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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1987년 여름 9화 권오석

by 권재원

오석은 초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혹시 아는 사람이 지나 가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다행히 낯 익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강의실까지 가는 벽이란 벽, 계단이란 계단은 온통 구호가 적힌 현수막과 지라시가 빽빽하게 붙어있어 발 디디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군사파쇼 타도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

-시험거부 투쟁으로 민주헌법 쟁취하자.

-2만 학우 시험거부 총단결투쟁!

-시험거부, 시험거부, 민주헌법, 민주헌법


가슴이 떨렸다. 심장이 뛰는 속도를 잰다면 160 rpm이 넘을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며 진정시켜 보려 해도 그럴수록 점점 증세가 더 심해졌다. 다리의 힘도 빠지고 후들거렸다. 강의실까지 가는 것은 고사하고 제 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었다.

“걱정 마.”

6월의 후덥지근한 날씨를 식혀버릴 것 같은 수현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들렸다. 그 서늘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걱정 안 할수가 없잖아. 친구들이.”

“걔들이 뭐? 걔들은 걔들이 믿는 대로 우린 우리가 믿는대로 행동하는 거야.”

“하지만, 전부 에프 맞을 때 우리만 에이 받을 수는 없잖아?”

“왜? 시험 거부 투쟁이 뭔데? 에프 학점 받는 것을 감수하고 나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 아니야? 에프 맞는 게 당연하고, 에프를 받아야 투쟁이지. 그리고 자기들이 그렇게 한다고 그럴 생각 없는 사람들까지 같이 에프 맞자고 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자기들이 물귀신이야?”

수현의 말은 논리적으로는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하지만 오석의 마음 속 걱정과 두려움은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오석이 여전히 맥없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난 친구들하고 약속했어. 비록 생각이 달라서 데모는 같이 못하겠지만 다른 일에는 함께 할 수 있다. 그래서 엠티도 같이 갔고.”

“그래서? 데모도 안 할 거면서 그 약속 때문에 너도 같이 시험을 안 치겠다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

“바보야. 그건 죽도 밥도 아니야.”

“왜?”

“지금 학생의 본분이 나가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데모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시험 거부하고 에프학점 받아도 명분이 있어. 하지만 넌? 네가 만약 시험 안 치고 에프 받으면? 가두에 나가 싸우지도 않으면서 에프만 받으면? 잃는 것은 학점이고 얻는 건 대체 뭐지?”

“약속.”

“그런다고 애들이 널 생각해 줄까? 네가 데모에 부정적인 이상 시험을 치든 안치든 어차피 따돌리게 되어 있어. 디누 마저 그러잖아? 모르겠니? 지금 이놈의 대학가는 미쳐 돌아가고 있어. 아흔 아홉 가지가 서로 일치해도 단 하나만 다르면 그냥 원수야.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척도만 가지고 평가하고 있다고. 그 외에는 모든 가치관이 죽어 버렸어.”

“하지만 난 진실은 회색지대에 있다고 믿어.”

“오석아.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회색지대 따위 없어. 아직 모르겠니? 전두환 보다 회색이 더 미움받는 세상이야. 회색이 될 바에는 차라리 반동이 되자. 그 편이 차라리 속 시원해.”

“하지만.”

“그만. 둘 중 하나 선택해. 시험 안 치고 데모하러 나갈래? 아니면 나하고 같이 들어가 시험 칠래? 그사이는 없어.”

“시험도 안치고 데모도 안 하면 안 될까?”

“너 왜 이러니 정말? 좋아. 다시 양자택일이야. 시험 치고 나하고 계속 만날래, 아니면 시험 안 치고 헤어질래?”

“수현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잖아?”

“그럼 증명해.”

수현이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순간 수현이 입고 있는 연두색 티셔츠가 코발트 색으로 보였다. 이대로라면 수현이 아주 가버릴 것 같았다.

“수현아. 가지 마.”

수현이 돌아섰다. 오석은 빠른 걸음으로 수현을 쫓아가 돌아선 수현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수현이 그 손을 매몰차게 쳐 내렸다.

“빨리 결정이나 해.”

“알았어. 들어가. 가서 시험 쳐.”

그제야 수현이 활짝 웃었다.

“어유. 이 고집쟁이. 어서 가자. 시험 늦겠다.”

오석이 수현의 손에 이끌려 고사장으로 들어서자 텅 빈 강의실에 교수 혼자 시험지를 들고 황당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왔나?”

“시험 치러 왔는데요?”

“알았네.”

교수가 무심한 표정으로 시험지를 건네 주었다. 어쩌면 교수가 아닐 수도 있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조교이거나 강사이거나 그럴 것이다.

오석은 시험지를 받아 의자에 앉으려다 다리가 떨려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앉은 다음에도 무릎이 덜덜 떨렸다. 손으로 한참 무릎을 누르고 숨을 가다듬고 나서야 간신히 떨림이 멈추었다.

“시험 잘 쳐.”

수현이 오석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 자기 자리로 갔다.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태연한 모습으로 시험지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리는 수현을 보며 오석도 시험지를 펼쳤다.

하지만 시험지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에 쥔 펜 역시 의미 없는 상하 운동만 계속 반복 할 뿐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빌어먹을 상대평가.

오석은 대학교 학점이 상대평가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점수와 관계없이 전체의 20%는 A, 30%는 B, 30%는 C, 20%는 D. 그러니 오석이 여기서 답안지에 학번과 이름만 쓰더라도 플러스냐 마이너스냐의 차이만 날 뿐 어쨌든 A라는 뜻이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낙제 할 때 받는 A.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과 동료들을 무슨 낯으로 다시 볼 수 있을까?

오석은 폭력적인 데모가 싫었고, 좌경 사상을 학습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과에서 외톨이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 시험지 한 장이 과 친구들과 사이에 다시 메울 수 없는 거대한 운하를 파게 될 것이다. 한 문제 한 문제를 풀 때마다 그 운하의 폭은 한 큐빅, 두 큐빅 넓어질 것이다.

결국 오석은 시험지에 학번과 이름, 그리고 아무 글씨나 되는대로 적었다.

그 되는 대로의 답안지를 교수에게 제출하고 강의실을 나와 시계를 보니 정확하게 5분 17초가 지났다.

5분 17초 짜리 A학점이라.

담배라도 배워 두었으면 하는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100원 짜리 음료수였다.

환타인지 미린다인지 모를 주황색의 차가운 음료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흔들리던 몸과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완전한 진정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15분 정도 더 지나 고사장에서 나오는 수현의 모습을 보고서야 오석은 그럭저럭 몸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수현의 표정은 밝고 시원해 보였다. 수현이 하얗고 윤기나는 얼굴 위에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다가왔다.

“시험 잘 쳤니? 공부 많이 했나봐?

“아니.”

오석은 고개를 저었다.

“5분만에 다 풀었잖아?”

“다 푼 거 아니야. 아무 거나 막 썼어.”

“어머, 왜?”

오석이 턱을 가슴 깊이 파묻으며 말려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시험 칠 마음이 안 생겼어. 학번이라도 제대로 썼는지 모르겠어. 그 따위로 내도 학점은 잘 나오겠지?”

수현이 오석의 오른 팔에 팔짱을 끼며 아무렇지 않다는듯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상대평가니까.”

오석의 고개가 숙여졌다.

“좋지 않아.”

그러자 수현이 팔짱을 끼지 않은 오른 손으로 숙인 오석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나도 안 좋긴 마찬가지야. 하지만 세상은 자기 소신대로 사는 거야. 에프 맞는 게 소신이면 에이 맞는 것도 소신이야. 이거나 저거나 다 자유의지로 선택할 권리가 있는것, 그게 민주주의잖아? 그것 가지고 뭐라고 비난하고 그런다면 그거야말로 파쇼 아닐까? 그렇게 타도하자고 떠들어대는 파쇼 말이야.”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자꾸 몸도 마음도 다 축축 처지는 건 어쩔 수 없어. 왜 그럴까?”

오석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지만 불편함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한사코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수현이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내려 오석의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끼워 잡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건 네가 다른 애들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야. 누구 탓도 아니고, 다만 네 선량함의 증거야. 자, 착한 오석아. 뭐 할까? 시험은 끝났고 시간은 남고? 뭐야? 10시 반이잖아?”

“모르겠어. 신나는 영화나 보면 좀 나을까?”

“그러지 말고 기차 타고 밖으로 좀 나가 볼까?”

“어디?”

“음, 춘천?”

“춘천?”

“그래. 그러자. 응? 그럼 기분이 훨씬 좋아 질 거야. 어서 가. 일 분 일 초가 아까워.”

“좋아. 가.”

오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외에 나가면 웬지 이 찜찜한 마음이 가벼워 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춘천에 어떻게 가지?’

혼란스럽던 오석의 머리가 이 질문 하나로 정리되었다. 과제가생긴 것이다. 오석은 되도록 복잡한 생각을 멈추고 이것 하나에 생각을 집중했다.

기차를 타거나 시외버스를 타는 선택지가 있다.

시외버스를 타려면 상봉터미널 까지 가야 하는데, 거기까지가 너무 멀다. 문제는 기차를 타려 해도 청량리 역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청량리 역까지 가는 길도 꽤나 복잡하다. 그래도 상봉 터미널 보다는 가깝다.

먼저 140번 버스를 타고 사당역 까지 간다. 거기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서울역까지 간다. 여기서 1호선으로 환승하여 청량리 역까지 간다. 차량 주행 시간만 50분, 여기에 환승시간 대기 시간을 보태면 한 시간 반을 훌쩍 넘는다. 차라리 청량리 역에서 춘천까지가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다.

더구나 기차는 차편도 훨씬 적다. 상봉에서 춘천 가는 버스는 거의 15분 마다 하나씩 있지만 청량리에서 춘천 가는 기차는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반에 하나씩이다. 시간대 잘못 걸리면 황량하고 지저분한 대합실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천만 다행으로 청량리 역에 도착했을 때 경춘선 열차 시간이 딱 맞아 떨어졌다. 오석은 10분 뒤에 출발하는 경춘선 열차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오석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 졌다. 이대로 교외까지 달리면 마음의 짐을 좀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언제나 돌발 변수가 발생하여 기대를 무너뜨렸다. 하필이면 열차가 회기역을 지날 때 근처에서 전경들과 치열한 육박전을 벌고 있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여기도 데모하네. 누굴까?”

“경희대, 외대, 시립대 학생들일거야.”

앞 자리에 앉은 커플이 수근거렸다.

오석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힘겹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교외로 데이트를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모두가 거부한 시험을 단 둘이 치르고, 싸움에서 유유히 빠져 나와 단 둘이서 가는 데이트다. 세상에서 단 둘.

하지만 오석의 양심은 망우역을 지나 전원 풍경이 펼쳐지자 잠들고 말았다. 호헌도, 직선제도, 최루탄도, 박종철도, 이한열도 없는 그저 한가한 녹색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창밖에서 느릿 느릿 지나갔다. 경부선 열차 절반도 안되는 속도로 달리는 낡은 경춘선 열차의 특권. 느릿느릿 흘러가는 전원 풍경.

대성리 역을 지나면서 한강이 창문에서 계속 흘렀다. 푸근하게 흘러가는 한강의 반짝거리는 모습이 재잘거리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 같았다. 춘천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물이 보였다. 모든 생물의 고향이 물이라 그런 것일까? 창문 가득 채워진 물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며 잠이 솔솔 쏟아졌다.

문득 대각선 쪽 좌석에 앉아있는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1학년은 아닌 것 같지만 3학년 이상으로 보이지도 않는 대학생 커플이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객실 안을 둘러 보니 그들 말고도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아베크 족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세어 보니 무려 다섯 쌍이었다.

그 중 얌전히 좌석에 앉아있는 커플은 오석네 뿐이었다. 한 커플은 남자가 여자 어깨를 깊숙하게 끌어 안고 있었고, 다른 커플은 아예 부둥켜안고 있었다. 서로의 귀를 만지작거리는 커플도 있었고, 아예 공공연하게 키스를 나누는 커플도 있었다.

열차 안의 세상과 밖의 세상. 한 세상에서는 감정과 쾌락에 충실한 청춘. 다른 세상에는 나름의 대의를 내걸고 처절하게 싸우는 청춘.

앞 좌석 커플이 또 가벼운 목소리로 킬킬 거렸다.

“데모 하는 애들이 너무 고마워.”

“뭐가?”

“방학 빨리 했잖아?”

“그러네. 방학도 빨리 하고, 시험도 대충 치고.”

그렇게 토막토막 흘러 나오는 대화를 듣던 오석은 배 깊은 곳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이렇게 생각하는 무리도 있을 줄 몰랐다.

갈갈이 찢어진 청춘. 찢어진 한 조각은 거리에서 최루탄과 곤봉에 맞서 괴롭게 싸운다. 다른 한 조각은 거기에 가담하지 않으면서 가책을 느낀다. 또 다른 한 조각은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아무 관심 없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물론 최루탄, 곤봉과 같은 편에 선 조각도 있을 것이다.

이 중 어느 조각이 올바르고, 어느 조각이 잘못된 것일까? 오석은 판가름할 수 없었다.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럴 때 유일한 심판관은 양심이다. 양심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오석은 이미 양심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그 결과 양심이 가리키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타고 말았다.

이때 손에서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수현이 손을 잡았다. 어깨를 누르는 부드러운 무게도 느껴졌다. 수현이 살포시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수현의 머리카락이 오석의 턱을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머리카락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오석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남은 한 손을 들어 어깨에 기댄 수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수현이 머리의 위치를 어깨에서 소흉근 위로 슬쩍 옮겼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뺨에 닿았다.

수현이 잡고 있던 오석의 손을 슬그머니 자신의 무릎 위로 옮겼다. 오석은 그 상태로 꼼짝도 못하고 가쁜 숨만 가다듬었다. 수현의 무릎 위에 올라 앉은 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잔뜩 부풀어 오른 상태에서 가평을 지나고 강촌을 지나고 남춘천을 지나 춘천역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한 시가 넘었다. 무겁던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현, 오직 수현만이 남았다.

춘천역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자 수현이 깊게 팔짱을 끼고 들어왔다. 오석의 삼두박근이 수현의 왼쪽 가슴을 감지하고 부르르 떨었다. 그 떨림은 즉시 아드레날린을 잔뜩 분비시켜 호흡과 맥박까지 어지럽혔다.

이 호흡과 맥박이 정상보다 조금 빠른 수준으로 안정되기까지는 1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오석이 어느 정도 안정될 무렵 수현이 명랑한 목소리를 던졌다.

“나오니까 좋지?”

“응.”

그들은 서로에게 파고들 기세로 칭칭 서로를 휘감고서 춘천에 오는 아베크 족들이 으레 들렀다 가기 마련인 공지천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10여분을 걸어가니 공지천 유원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현이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 말투로 말했다.

“배고파.”

“응. 나도. 점심때가 지났네.”

“닭갈비, 이런 건 좀 별로구, 저기 어때?”

수현이 손가락을 쭉 뻗어 가리키는 곳에 공지천을 바라볼 수 있는 커다란 유리창을 가진 레스토랑이 보였다.

입구에는 ‘에메랄드’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오석은 중학교때 남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던 음악 선생님이 비오는 날 춘천에 가서 우울과 낭만을 즐기곤 했다던 레스토랑 이름을 떠올렸다. 그 이름이 에머랄드였는지 이디오피아였는지 헷갈렸는데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두 이름 다 눈앞에 나타났다.

그들이 들어간 곳이 이디오피아인지 에머랄드인지 구별하기 어려웠지만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다. 어디로 들어가더라도 창 밖에 공지천과 의암호가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에 얼룩이 많아 그냥 그런 하천 유원지 정도 보여 조금 실망스러웠다. 오석은 왜 음악 선생님이 맑은 날이 아니라 비 오는 날에 찾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전망이 너무 좋아.”

그래도 수현은 즐거워했다.. 오석은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수현이가 즐겁다면 된 것이다.

일단 가짜로라도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정말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오석은 계속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메뉴판을 가리켰다.

“뭐 먹을래?”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네? 비후 까스.”

그럴 줄 알았다. 수현은 어딜 가나 비후 까스다. 그렇다면 오석 역시 관례가 되다시피한 메뉴 김치 볶음밥을 주문할 수 밖에.

음식 기다리는 동안 레스토랑 안을 슬쩍 둘러 보았다.

기차에서와 마찬가지로 젊은 커플들의 모습이 보였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커플, 부둥켜안고 아무 말도 아무 짓도 안하고 그저 눈을 감은 체 멀거니 앉아 있는 커플, 멍 때리는 모습으로 창 밖의 공지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로의 손 혹은 무릎을 어루만지고 있는 커플.

오석의 마음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레스토랑의 젊은이들은 누구이고, 거리의 젊은이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왜 여기에 이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나와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왜 여기에 이렇게 나와 있나?’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 떠올랐다.

‘나는 왜 이 싸움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이 싸움의 열매도 나누지 말아야 옳다. 만약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싸움에서 거리를 둔 사람은 대통령 선거에 불참해야 공정한 것이다. 군사 파쇼가 물러나고 자유로운 나라가 세워지더라도 그 자유를 만끽해서는 안되어야 공정한 것이다.

물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독립 운동가만의 해방이 아니고, 혁명가만의 자유가 아니었다. 언제나 과실은 방관하던 다수가 차지하고 싸움에 나선 소수는 희생자로 기록될 뿐이었다. 역사가 잔인하다는 생각, 자신이 지금 그 잔인함에 편승하고 있다는 생각에 오석은 김치볶음밥이 너무 매워 목이 막히고 말았다.

1987년 6월도 언젠가는 역사가 될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땡볕 아래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싸우고 있는 1987년 6월. 성공하면 자랑스런 역사, 실패하면 가슴아픈 역사.

민주적이고 살 맛 나는 나라가 만들어진다면? 그 과실을 누가 어떻게 나눠 가질까? 이 레스토랑 안에서 뒹굴고 있던 젊은이나, 길거리에서 최루탄에 눈물짓고 곤봉에 얻어맞아 멍들고 피흘리던 젊은이나 골고루 나누어 가질 것이다.

하지만 과실의 가장 큰 몫을 챙길 젊은이들은 따로 있을 것이다. 남들 싸우고 있을 때 외국어 학원, 컴퓨터 학원 다녀가면서 충실하게 몸값을 가꾼 젊은이들. 틀림없이 그들이 가장 많은 몫을 챙길 것이다.

“왜? 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수현이 오석의 마음이 복잡해진 것을 눈치 챘다.

“아니. 그건 아니야.”

“너, 아직도 좀 찔리나 보구나?”

“솔직히 말하면 그래.”

“너 5분만에 제출하고 나왔잖아?”

“이름만 썼어.”

“그럼, 넌 너 나름대로 할 일 다 한 거야. 학점 더 받자고 시험치러 간 건 아니었잖아? 소신 가지고 선택했고, 그 소신을 백지 답안지로 표현 한거야. 아니야?”

“맞아. “

“그러니까 마음 풀어.”

수현의 목소리가 뺨에 얹히는 손바닥의 감촉과 함께 들렸다. 오석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수현의 얼굴에서 짙은 눈썹에 눈길이 갔다. 마치 호랑이 줄무늬 같았다. 벵갈 호랑이가 아니라 시베리아 호랑이.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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