에. '자기객관화'야말로 내가 평생 거부해왔던 것이며, 지금도 거부하며, 죽을때 까지도 거부할 것이며, 자기객관화가 너무 안되어 있어 놀랄 정도였다면 내가 목표를 제대로 달성했다는 뜻이 되니 욕이 아니라 칭찬이 되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평생  자뻑, 과장된 자아, 관종으로 살겠다는 뜻인가? 만약 자기객관화를 거부한다는 말이 이런 의미로 느껴졌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 동안 '객관적'이라는 말에 당신이 너무 중독되었다는 뜻이다. 객관식 시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객관적이라는 말은 정확함, 진실, 신뢰할 수 있는 같은 의미를 주관적이라는 말은 치우침, 왜곡, 신뢰할 수 없는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이라는 말 어디에도 정확하다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다. 객관적이라는 것은 다만 무엇을 대상( Object)으로, 즉 자기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사물(Thing)로 보는 관점을 말할 뿐이다. 가령 내가 저 연필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할 때는 저 연필이 누구 것인지, 저 연필을 사용하는 사람과 나의 관계가 무엇이며, 저 연필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완전히 배제하고 철저히 사물로서 나와 아무 관계 없는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바로 이 객관적 사고방식이 근대 특히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핵심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생물이든 혹은 추상적인 것이든 무엇인가를 이런 객관적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 과정이 바로 객관화다. 이는 나 혹은 다른 어떤 관계에서 떼어내어 철저히 객체로 만드는 과정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근대의 정신인 이 객관화의 과정을 평생 가슴아파했다.  그의 유명한 시 '들국화'는 들판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들국화를 들판과 자연과 감상자의 관계속에서 바라보지 않고 그 연관에서 잘라내어 한낱 하나의 소유대상으로 취급하는 근대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은유다. 


근대 초기, 사람들은 자연을 객관화, 즉 대상으로 만들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에 열광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놀라운 과학기술혁명을 일구어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객관화는 그 대상을 자연이 아니라 사람으로까지 확장했다. 예견된 사태였다. 사람이 자연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어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반대로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년 마르크스는 1844년 파리노트에서 이를 '소외'라는 용어로 날카롭게 지적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노트는 발표되지 않았고, 마르크스 자신도 차차 사람을 계급의 구성원, 생산양식의 대행인으로 대상화하는 쪽으로 흘러버렸다. 적어도 19세기 말까지 객관화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무자비한 힘이 아니라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만드는 보검이었다.


이 객관화의 무자비한 힘이 다시 비판 대상이 된 것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니체와 프로이트가 서구인의 정신세계를 뒤흔든 다음의 일이다. 막스 베버는 '강철새장'이라는 비유를 통해 사방팔방 객관적으로 규정된 세상 속에서 꼼짝없이 갇혀버린 현대인의 왜소하고 옹색한 처지를 비관했다(비판이 아니라 비관). 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간 실존철학, 비판이론은 이 객관화의 무자비한 힘이 단지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규정으로 작용함을 끈질기게 파헤쳤다. 


베버의 강철새장속에 있는 자아는 자신이 새장속에 있음을 알고 슬퍼할수라도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 아도르노 등이 바라본 현대인의 자아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새장을 만들고 새장 속에 있는 것을 오히려 정당한 상태, 정상적인, 건전한 상태로 슈정한다. 외부의 기준, 외부의 규정, 외부의 압력을 내면화한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의 초자아일수도 있고, 비판 사회학에서 말하는 일반화된 타자의 모습일수도 있고, 혹은 자신이 존재임을 깨우치지 못한 무의식적 순응의 상태일수도 있다. 이러한 내면화가 이루어지면 자기 자신을 외부에서 주어지는 기준에 따라 평가하기 때문에 외적인 압력이 굳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외적인 기준에 맞춰진 자신이 정상 상태, 벗어나면 일탈이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한 것이다.


자기객관화가 잘된 인물은 자신에게 어떤 창조성도 영웅적 기상도 없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평 반의 작은 작업공간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노동을 하고 자그마한 보수를 받아 자그마한 가정을 꾸리고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키우는 것을 특별하지 않는 사람으로 태어난 자신의 작은 행복이라고 평가한다. 나아가 이런 작은 행복의 길에서 벗어나려는 자신을 '일탈'로 규정하며 꾸짖는다. 

"너 주제에 무슨 엉뚱한 생각이냐? 너는 평범하다. 너는 남보다 잘나지 않다. 너는 특별하지 않다. 그냥 지금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라."

이렇게 자기객관화는 수많은 자발적인 일개미들을 생산하여 거대한 자본주의 기계가 외적인 강제력 없이 자동으로 작동할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비판사회학에서 자기객관화는 자신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 따위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체계가 개인을 순화시키고 지배하는 술책으로 사용된다. 푸코가 말한 "순응하는 신체"는 다시 말하면 "객관화된 신체"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객관화, 즉 객체로 삼을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그 고유한 영적인 특성을 박탈당하고 다만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다. 이성은 계몽의 과정에서 오히려  명징한 굴레와 감옥을 스스로 직조한 뒤, 스스로를 수감시켜버리면서 계몽 이전보다 더 캄탐한 상태로 잠재워버린다. 이 과정이 바로 계몽의 변증법이다. 이 과정은 절대 체계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억압적 체계와 구조는 외적 사물이 아니라 내적 규율로 자리잡으며 주체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이루어진다. 바로 자기객관화다. 


 자기객관화는 자기효능감의 저하와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순응으로 이어진다. 설사 순응을 거부하고 순응하는 것을 답답해하고 고통스러워 하더라도 일단 자기객관화가 버릇이 된 이상 이를 벗어나기 어려우며 결국 내적인 모순과 균열 상태에 빠져들게 만든다. 자기객관화는 받아들이기도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어렵다. 자기객관화가 잘된 사람의 마지막이 완전한 순응 혹은 우울증의 양자택일인 이유다.  


내가 페이스북에 "대한민국 3대천재"라고 쓰는 것은 자기객관화를 거부하는 하나의 표지기다. 나는 5천만명 중에 나보다 훌륭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 두명 보다 많을 가능성을 모를만큼 어리석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객관적인 판단에 나를 맡기고싶지 않다. 내가 3대천재라고 생각하는 한 나는 적어도 30대 천재까지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다. 


나를  '대상'으로 보는 '객관적'으로 다루려는 사람과 세력은 안그래도 많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재산으로 환원하고, 어떤 사람은 가방끈으로 환원하고, 어떤 사람은 페이스북에 쓰는 싸가지 없는 까진 글로 환원하고 등등. 나는 만나는 장면마다, 나를 드러내는 공간마다 전혀 다른 나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것은 나를 규정하지 말라는 경고이며, 스스로 객관화되지 않겠다는 절규다. 그 과정에서 '도른자' 소리 듣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다. 온 세상이 나를 객관화할 기회를 노리며 압력을 행사하는데 나까지 나서서 나를  '객체'로 다루어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겠다. 세상 모든 것이 나를 대상으로 삼더라도 자기 자신만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 자기는 객관화의 대상이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자기 대상화로 바꾸어보자. 영어로는 같은 단어다. 자, 그럼 어떤 느낌이 드는가? 살벌한 느낌이 들 것이다. 


최근에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제의 강력한 압력이 발현되는 매개로 '자기객관화'를 주목한다. 그래서 자기객관화의 대표적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많은 여성들의 자기 평가, 특히 외모에 대한 평가다. "자기객관화 좀 하지 그래" 이 말은 철저히 가부장의 언어이며 여성을 향해 내리치는 채찍이다. 그런데 이건 너무 주제가 커지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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