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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Jan 11. 2022

불신이 낳은 학교의 종이똥들

교육개혁은 교육행정 개혁부터

누군들 겨울이 춥지 않겠냐만 교사는 겨울이 특히  춥게 느껴진다. 생활기록부를 비롯한 각종 문서 작성에 혼이 팔리다 보면 아무리 마음이 따뜻하던 사람이라도 싸늘하게 식어버릴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온갖 잡다한 문서의 바다에서 허우적 거리다 보면 블록 체인이니 NFT 인공지능이니 하는 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우주가 아니라 평행우주에 있는 대한민국이 아닌가 싶다.

첨단 IT기술을 자랑하는 나라, 일본이 아직도 공문서를 종이에 손으로 쓰고 팩스로 전송한다며 비웃는 나라에 웬 종이 문서가 이렇게 많은지 해마다 겨울이 되면 교사들은 중이 무덤 아래 깔려 신음한다. 모든 것이 서로와 서로의 불신이 내지른 ‘종이똥’ 들이다. 어떤 어떤 똥들이 있는지 아주 일부만 예를 들어보자. 진짜 극히 일부분이다.

코로나 증상이 의심되어 PCR검사를 받으러 조퇴한 학생이 있다. 학생이 그렇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믿어야지. 하지만 교육당국은 이를 믿지 말고 반드시 ‘종이로 된’ 증명서를 받아서 종이로 작성한 결석계에 첨부한 뒤 학생과 학부모의 서명을 받고 교무부장, 교감, 교장 서명을 받아서 철해 두라 한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전국민의 개인정보를 전산화하여 일련번호로 관리하는 세계에 몇 안되는 나라다. 그렇다면 PCR검사를 받는 순간 이 학생의 검사여부, 음성양성 여부가 바로 전자출석부에 기재되도록 시스템 따위는 코로나 시국 한 달이면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못 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학생 백신 휴가도 그렇다. 대한민국은 전국민의 접종 일정과 접종 확인이 전자적으로 관리되어 접종과 동시에 방역패스가 휴대폰에 전송되는 나라다. 그런데 유독 학교만 예외다. 학생이 백신 접종을 하고 공가를 내면, 백신 접종 증명서 종이로 출력하여 제출하고, 이것을 결석계에 첨부하여(물론 종이 출력물이다) 학생, 학부모의 서명을 받은 뒤 교무부장, 교감, 교장의 서명을 받아 종이로 된 문서 파일에 철해 두어야 한다. 학생이 백신 접종 예약을 하면  즉시 교무행정시스템(나이스)에 반영되고 오히려 시스템이 담임에게 “아무개 학생은 오늘부터 2일간 백신 접종 휴가입니다.”라고 알림이 가는, 학생이 접종하면 “아무개 학생 접종 완료하였습니다.”라고 알림 가고 출석부에 자동으,로 입력되는 그런 시스템은 정말 못만드는 것일까?

일일이 종이 출력물 걷어다 그걸 마우스로 클릭해서 입력하고, 다시 그걸 종이로 출력해서 눈으로 확인한 뒤 수정하고 이럴 거면 애초에 출석부나 생활기록부를 왜 전자문서로 바꾸었는지 궁금하다. 이건 그냥 종이 문서에 전자 문서를 하나 보탠 것에 불과한데, 이쯤 되면 못하거나 안하는 게 아니라 교사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낡고 고약한 시스템을 운영하는것 같다는 비뚤어진 생각까지 든다. 

아 참, 가정통신문을 빼먹을 뻔 했다. "라떼는" 하던 시절에 있었던 가정통신문이 아직도 성행중이다. 공문서조차 전자적으로만 유통되는데 종이로 출력하여 학생 편으로 보냈다가 -말하자면 20세기의 문서 수발 시스템이다-  학생편으로 수합하는 가정통신문이 여전히 종이의 홍수를 이룬다.  수합하는 이유도 절반 이상은 “읽었음”을 확인하는 용도다. 해마다 학년말, 학년초가 되면 교사들은 종이 나눠주고, 종이 걷고, 종이 안 가져온 학생 독촉하느라 도무지 교육에 관심 둘 틈이 없다.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이런 종이 무더기야말로 교육 불평등 심화, 학력격차 확대의 주범 중 하나다.  그 과정은 이렇다. 학년말이 다가올수록 교사는 종이 나눠주고 종이 걷는 일에 깔리게 되고, 이쯤 되면 학생이 학생으로 보이지 않고 종이로 보일 지경이 된다. 그런데 학업성취도가 떨어지는 학생들일수록,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학생일수록 종이 나눠주고 걷을 일을 많이 만둔다.  더구나 그런 학생들이 대체로 나눠주는 종이를 제대로 관리 못하거나 챙겨오지 않아 교사가 했던 일을 또 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 밖에도 그런 학생들로 인하여 작성해야 하는 온갖 잡다한 서식, 계획서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교사도 사람이다. 이런 일이 자꾸 누적되면 과연 그런 학생들이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피고 지도할 대상으로만 보일까 아니면 일덩어리 문서덩어리로 보일까? 오히려 그 얼굴만 보면 일단 걱정과 짜증이 앞서지 않을까? 최악의 경우 학생에게 가야 할 사랑과 정성은 온갖 문서에게 가고 정작 학생은 사랑과 정성의 잔존물이나 겨우 받거나 도리어 잔소리나 짜증만 듣는 경우가 발생한다. 대한민국 학교에서 문서질은 만악의 근원이다. 굳이 이걸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면 수업 하지 않는 사람들이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그래서 승진한 거 아닌가?- 대신 해 줄 일이다. 

스마트 교육이니, AI교육이니 하는 공문이 범람하고 온갖 연수가 개설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스마트나 인공지능이 절실히 필요한 곳은 수업 현장이 아니다. 그 곳은 다름 아닌 교육행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스마트한 인공지능이 어떻게 구현되고 일과 삶을 어떻게 좋게 바꾸는지 체감하지 못하는 교사가 수업에 스마트니 인공지능이니 도입하라는 공문이나 받고 연수나 강요당하는 현실은 스마트하지도 못하고 반지능적이기까지 하다. ‘스마트 교육, 인공지능 교육 계획 수립 및 실적 보고’라는 종이 문서를 한글(HWP)로 작성하느라 무수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교사 모습을 더는 보고싶지 않다. 아직도 라떼 수준에서 맴도는 학교 시스템도 더는 보고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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