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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Apr 19. 2020

총체적 불신의 시대 교사의 자리는 어디인가?

세월호 참사가 던져주는 깊숙한 물음

이 글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때 한겨레 <나들>이라는 월간지의 외뢰를 받아 쓴 글입니다. 당시 세월호 문제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간 "가만히 있으라"라는 칼럼의 그릇된 영향을 우려하여 쓴 글입니다. 원래 저는 예전에 썼던 글 다시 올리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지만, 4월 16일만큼은 그 당시, 그 느낌 속에 쓴 글보다 나은 글을 없고, <나들>이라는 잡지가 폐간되어 다시 볼 수 없기에, 보존의 의미에서 여기에 옮겨 둡니다.


(이하 원문)


도덕까지 침몰시킨 세월호 참사

원래 의뢰받은 원고는 “교사가 참사를 만났을 때”라는 제목이었다. 그런데 글을 쓰면 쓸수록 이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세월호는 참사에 마주쳤을 때 교사의 역할 뿐 아니라 교사의 역할과 위상 그 자체까지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교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 한중일 청소년의 학교선생님 신뢰도 조사(여가부, 2010)에서도 77.6%의 신뢰도를 보여주었다. 이는 61%에 불과한 일본과 크게 대비되는 결과다. 교사에 대한 이런 높은 신뢰도는 교사 개개인의 자질과 품성 때문이 아니라 국민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초자연적 믿음이 상실된 오늘날, 사회(특히 국가)는 사람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며, 교사는 이 사회에서 합의된 공적 가치와 규범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래서 뒤르켐은 교사를 성직자의 기능적 등가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는 교사가 대변할 공적 가치와 규범을 침몰시켰다. 이제 “교사가 참사를 만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순직을 각오할 것인가?” 수준을 넘어 “공인된 절차와 전문가의 지시를 따르라고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각자 스스로 판단하여 살길을 찾으라고 가르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되어버렸다. 순직여부는 오히려 쉽다. 대부분의 교사는 위기 상황에서 학생과 운명을 같이한다. 물론 교사들이 모두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겠지만, 심지어 체벌과 촌지로 물의를 일으킨 교사조차 이런 상황에서는 순직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세월호에서 순직한 교사들이 “해난사고 발생시 질서를 지키고 선장과 선원의 지시를 따른다.”라는 합의된 규범을 충실하게 이행한 결과 학생과 함께 모두 목숨을 잃었고, 오히려 규범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도덕을 무시하고 약삭빠르게 자기 이익을 챙기라는 주장을 비난한다. 그런데 세월호에서는 도덕적으로 행동한 교사들은 죽었고, 반대로 행동한 선원들은 살았다. 교사들이 대변해야 할 도덕이 침몰한 것이다.


그렇다고 자력구제를 가르치자?

일부 진보인사들은 “규범에 순응하는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며 무비판적이고 순응적인 학교교육을 비난했다. 이른바 “어른 말 잘 들어서 목숨을 잃은 착한 아이들” 담론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학교 현장을 보지 못했거나, 보고도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씩이나 된 학생들이 모두 고분고분 순종적이라는 전제부터 비현실적이다. 그들 중에는 반항아도 있고, 학교폭력 주범도 있고, 교권침해 주범도 있고, 밤마다 알바 다니며 세상 알 만큼 다 아는 녀석들도 있다. 그들이 비판적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어른들 말에 그저 “네.”하고 순종하는 고분고분한 학생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반문해 보자. “선장과 선원을 의심하고 각자 알아서 살 길을 찾아라.”라고 가르쳐야 옳았을까? 위기 상황에서 공인된 전문가나 권위 있는 자리에 있는 책임자의 지시를 따르지 말고 각자 상황을 판단하여 ‘자력구제’하라고 가르쳐야 옳았을까? 그 결과는 서로가 서로를 짓밟는 아수라장이다. 영양들은 강을 건너다 악어를 만나면 서로가 서로의 머리를 밟으며 빨리 건너가려다 결국 가장 약한 놈이 잡아먹힌다. 오직 사람만이 권위를 창출하고 그 권위에 의해 가장 약한 개체부터 질서 있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게 사람됨이며 사람의 존엄함니다.


물론 한국 사회가 썩 믿을만한 사회는 아니다. 남영호, 서해 페리호 참사 모두 무능하고 무책임한 관계당국, 탐욕스러운 선사, 그리고 소신 없는 선장들에 의해 발생한 인재였다. 그러나 적어도 선장의 지시 때문에 오히려 희생자가 늘어났다거나, 해경이 구조보다는 자기들의 실책을 은폐하는데 급급하다거나 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삼풍백화점 참사나, 대구 지하철 참사 때에도 적어도 구조 기관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세월호의 교사나 학생들 역시 우리 사회가 아무리 엉망이 되었을지라도 마지막 보루인 구조시스템만큼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기울어진 세월호에서 질서정연하게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한 학생들은 일부 진보지식인들의 비판처럼 복종과 순응을 학습한 순둥이라서 수동적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질서가 무너지고 저마다 살자고 나서면 공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적어도 우리나라의 구조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믿고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이 생각 자체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심지어 세월호 참사 이후 강화된 야외체험활동 안전교육 지침에도 여전히 “해난사고가 발생하면 선원의 지시를 따른다.”라고 되어 있다.


인간은 사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정신이 무너진다.

아무리 훌륭한 나라라도 부도덕한 개인은 있다. 그런 사람이 없더라도 가지가지 우연들이 겹쳐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두려움 없이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까닭은 그런 사태를 예방하는 시스템과 발생했을 경우 구조하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기 어렵고, 심지어 집조차 언제 무너질지 불안하다. 이런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며 정신적으로도 버티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회, 그리고 그 사회의 규범과 가치를 믿고자 한다. 믿고 따를 공동의 것이 없는 인간의 삶은 나약하고 불안하고 비참하고 짧다.


그래서 볼테르는 “신이 없다면 하나 만들어라.”라고 절규했고, 뒤르켐은 그 신의 기능적 등가물로 “사회”를 제시했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수천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도 “공동체 없이 살수 있는 사람은 인간 이상의 존재(신)이거나 이하의 존재(짐승)”이라고 했다. 사회를 이룬 인간은 강인하지만 한 개인으로 전락한 인간은 나약하다. 이렇게 나약한 개인으로 세상의 파고에 노출된 개인은 거의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멘붕이라고 부르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에 대한 신뢰는 사실은 사회에 대한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기댈만한 사회가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끔찍한 재난이 발생해도 우리를 보호하고 구하는 사회체계와 권위자가 있다는 믿음 덕분에 우리는 어떤 재난이 일어나더라도 멘붕에 빠지지 않는다. 육상 참사에서는 119 구조대가, 해상 참사에서는 해경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실제로 직업신뢰도 조사에서 늘 1위를 달리는 직업은 구조대다. 오렌지색은 사회에 대한 신뢰의 마지막 보루다.


믿음이 무너진 사회에서 교사는 무엇을 가르치나?

세월호 참사는 오렌지색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신뢰체계를 무너뜨렸다. 선사와 선원들의 부도덕한 행태는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이를 감시하고 바로잡아야 할 사회체계는 하나도 작동하지 않았다. 선박 구조변경의 인허가, 선박의 운항 허가, 선박의 항적 감시, 해난사고 발생시 신고접수와 처리, 구조, 상황 집계, 그리고 보도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멀쩡하게 돌아간 게 없다. 청와대는 전원구출이라는 보도가 나왔을 때는 ‘청와대가 진두지휘했다’라고 하더니 대참변으로 귀결되자 ‘청와대가 재난의 컨트롤 타워는 아니다.’라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학생들은 뉴스, 신문, 각종 SNS를 통해 이런 상황들을 거의 날것 그대로 접했고, 큰 충격을 받았다. 청소년기는 공식적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즉 개인에서 사회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다. 그런데 그들은 미처 사회인이 되기도 전에 그들이 몸담게 될 사회의 총체적인 무능, 무책임, 그리고 그 결과로서 끔찍한 죽음을 목격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실종자들을 구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라는 상담의사의 증언처럼 그들은 이 참사를 어른들이 아이들을 죽인 사건으로 더 나아가 국가가 아이들을 버린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어떤 진보 지식인은 “사회를 믿지 말고, 스스로의 판단을 믿으라.”고 가르치라고 한다. 학생들이 어른과 사회의 권위를 의심하기로 마음먹으면 자유로운 영혼과 비판적인 정신의 소유자로 자라리라 믿는 모양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은 어떤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유대감을 느끼지 못할 경우 불안, 우울 등의 상태에 빠지기 쉽다. “어른들을 믿지 말라.”라고 가르치는 것은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절망시키는 행위다.


하지만 지금 교사들을 ‘크레타 섬의 역설’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교사가 누리는 높은 신뢰는 교사 개인의 인품 덕분이 아니라 아무나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선발하고 인증한 사람들이 교사로 들어온다는 믿음의 공유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사회 시스템 전체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


그런데 교사가 여전히 사회를 믿고, 어른을 믿고, 공인된 권위자를 따르라고 가르친다면 이는 거짓을 가르치는 것이다. 실제로 70, 80년대의 많은 교사들이 거짓을 가르치도록 강요받는 것을 고통스러워했고, 해직을 불사하며 싸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 어른, 공인된 권위자를 믿지 말라고 한다면 이는 교사에 대한 신뢰의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결과가 되어 “그렇게 말하는 당신 말은 어떻게 믿느냐?”는 반문에 직면한다.


사회를 믿지말라 가르치는 대신 사회를 가르친 내용으로 바꾸어라

다행히도 이 난처한 상황을 벗어날 길이 있다. 그것은 어른 중에서 ‘믿을만한 어른’, 사회 시스템 중 ‘믿을만한 시스템’, 공인된 권위자 중 ‘믿을만한 권위자’를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말로 이루어지는 가르침이 아니다. 실제로 학생들에게 사회에서 믿을만한 대상을 가려내는 경험과 훈련을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이게 바로 비판적 사고능력을 기르는 교육이다. 비판적 사고능력은 어른과 사회를 믿지 않고 비판하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을만한 어른과 사회시스템을 가려낼 때 필요한 능력이다.


교사는 자신이 학생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 까지도 감수해야 하면서, 동시에 믿을만한 어른으로서의 본보기도 되어 주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걸머지어야 한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모순적이지 않다. 평소에 규범, 권위, 어른을 비판적으로 의심해 본 학생이라면 믿을만하다고 판단한 규범, 권위, 어른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충실하게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비판교육의 정수다.


하지만 비판교육은 사회와 어른에 믿을만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교육이다. 믿을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사회는 비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세월호 이후 학생들은 우리 사회와 권위, 어른들 전체를 의문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판교육이 아니라 반사회교육, 반교육적 선동이 잘 먹혀들어가며, 이는 역사적으로 파시즘으로 가는 전주곡과도 같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 세상이 무조건 침몰 위험에 처한 배는 아니며, 또 설사 그런 위험에 처하더라도 그런 배를 그저 방치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님을 입증시켜야 한다. 교사가 사회를 비판하고 바로잡는 능동적 시민으로서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을만한 어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학생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교사는 다음의 두 과제를 이행해야 한다. 1) 학생들이 스스로 믿을만한 어른, 시스템, 권위를 가려내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 이 경험에는 교사 자신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야 한다. 2) 교사 자신이 학생들이 살아갈 사회를 믿을만하게 개선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믿을만한 어른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


물론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교사가 비판적 지식인이자 시민으로서 사회 개혁에 참여하는 본을 보이는 것과 학생들을 선동해서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견해를 주입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또 정치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교육정책, 입시교육에 대한 가족이기주의적 압력, 조금만 비판적이 되면 쏟아지는 보수진영으로부터 쏟아지는 종북 색깔 공세, 진보진영의 요청에 조금만 못 미치면 쏟아지는 기회주의자라는 비판 등에도 흔들리지 않고 학생이 믿을 수 있는 어른의 역할 모델로 버텨낸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이겠는가?


자, 이쯤에서 다시 “참사를 만나면 교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원래의 물음으로 돌아와 보자. 놀랍게도 그 대답은 여전히 “선장과 선원들, 그리고 구조대의 지시에 따라 질서 있게 탈출하게 지도하라.”다. 그리고 더 나아가 “위기 상황에서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권위자나 전문가의 지시를 따르라”고 가르쳐야 한다. 어떤 해난 참사에서도 선장과 선원의 지시를 따르는 것 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또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경험많은 전문가의 지시를 따르는 것 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하지만 세월호 이후 교사에게는 이제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책무가 추가되었다. 가르침을 바꿀 수 없다면, 그 가르침이 거짓이 되지 않도록 현실을 바로잡는 것 까지가 교사의 책무가 되었다. 과거에는 교육 내용이 “세상이 이러이러하다.”라는 서술이었다면, 세월호 이후의 교육 내용은 “세상을 이러이러하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비판이 되었다.


물론 이런 일을 하는 교사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탈출하기 가장 좋은 선실에 있다 굳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사지로 뛰어들었던 단원고등학교의 동료들처럼 지금 살아있는 교사들도 침몰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호에서 가장 위험한 사지에 뛰어들어야한다. 더구나 이 배에는 구명정도 없고, 구조대도 없고, 선장과 선원들의 자질도 의심스럽다. 이 배의 승객들이 가장 든든하게 믿고 있던 오렌지색에 대한 믿음도 무너졌다. 이제 남은 길은 어떻게든 배를 고치고, 선장과 선원들을 다그쳐서 배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모든 교사 동료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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