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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Oct 10. 2021

자기객관화의 함정 -2

너무도 어려운 과업, 객관화

자기객관화의 위험성과 정치적 음흉함에 대해 이야기 하는 시리즈다. 먼저 서론에 해당되는 1편을 읽어보기 바란다. 


https://brunch.co.kr/@hagi814/124


당연한 말이지만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자기객관화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계속 쓰는 동기는 주관적이지만은 않다. "자기객관화"를 요구하는 개개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론 개인적인 감정이 없다. 다만 그 개개인들의 주장이 가지는 위험성을 느낄 뿐이다. 


자기객관화의 요구는 특정한 개인을 길들이는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특정한 집단 전체를 길들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그 집단이 검찰처럼 실제로 강력한 힘을 발휘해온 집단이라면 그 요구가 전복적인 힘을 가지겠지만, 교사처럼 알고보면 동네북인 집단이라면 그 요구는 "진보적이고 전복적으로 보이면서 실질적인 보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싸구려 저항성"에 불과하다. 그래서 내가 서태지나 이적을 하찮게 본다. 


이제 객관이라는 말을 다시 살펴보자. 사전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은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 만약 그 대상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라면 그런 관점을 취하는 것이 아주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 난이도에 편차가 있다. 그 사람, 사물이 그 사람,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큰 폭으로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편차를 이해하려면 '자아의 범위', '확장된 자아' 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자기 신체조차 자아 범위 안에 들어있지 않다. 신생아가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일은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며 어디까지가 자기 신체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범위까지가 자아의 범위다. 따라서 영유아는 자기 신체의 범위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양육자와 자신을 분리하는 과정까지 거쳐야 자아의 범위를 확정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원하가나 떼를 쓴다고 반드시 양육자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그리하여 양육자 역시 자신이 소통하고 교섭해야 할 대상임을 확인해야 한다. 


영유아는 먼저 양육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며 객관화 한다. 마찬가지로 사물들도 내가 원한다고, 손가락을 뻗어 가리킨다고 바로 내 손에 들어오지 않음을 확인함으로써 객관화 한다. 이런 객관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은 자아를 다른 사람, 사물과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로 의식하게 되며, 그렇게 다른 사람, 사물과 구별짓는 근거를 의식하게 된다. 바로 자아 정체성이다. 


그렇다면 사물이나 다른 사람은 무조건 객관화 되는 것일까? 아니다. 삶이 계속되면서 사람은 여러 사물이나 사람들 중에 특별히 자신이 애착을 가지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대상들을 만들어 간다. 이 과정이 바로 '의미 부여'다. 이 세상에는 나, 타인, 사물, 그리고 내가 의미를 부여한 타인과 사물로 이루어진다. 이때 의미를 부여한 타인과 사물 중 나의 정체성, 즉 자아를 다른 대상과 구별하는 근거에 포함되는 타인과 사물은 자아의 연장선상에 포함된다. 이로써 자아를 분리한 영유아는 사회화 과정에서 자아를 확장하게 된다. 먼저 분리, 그리고 확장. 이 확장된 자아에는 가족, 연인, 공도체, 국가, 민족, 그리고 특별히 애착을 가지는 사물들, 관념들, 행위의 유형 등이 포함될 것이다.  


먼저 분리 그리고 확장이라는 공식에는 부모, 형제 등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가족은 일단 자아와 분리되어 객관화된 다음 지속적인 관계와 교섭을 통해 자아에 다시 포섭되는 과정을 거치는 1호 대상이다. 이 과정을 통해 형성된 가족은 상호독립적이면서도 튼튼하다. 반면 단지 자아와의 분리가 불완전하게 이루어짐으로써 결속된 가족은 겉보기는 매우 끈끈하지만 사실은 분리불안에 의해 결속되어 있는 매우 취약한 가족이다. 이 분리불안은 때로는 폭력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도 한다. 특히 가족은 물론 국가, 민족, 종교 등의 공동체마저 분리하지 못하면서 여기에 자아를 밀착시키는 경우가 매우 위험하다. 이 경우 그 폭력적인 반응이 집단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가족에서 분리되지 못한 사람들이 넓은 사회에 내던져졌을 때 종종 나타난다. 학교에 애착을 느끼고, 직장에 애착을 느끼고, 그러다 실업자가 되면 국가나 민족에 애착을 느끼며 여기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격렬한 반응(이는 주로 자신의 애착의 대상을 위협하는 적을 상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이는 사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상호작용하는 사물들을 자신의 정체성에 포섭해가며 확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특정한 유형의 사물을 자신의 정체성에 포함시켜버리며 유아적으로 애착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사람이 특정한 사물을 자아의 연장선상에 두는 성향을 마케팅에 활용한 것이 바로 '브랜드'다. 만약 '브랜드'에 대한 유아적 애착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브랜드 제품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나 평가를 마치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물론 이 브랜드는 인물에도 적용되어 여러 종류의 팬덤을 만들어낸다. 그 브랜드 인물은 연예인일수도 있고 정치인일수도 있고 종교인일수도 있다.   


이렇게 객관화가 어렵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제3자의 관점을 취해야 하며, 이는 그 사람, 사물과의 관계 단절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미 사람들은 수많은 다른 사람, 집단, 사물들을 자신의 확장된 자아 혹은 미처 분리되지 못한 자아로 가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 분리불안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객관적 관점'은 남 이야기 할 때는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지만 막상 그것을 자신의 행위로 가져올 경우에는 그저 말로 끝나기가 쉬운 그런 말이다. 하물며 '자기 객관화'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자기 자신은 물론 의미있는 타자, 심지어 자기가 좋아하는 특정한 사물이나 인물의  '브랜드'에 대해서도 객관적이 되기 어렵다. 


그래서 객관화가 생명인 과학에서는 연구대상의 인격성, 의미를 말살하는 훈련을 한다. 해부학 실습때 사체의 얼굴을 가리는 것도 그 때문이며, 연구대상을 그것이 존재하는 원래의 맥락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실험실이라는 인위적 환경에서 표본이라는 인위적 상태로 만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생물학자라도 제인 구달 같은 동물행동학자와 프랜시스 크릭 같은 분자생물학자 눈 앞에 원숭이가 나타났을때 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는 '자기 객관화' 혹은 그렇게 불리는 행위를 한다. 그리고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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