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35년 5화 임용고시 거부투쟁

by 권재원

임용고시 거부투쟁


교생 실습 점수가 D-로 찍힌 성적표를 받았지만 나는 오히려 후련했다. 어쨌든 이수는 이수된 거니까. 이 지긋지긋한 교생실습을 재수강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의 교생 실습 마지막 날 분위기는 심란했다. 교육과는 무관한 이유 때문이다. 바로 징병검사(신체검사) 영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징병검사날이 교생 실습 끝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징병검사를 받으러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오늘날 동서울 터미널의 전신이고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마장동이 아니라 용두동)를 가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하필 그게 장마의 시작이었다.

그 때만 해도 분가하기 전에는 아버지 본적지 관할 병무청에서 징병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서울이 아니라 경상북도 예천까지 가야 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징병검사 받으러 200 킬로미터 떨어진 시골에 그것도 비까지 맞아가며 가는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동마장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군 전체의 인구를 다 합쳐도 역삼동 인구밖에 안되는 예천까지 갔다. 징병검사는 아침 9시 부터였기 때문에 서울에서 새벽 첫 차를 타도 갈 수 없었다. 그 전날 미리 가서 하룻밤을 시골 여관에서 보내야 했다.

마침 그 날은 이탈리아 월드컵 한국 대 스페인 경기가 있는 날이었고, 경기는 한국 시간으로 새벽 네 시인가 그랬다. 나는 그 경기를 보기 위해 여관에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스페인한테 농락당한 뒤 참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다음날 모든 바이탈 사인이 엉망으로 나왔다. 당시는 20대 남성 공급이 넘치던 시절이라 현역병 수요가 거기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어차피 내 시력으로는 현역 판정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방위(공익근무 비슷한 단기병)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병역 면제 판정을 받았다. 나는 사실상 시력이 오른쪽 밖에 없는 수준인데(계단 내려갈 때 몹시 불편하고 가끔 구르기도 한다), 이런 저런 바이탈 사인이 엉망으로 나오니 징병관이 “이 따위 녀석, 방위로도 못써먹는다”라고 결정한 모양이었다.

뜻밖에 병역 면제 판정을 받고 나니 남은 일은 2학기를 대충 보내다가 졸업하면서 서울지역 공립 중학교에 발령 받는 것 뿐이었다. 덕분에 10월에 주로 이루어지는 이런 저런 대기업들의 신입사원 공채를 가벼운 마음으로 무시하고 대학의 마지막 가을을 아무 부담 없이 편안히 즐기며 다녔다.

그런데 11월 3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사립대학교 사범대학 학생들이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국립대학에게 주어진 공립학교 우선발령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와버린 것이다. 국립 사범대학, 교육대학 학생들도 자동 발령이 아니라 공개경쟁 시험을 치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내장산에서 단풍을 즐기고 있었다.

자다가 봉창 맞은 게 아니라 놀고 있다가 봉창 맞았다. 졸업하면 바로 발령 난다는 거 하나 믿고 취업시즌도 그냥 패스했는데, 갑자기 한 달 뒤에 임용고시를 치러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험 안 치고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에 원서만 내면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사원 되어 자본의 배를 불리는 대신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박봉과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감수하고 교사의 길을 선택하려 했는데(당시 사회 분위기는 그랬다) 도리어 시험을 치라는 것이다.

그나마 교육부는 기득권 인정해 준다고 TO의 70%는 국립대학교 사범대 학생끼리 경쟁하도록 조치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기탱천했다. 처음 학생을 유치할 때 발령을 약속했으면서 이런 식으로 뒤집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방국립대 학생들의 분노가 대단했다. 당시 연세대, 고려대 갈 수 있었던 학생들이 우선 발령 약속을 믿고 지방 국립대에 진학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그 약속을 뒤집는다? 그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약속도 약속이지만 또 다른 음모론도 있었다. 음모론의 줄거리는 이랬다.


대부분의 운동권 학생들은 전공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대가 자동으로 발령을 받으니 국립대 운동권 학생들이 자동으로 교사로 진출한다. 국립사범대학이야 말로 전교조 교사 자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시험을 치도록 하자. 그럼 사범대 학생들을 엉뚱한 의식화 교육에 관심 갖지 못하고 시험 공부하느라 주류 교육학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1학년 때 부터 한 눈 안 팔고 계속 시험공부만 하다 보면 순종적이고 순진무구한 교사가 되어 체제에 봉사할 것이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실제로 임고 이전 세대 교사들 중에 “임고 이후 유입된 신규 교사들이 의식이 없다, 이기적이다” 이러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저 음모론이 꽤 잘 먹혔던 셈이다.

어쨌든 전국의 국립 사범대 학생회가 연합회, 일명 전사련을 결성하고 강력한 항의 투쟁을 하기로 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행동은 바로 임용시험을 거부하는 투쟁이었다.

나는 우리 과를 대표하여 동기생들에게 시험거부 결의 서명을 받았는데 의외로 4학년 학생 중 90% 정도가 시험거부에 동참했다. 우리뿐 아니라 지방 국립사범대학 4학년들도 다 같이 시험거부를 결의했다. 전국의 국립사범대 학생들이 상경투쟁 하면서 전원 사범대생으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시위대가 세종로 일대를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 뭔가 될 것 같았고, 임용고시가 철회될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헌법재판소를 거친 국가 프로세스를 거리에서 다수가 반대하면 멈출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했다.

당시 투쟁 지도부의 꿈은 이랬다. <임용고시 1회 응시율 20% 밑 돌아> 이런 뉴스가 나오는 것이다. 서울에는 국립사범대학이 서울대 밖에 없다. 따라서 서울대가 시험을 거부하면 서울지역 70%를 할당한 임용고시 국립대 경쟁 영역의 응시자가 0에 수렴할 것이고, 임용고시가 첫회부터 파행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러면 당장 서울지역 공립학교 교원 신규임용이 차질을 빚고, 그러면 언론이 관심을 가질 것이고 등등.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당연히 현실은 전혀 다르게 작동했다. 우리의 높은 시험 거부 결의는 엉뚱한 의미가 되어 전국에 퍼져나갔다. 바로 다음과 같은 말.

“올해는 서울대 학생들이 시험 안 친다고 하더라.”

그 결과는? 지방 국립대학에서 시험 거부를 결의했다 하더라도 10%, 20% 씩은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이탈한 사람들은 서울대학생이 응시하지 않는 서울지역에 대거 원서를 냈다. 서울에 진출할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그걸 왜 마다 하겠는가?

하하. 지금 생각하면 그 뻔한 결과를 예상 못한 우리는 죄다 헛똑똑이었다. 그때 우리가 시험거부한 빈 자리를 재빨리 채우면서 시험 파행은 고사하고 폭발적인 경쟁률을 만들어준 지방대 학우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1990년 12월에 치러진 첫번째 임용고시에 응시하여 합격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87학번에 대해서는 거의 감정이 아주 많다. 그들이 아무리 입으로 그럴듯한 말을 해도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어쨌든 그 결과는 미어 터지는 고사장을 속수무책으로 바라 본것, 그리고 공연히 교직 진출을 1년 늦춘 것뿐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KPOP 소설 별이 잠드는 바다 9. 지니라는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