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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1987년 여름 8화 김명호

by 권재원

명호는 한 자리에 사람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모습을 처음 봤다. 고향 무진장 지역 20대 청년들을 다 긁어 모아도 이 정도가 안 될 것 같았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계단은 물론, 콘크리트 바닥, 계단 사이 잔디밭까지 학생들로 가득 찼다. 더구나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계속 더 밀려오고 있었다. 도서관 앞 통로, 문화관으로 이어지는 길, 그 사이 잔디밭, 학생회관 옆 통로와 계단까지 학생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피를 토할 것 같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울렸다.

“오늘은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대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또 민정당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국민이 투표 하지도 못하는 선거에 무슨 대통령 후보란 말입니까? 체육관에서 뽑는 대통령 후보를 체육관에서 추대하는데, 이게 무슨 민주주의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광주를 피로 물들인 살인마들끼리 권력 승계식입니다. 저들이 피묻은 승계식을 하는 동안 저들의 하수인들이 쏜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 학우는 생사의 경계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들은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대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원천 봉쇄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합법이고, 무엇이 불법입니까? 국민이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것이 합법이고, 그 요구를 원천 봉쇄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관악의 2만 학우 여러분. 우리의 힘찬 투쟁만이 불법이 합법을 가장하고, 합법이 불법으로 탄압받는 이 세상을 바로잡습니다. 지금 우리는 저 군부독재의 피의 승계식을 원천봉쇄하고, 우리의 정당한 요구에 재갈을 물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저 폭력 경찰들을 진압합시다.”

그 이름. 이한열.

명호는 어제 저녁 텔레비젼에서 그 이름과 사진을 보았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교과서에서만 봤던 4.19가 떠올랐다. 부정선거에 대해 항의하던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김주열의 처참한 시신이 떠올랐다. 자유당과 민정당, 이승만과 전두환, 김주열과 이한열, 그리고 4.19와 6.10, 1960년과 1987년.

뉴스에서는 아주 간단히 처리되었다. 산발적인 시위 도중 학생이 쓰러져 병원에 있다. 이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미 죽음의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뉴스와 동시에 달력을 보았다.

6월 9일.

이렇게 대학생으로 보내는 첫 학기가 벌써 끝을 보이고 있었다. 총학생회에서는 동맹휴업을 결의했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강의는 과제제출 기간, 기말고사 준비기간 등의 명목으로 사실상 종강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호는 국민학교 입학한 1975년 부터 12년을 오직 서울대학에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모르고 살았다. 서울대 경제학과 다니는 연철이네 형은 명호의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가겠노라 책상 머리에 써 놓고 공부했다.

학력고사에서 경제학과 합격이 불가능한 점수표를 받아들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서울대에 들어오긴 들어왔다. 합격선에 맞춰 원서를 쓰다 보니 어찌어찌 하다 역사교육과에 들어오게 되었다. 역사는 좋아했지만 교육은 생각 없었다. 그리고 역사학자가 될 생각도 교사가 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인생의 목표가 마무리 된 느낌이었다. 대학 4년 잘 다녀 졸업하고 괜찮은 회사에 취직하면 평생 고생만 하고 산 어머니 아버지 호강시켜 드리고 대학 못간 것이 한이 된 누나도 도와주고, 조카 공부도 시키고 등등.

그런데 이게 그렇게 긴 시간 꿈꿔왔던 서울 대학에서 보낸 첫 학기라고? 이렇게 첫 학기가 끝난다고? 이게? 고등학교 3년 내내 일종의 신탁이나 다름없었던 대학 생활이라고?

“서울 대학만 들어가면.”

이 한마디로 원하는 것들을 모두 유예하며 살아왔다. 청춘도, 교양도, 사랑도, 그 밖에 이런 저런 것들을.

“서울 대학에 들어가려면.”

이 한마디로 모든 것들을 정당화 했다. 학대에 가까운 강제야간학습, 보충수업, 그리고 교육을 빙자하여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까지.

서울 대학만 들어가면 고생 끝 행복 시작, 인생의 찬란한 페이지가 열릴 줄 알았다. 그랬는데 그 첫 학기가 이렇게 죽음으로 시작되어 죽음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박종철과 함께 입학했고 이한열과 함께 첫학기가 마무리되었다.

명호는 80년 광주에서 다친 삼촌이 다시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 자랑스런 민주의 투사

이 노래도 여전히 귀벌레처럼 계속 들렸다.

민주의 투사. 함부로 입에 담을 길이 아니었다. 단지 취직 못하고 신세 어려워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인 것이다.

죽을 수도 있는 길.

명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 쉽게 봤다. 청년 학생의 의협심으로 공부도 하고 데모도 하고, 그렇게 두루두루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단이 필요한 길이었다.

명호의 마음이 둘로 갈라졌다. 갈라진 반쪽이 다른 반쪽에게 다그쳐 물었다.

“너, 죽을수도 있다는 거 알아? 그 두려움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 적당히 양심에 꺼리끼지 않을 정도로 싸우고, 나머지 시간에는 공부 열심히 해서 취직 잘 하고, 이따위 생각 하는 거 아니지? 그렇다면 그거 너무 안이하고 소박한 것 아닌가?”

다른 반쪽이 대답을 구하기 위해 고민했다. 이렇게 마음이 둘로 갈라져 묻고 고민하다보니 연사가 떠드는 소리는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새 연설이 끝나고 마이크가 사회자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사회자가 외쳤다.

“학우 여러분. 다 같이 외쳐 봅시다. 민주헌법 쟁취하고, 군부독재 타도하자!”

수천명, 아니 수만명은 될 것 같은 학생들이 일제히 따라 외쳤다.

“민주헌법 쟁취하고, 군부독재 타도하자. 타도하자, 타도하자.”

순간 둘로 갈라졌던 명호의 마음이 다시 하나가 되었다. 재결합의 충격으로 속에서 뭔가 울컥하는 덩어리가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모습, 자신이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된 모습에는 웬지 모를 장엄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명호는 거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보탬으로써 자신이 지금보다 수천배 거대해진 거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거대한 느낌에는 청춘의 한 페이지가 지워지고 있다는 슬픔을 지워버리는 강력한 쾌감이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뿌듯함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을 받고 하늘을 둥둥 떠 오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자꾸 집회, 시위, 어른들 말로 데모에 자꾸 따라나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찾느라 애 먹었다. 사람 겁나 많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연철이다.

“그래. 오느라 애썼다. 이리 앉아.”

“앉기는 무슨. 일어나. 가자.”

연철이 명호의 팔을 툭툭 치며 대학 본부 잔디밭 쪽을 가리켰다. 좌석버스 51번, 52번 종점이 있는 곳이다.

“가다니? 어딜?”

“버스 타러.”

“집회가 한창인데, 무슨 버스를 타?”

“다 뻔한 얘기잖아? 때려잡자 전두환, 무찌르자 민정당 이러면서 핏대 올리다 분위기 좀 올라갔다 싶으면 가두 투쟁 가자고 결의하고. 그럼 이 많은 학우들이 한꺼번에 명동 아니면 종로 쪽으로 몰려갈텐데, 그 줄을 어쩔건데? 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51번 52번 타겠다고 몰려가는 거 한 번 상상해 봐라.”

“그래도 몇 마디는 듣고 가야 예의 아니겠냐? 총학생회장도 아직 안 나왔는데?”

“예의도 좋지만 만원버스에 시달리다가 싸우러 가기도 전에 미리 지쳐버리는 건 더 싫다. 가자고. 힘은 여기 말고 시내 가서 싸우는데 쓰자.”

연철이 아예 명호의 팔을 잡고 끌어냈다. 물론 빼빼 마른 연철이 아무리 힘껏 끌어 봐야 단단한 근육질의 명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철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명호는 마침내 몸에 힘을 빼고 끌려가 주었다. 어차피 이 집회는 동맹휴업 결의하고 모인 학생들에게 기왕 동맹휴업 결의했으니 이제 시내에 나가 싸우자고 호소 혹은 선동하려고 열린 것이다. 이미 싸울 마음이 있는 명호에게는 의미없는 절차인 셈이다.

“알았다. 알았어. 가자. 가.”

명호는 연철을 따라 아크로 광장을 떠나 대학 본부 잔디밭 너머에 있는 좌석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100원짜리 일반 버스 95번 탈 것을 400원 내고 좌석버스를 타자고 드니 주머니가 쓰라리지만 오늘따라 정문까지 20분 걸어가는 게 너무 귀찮고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만 잔머리 굴린 것이 아니었다. 이미 좌석버스 승강장에는 평소보다 훨씬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먼저 싸우러 가는 학우들이 이렇게 많아?”

명호가 말하자 연철이 뭐 이런 순진한 놈을 다 봤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지. 어차피 수업도 안한다니 데모 시작하기 전에 빨리 집으로 내 빼는 학생들이 많은 거야.”

“에이. 설마.”

명호는 연철의 말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기 바랬다.

연철은 늘 그랬다. 얄미울 정도로 맞는 말만 했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관점이라나 뭐라나. 좋은 녀석이긴 하지만 때로는 정이 안가는 녀석이다.

마침내 기다리던 51번 좌석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가 문을 열자 긴 줄을 이룬 학생들이 일제히 버스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떠 밀리다시피 버스 안으로 들어선 명호와 연철은 안타깝게도 수석 2등급이 되고 말았다. 그들 바로 앞에서 좌석이 꽉 차버린 것이다.

“내려서 다음 차 탈까?”

먼저 나오자고 졸랐던 연철의 얼굴이며 말투가 민망함 그 자체가 되었다.

“됐어. 그냥 서서 가자. 벌써 돈 냈잖아?”

“아, 그렇구나. 좌석 버스를 입석으로 가게 생겼네.”

“그래도 낑겨 가지는 않고 안 기다라고 바로 탔잖아?”

명호가 나름 위로의 말을 던졌다. 솔직히 돈을 세배나 내고 좌석 버스를 입석으로 타고 가는 건 바보짓이긴 하지만 언제 봉쇄될 지 모르는 집회에 최대한 빨리 가려는 것은 절대 바보짓이 아니다. 입석으로라도 가야 했다.

그래도 혹시 빈 좌석이 하나라도 있을까 싶어 버스 안을 둘러보는데 낯 익은 얼굴이 보였다. 윤리과 성진이다. 성진 옆에 앉아있는 학생 역시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었다.

명호는 알 듯 모를 듯한 그 얼굴이 누군지 궁금했다. 성진과 같이 있으니 윤리과 녀석이지 싶다.

연철을 툭툭치며 물어보았다.

“저기 앉아 있는 녀석 너희 과 진이 아니냐?”

연철의 얼굴이 활짝 열렸다.

“잘 됐다. 가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겠다. 어이. 성진!”

연철이 손짓을 하며 진이 앉아 있는 쪽으로 갔다. 명호도 당연히 그쪽으로 이동했다.

“아, 너희도?”

진이 손을 들어 보인다.

“다들 열심히 집회하고 있는데 좀 편하게 가겠다고 먼저 나와서 이렇게 앉아 간다 이거지? 치사하다 야.”

명호는 연철이 하는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진담이라면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연철 역시 먼저 가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집회 도중에 나온 건 마찬가지 아닌가? 농담이라면? 그렇다면 놀라 자빠질 일이다. 세상에나. 저 박연철이 농담을 다 하다니.

진이 웃었다. 농담으로 접수한 모양이다. 명호는 코가 큰성진이 그렇게 웃는 모습이 마치 양떼에게 신호를 보내는 보더 콜리 같다는 생각에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명호는 진 옆에 앉아있는 학생이 궁금해서 머리 속이 가려울 지경이 되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누구인지는 확 생각이 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연철이 가르쳐 줄 줄 알았는데, 분위기를 보아 하니 연철 역시 둘 중 성진하고만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결국 명호는 진에게 직접 물어 보고야 말았다.

”저기, 진아. 너랑 같이 있는 학형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러자 진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어딘지 모를 자랑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소개할 게. 내 친구 권정우야.”

권정우? 명호는 그 이름을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누군지는 딱 부러지는 답이 안 떠올라 더 답답해졌다.

그때 연철이 평소보다 세 음정 높은 목소리를 내질렀다. 목소리 톤이 거의 안 변하는 연철이 세 음정이나 올려 말한다면 이건 경악을 의미했다.

“아, 그렇다면 피아니스트 디누?”

“맞아.”

아 그렇구나. 명호도 그제야 눈 앞의 저 낯 익은 학생이 누군지 생각났다. 클래식 음악이라고는 1년에 10분도 안 듣는 명호같은 문외한도 아는 이름. 신문에서 뉴스에서 얼마나 자주 봤던가? 피아니스트 권정우, 예명 디누.

“안녕?”

그 디누가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이럴 수가. 손가락이 의외로 짧았다. 대신 마디가 아주 굵고 단단해 보였다.

연철이 그 손을 덥석 잡았다.

“반가워. 윤리교육과 박연철이야. 저번에 그 음악회 정말 좋았어. 클래식이 그렇게 혁명적일수 있는지 몰랐어.”

그 음악회라면 명호도 기억하고 있었다. 진이 학교 문화관 대강당에서 음악회 한다며 도와달라고 할 때 과에 홍보하고 하는 일은 도와주었지만 막상 명호 본인은 가지 않았다. 클래식의 클자만 들어도 머리 아프다며 연철만 보냈다.

그런데 혁명적이라고? 클래식이 혁명적이라니 호기심이 확 올라오지만 어쩌겠나?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그때 같이 갈걸 그랬다.

그러는 동안 연철이 성진과 자기들끼리 뭔가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갑자기 연철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너는 답을 알고 있어?”

그러자 진이 그 큰 코를 흔들며 웃었다.

“하하하. 이 도가니 같은 시국에 답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그런 걸 덥석 덥석 알 수 있으면 인류 역사가 그렇게 복잡하고 굴곡지고 그랬겠냐? 단, 앞으로 전망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본 건 있어. 그냥 내 생각이야. 답은 절대 아니고.”

“뭔데?”

“지금 이 싸움은 세상을 바로잡지 못해. 아니, 그 어떤 세상도 싸움으로 바로잡을 수는 없어.”

뭐라고? 바로잡을 수 없다고? 그 한 마디가 망치처럼 명호의 머리를 때렸다.

‘뭐야 이녀석? 지금 한창 싸우러 가는데, 그것도 잔뜩 긴장하고 쫄아서 가고 있는데 싸움으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니, 싸우기도 전에 이런 황당한 말이 어디 있어?‘

명호가 성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금 싸우러 가는 사람 앞에 두고 뭔 김빠지는 소리냐?”

“김 빠져도 할 수 없어. 현실은 냉정하니까.”

“김 뺀 사람이 알아듣게 설명해.”

“좋아. 넌 민주헌법이 뭐라고 생각해?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뽑으면 그게 민주헌법?”

진이 이렇게 묻자 명호가 교과서 읽듯 대답했다.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고, 그것을 국가의 목적으로 삼고, 권력이 국민에게 있고, 또 분산되고, 그런게 민주헌법 아니겠냐?”

“맞아. 대통령 선거는 민주 헌법의 부분에 불과해. 하지만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정치꾼들이 그대로 버티고 있는 국회가 민주헌법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연철이 대답했다.

“국회부터 갈아 치워야지.”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소위 CA의 주장이야. 헌법 만드는 기관부터 새로 만들자. 제헌의회라. 뭐 그럴듯하게 들려. 그런데 말이지, 이 주장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까? 선택지 두개를 댈 테니 골라 봐. 1. 대통령 직선제 실시하자. 2. 민주헌법 만들 국회를 새로 소집하자. 이 중 어느 쪽이 끌려?”

“확실히 직선제 쪽이 더 와 닿아.”

“그렇지? 이게 현실이야.”

“그럼 진이 너 말대로라면 도대체 오늘은 뭐 하러 싸우러 가냐? 아무 의미가 없지 않냐?”

맥이 쭉 빠진 명호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마디 던졌다. 그러자 진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이나마 어제보다는 더 좋은 세상이 될테니까. 내일에 내일의 내일에 내일의 내일의 내일에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단 오늘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다할 뿐이야. 내일의 내일의 내일의 내일의 내일에 대한 전망을 잊어버리지 않으며 말이지. 내 꿈은 작은 승리의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서 언젠가 장엄한 개선문을 이루는 것이지, 이미 만들어진 개선문이 짜잔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야. 그런데 NL은 설계도도 없이 돌만 잔뜩 모으고 있고, CA는 돌 찾을 생각은 안하고 설계도만 흔들어.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쓸 돌을 모으는 거야.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는 NL의 무작정 싸우자 전술이 타당 할 수도 있단 말이지.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 NL이 운동을 주도한다면 학생운동은 단말마 소리 낼 틈도 없이 죽어버릴 거야. 진짜 변화는 맛, 아니 냄새도 못 맡고서.”

명호는 무슨 말을 듣는지 그저 알쏭달쏭 했다.

“와우!”

그런데 갑자기 감탄사가 들렸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정우였다. 명호는 저 녀석 외국을 많이 나다니며 활동하다 보니 감탄사도 영어로 하는가 보다 하며 조금 고깝게 바라보았다.

정우가 감탄사에 이어 영탄조의 말을 덧붙였다.

“나 말이야 이렇게 너희들 말하는 것 듣다 멋진 생각이 떠올랐어. 혁명 사중주랄까? 진이는 철학자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초를 다지지. 그래서 첼로를 줄 거야. 연철이가 전략을 짜고 방향을 잡지. 그래서 비올라를 주겠어. 명호는 투사야. 앞에 나서서 싸우는 거지. 그래서 퍼스트 바이올린을 주겠어. 나는 그것을 멋지게 꾸미고 마무리 해. 그래서 세컨 바이올린을 맡겠어. 어때? 그럴듯하지 않냐?”

명호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뭔가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 박수를 쳤다.

진이 장난기 담은 얼굴로 말했다.

“뭐냐? 이 분위기는? 무슨 도원결의라도 하는 거야?”

“아이고, 그건 좀 참아줘라. 닭살 돋는다.”

연철이 손을 내저었다.

“그건 좀 그런가? 하하.”

진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웃었다. 재미있거나 우스워서 짓는 웃음이 아니다. 그냥 멋적게 웃는 그런 웃음이다.

“야야, 관둬 닭살 돋는다.”

연철은 손 사래를 쳤지만

“왜 난 그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명호가 오히려 진지했다.

“유치하게 무슨 삼국지 흉내야?”

“유치하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유치해지는 것도 스무살의 특권 아니겠냐? 이 때가 아니면 언제 유치해 볼 수 있겠냐?”

명호와 연철의 티키타카를 보던 성진도 나섰다.

“유비, 관우, 장비도 20대 젊은 시절이 아니었으면 도원결의 같은 거 아마 안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서른 넘어 만났거나 했다면?”

“그래도 난 안해.”

이런 식의 유치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입석으로 좌석버스 타고 가는 시간이 많이 짧아졌다. 어느새 51번 좌석 버스가 남산 1호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터널을 빠져나오자 마자 버스가 멈춰 섰다.

“뭐야? 막히는 거야?”

버스 안의 분위기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차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바깥 사정을 살피던 정우 입에서 엄청난 욕설이 튀어나왔다. 클래식 음악가는 고상해서 자기 같은 촌놈하고는 아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명호의 선입견이 단 번에 와르르 무너져 버릴 정도의 욕설이었다.

“무슨 일인데?”

“짭새야.”

“짭새가 뭐?”

“길 차단하고 버스 못 가게 막았어.”

“야, 이거.”

워크맨으로 라디오를 듣던 진이 혀를 찼다.

“뭔 소식 있어?”

“시내로 진입하는 차량은 모두 회차 시키고, 지하철은 시내 구간 무정차 통과한다는데?”

“징한 놈들이군.”

“어떻게 할까?”

“여기서 내려야지. 조금 걸어가면 명동인데 뭐.”

“그럼 뭘 기다려? 얼른 내리자.”

버스 기사도 이 학생들을 태우고 되돌아 갈 마음이 없는 모양, 하차문 열리는 버저 소리가 삐이 하고 들렸다.

그러나 하나 뿐인 문으로 한 명씩 한 명씩 내리다 보니 버스를 가득 채운 60명 정도의 학생들이 다 내리자면 삼십분은 족히 걸릴 판이었다.

명호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 성질 급한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버스 밖으로 하나 둘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출입문은 여학생에게 양보하고 남학생들은 그냥 뛰어내리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명호도 앞 뒤 잴 것 없이 열린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연철도 할 수 없다는 듯이 하는 수 없이 몸을 버스 창문에 끼우고 엉거주춤하게 빠져나왔다.

“너희는?”

연철이 창밖으로 자신들을 빤히 보고 있는 진에게 물었다. 진이 목을 세우고 턱을 쓱 내밀었다.

“난 문으로 내릴 거다. 어차피 오늘 엄청 오래 싸울 것 같은데 미리부터 힘 빼기 싫다.”

“좋아. 살아남으면 열린글방에 메모 남겨라. 자, 명호야 가자.”

연철이 그들에게 손을 흔들더니 명호를 잡아 끌었다.

얼른 싸우고 싶은 명호는 오히려 연철을 앞질러 도심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에서 나와 주변을 보니 주변이 차량으로 엉켜서 엉망진창이었다. 터널에서 나오는 차 회차하는 차가 엉켜 꼼짝을 못하고 있었고, 터널 안까지 차들이 늘어섰다.

그렇게 서 있는 버스들에서 학생들이 출입문과 창문을 통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터널 안에서도 학생들이 뛰쳐나왔는지 행렬을 이룬 학생들이 몰려나왔다.

이렇게 만들어진 학생들의 물결이 명동쪽으로 흘러내렸다.

마치 큰 비 내려 불어난 계곡물처럼. 명호는 그 흐름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전경들이 당황했는지 대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버스 회차 시킬 정도의 병력만 배치되어 있었지 대규모 시위를 막을 수준의 병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이들의 엉성한 방어선을 단숨에 뚫고 명동을 향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선창과 복창의 구별은 사라진지 오래. 순식간에 모든 학생들이 외침이 남산자락을 따라 명동을 향해 울려 퍼졌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명호는 대열을 따라 구호를 외치며 신세계 백화점 앞을 지나 행진했다. 미도파 백화점과 롯데 백화점이 눈 앞에 나타났다.

왕복 10차로의 큰 길에 분수대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시내에서 가까운 학교 학생들이 먼저 와서 모여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에 한강 남쪽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합류하니 그 큰 도로가 순식간에 학생들로 가득 차 버렸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다시 박수소리와 함께 구호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그 박자에 맞춰 거리를 메운 학생들의 물결이 원래 예정된 집회 장소인 서울고등학교 터로 가기 위해 세종로, 태평로 방향으로 움직였다.

구호 박자가 점점 빨라졌다. 걷는 박자가 아니라 뛰는 박자다. 학생들이 달렸다. 명호도 달렸다. 전경들도 달렸다.

구두소리 요란하게 찍으며 달려온 전경들이 빠르게 방패진을 치더니 최루탄을 쏘아댔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거리가 시위대로 가득하고 뒤에서도 계속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연기를 피해 도망 칠 곳이 없었다. 명호는 꼼짝없이 매운 가스를 들이키며 콜록거리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명호는 꼭지가 돌았다. 최루탄은 시위대를 해산시키자고 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거리가 시위대로 꽉 차 흩어질 공간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쏘아대는 최루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죽이거나 괴롭히려고 쏘는 것이다.

이래서 어제 이한열이 쓰러졌구나.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각에 맵다는 느낌도 숨막힌다는 느낌도 다 날려버렸다. 남은 것은 오직 분노였다.

명호는 본능적으로 보도블럭을 찾았다. 이미 학생은 물론 거리에 있던 시민들까지 인도의 보도블럭을 깨고 있었다.

깨어진 보도블럭이 주먹 만한 돌 조각들로 흩어졌다.

무기가 완성되었다.

명호가 깨진 보도 블럭 조각을 집어 들고 전경들을 향해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힘 하나는 자신 있는 몸이다. 명호가 던진 돌은 연철이나 다른 학생들이 던진 돌보다 10미터 이상 멀리 날아가 전경들 방패진 한 가운데 묵직하게 떨어졌다.

명호가 던진 돌 조각이 효시라도 된 것처럼 학생들이 집어 던진 돌들이 소나기처럼 전경들에게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전경들이 방패를 뒤집어쓰고 움찔 움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방패진 뒷열에서 총기를 든 전경들이 뛰어나와 최루탄을 마구 쏘아대고 사과탄을 미친듯이 굴려 댔다.

마침내 지랄탄 차량까지 등장했다.

명호가 경악했다. 수천명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여기에 지랄탄을 쏘면 어쩌자는 건가? 서로 밟아 죽이기라도 하라는 것일까?

하지만 경찰은 아무래도 좋은 모양, 기어코 지랄탄을 쏘아 대고 말았다.

순식간에 수천명의 시위대가 지랄탄 연기에 갇혀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그 독가스 안개 사이로 방독면을 쓴 백골단이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백골단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곤봉으로 때려 눕혔다. 쓰러진 학생들은 허리춤이나 목덜미를 붙잡힌 채 닭장차로 끌려 갔다. 끌려가는 학생들에게 백골단의 발길질이 쏟아졌다.

1980년 5월. 삼촌이 계엄군에게 폭행당하고 불구의 몸이 된 그날. 말로만 듣던 그날이 이렇게 명호의 눈 앞에서 날짜만 1987년 6월 10일로 바꾸어 생생하게 펼쳐치고 있었다.

이때 어디에서 어떻게 가져왔는지 몇몇 학생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백골단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백골단이 끌고가던 학생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1987년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마치 1487년 한양으로 타임 슬립을 한 것 같았다.

철봉을 휘두르는 반란군과 곤봉과 방패로 무장한 관군의 전투라니.

명호도 부지런히 돌을 던지며 철봉 부대를 지원했다.

“야, 야, 저기 좀 봐!”

한참 투석전을 벌이고 있는 명호를 연철이 툭툭 쳤다.

“왜?”

“저기, 저기!”

“오메!”

연철이가 가리키는 곳을 본 명호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연철의 손가락과 명호의 눈이 마주치는 지점에 정우가 가 보였다.

피아노가 아닌 쇠파이프를 들고 있는 디누. 들고 있기만 한 게 아니라 마구 휘두르며 전경들과 치고 받고 싸우고 있는 디누.

싸우는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쇠파이프를 리드미컬하게 휘두르는데 그 때 마다 백골단이 하나 둘 쓰러졌다.

쓰러진 백골단은 즉시 학생들이 달려들어 방독면을 벗겨 버렸다. 그들이 쏜 최루탄을 느껴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들처럼 달려들어 집단 구타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저 친구, 정말 피아니스트 맞아?”

연철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게 말이다. 내 눈에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무슨 조폭두목…”

“에이, 비유를 해도 조폭이 뭐냐?”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도 질 수 없지.”

“그렇지?”

명호도 더 힘을 내서 돌을 집어 던졌다. 그들 말고도 정우 모습을 알아본 학생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박수와 환성소리가 들리며 그쪽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전경들도 몰렸다.

하지만 학생들이 훨씬 더 많이 몰렸기 때문에 전경들의 기세가 슬슬 약해졌다. 명호는 아이돌 효과가 이런 식으로 발휘될 줄은 몰랐다.

그러는 동안에도 어디서 밀려오는지 학생들이 계속 가두로 밀려왔다. 엄청난 숫자로 불어난 학생들을 감당하지 못한 전경들이 오히려 사람의 바다에 고립된 무인도가 되어버렸다.

마침내 종로에서 신세계 앞까지의 거리가 온통 학생들로 가득 차 버렸다. 지하철 역을 틀어막고 있던 경찰들이 역에서 밀려나오는 군중에 밀려 나가 떨어지고, 역 출입구가 마치 간헐천 처럼 학생들을 토해냈다.

거대한 시위대가 외치는 거대한 함성 소리가 빌딩에 반사되어 삼중 사중의 메아리를 치며 도시에 퍼져 나갔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해방구다. 해방구가 열렸다.

그런데 해방구라는 말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명호는 광주 5.18 비디오가 떠올랐다.

하필 왜? 이 순간에 그날 그곳이?

며칠간의 해방구, 명호는 그 평화롭던 도청앞 광장의 집회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경찰이 무너지면서 서울 도심이 해방구가 된 상황이 진압군이 철수하고 광주가 해방구가 된 상황과 비슷해 보였다. 그렇다면 설마? 저 놈들이 군대를?

“우리 정말 괜찮을까?”

명호 입이 마치 불수의근처럼 이 말을 내 뱉았다. 순간 부끄러웠지만 다시 담을 수 없는 말. 다행히 연철이 그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구호소리, 함성소리, 노래소리에 파묻혔을 것이다.

시위대가 노래를 불렀다.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 (딸), 자랑스런 민주의 투사.”

맙소사. 또 이 노래다. 명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하필 이 노래를 부르다니. 어머니, 그리고 아들.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할 아들은 가두에서 경찰들하고 돌 집어던지며 싸우는 아들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소중하고 고결해도 그런 아들은 그러다 감옥소라도 가면 신세 망치는 것 아니냐며 걱정거리나 하나 가득 안겨 줄 그런 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명호는 그런 자리에 와서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쳤다.

하필 이 때 전경들이 다시 몰려왔다. 증원부대가 온 모양이었다. 아까 밀려 나간 건 시위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잠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오히려 명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아직 경찰은 여력이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군대가 총 들고 오지는 않을 모양이다.

하지만 상황이 결코 다행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전경들이 아까보다 훨씬 많은 지랄탄을 쏘아대며 그 자욱한 안개 사이로 돌격했다.

시위 대열이 뭉개지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질서, 질서.”

누군가가 이렇게 외쳐대었지만 허망한 소리였다.

지랄탄과 백골단 앞에서 도망 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질서를 지켜가며 도망가자니? 그래도 한꺼번에 많은 군중이 엉켜 누군가가 넘어지거나 짓밟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질서가 생겼던 것이다.

오히려 무질서는 경찰들의 몫이었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백골단이 뛰어들어와 무차별적으로 학생들의 뒷덜미를 잡아채더니 질질 끌고갔다. 어느새 명호도 장갑낀 손이 자기 벨트를 붙잡는 꼴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명호는 순순히 끌려갈 마음이 없었다. 그 손이 벨트를 꾹 움켜쥐는 순간 몸을 뒤로 훽 돌렸다. 방독면 쓴 얼굴이 바로 앞에 보였다.

그 놈이 한 손에는 벨트, 다른 손에는 진압봉을 들고 있어 동작이 자유롭지 못한 순간을 노려 명호는 방독면을 잡고 확 벗겨버렸다. 순식간에 그 놈도 명호와 같은 최루탄 연기에 노출되었다. 명호는 어느 정도 적응되었지만 방독면 안에서 갑자기 최루 가스 가득한 공기에 노출된 백골단은 순간적으로 눈을 뜨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 틈에 명호는 있는 힘껏 그 놈을 뿌리치고 달렸다.

빌딩 안에서 내려다보며 박수를 치던 회사원들이 어느새 인도까지 내려와 있었다. 인도를 하얗게 메운 회사원들이 백골단을 향해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자 성난 백골단이 그들에게도 신경질적으로 최루탄을 마구 갈겨 댔다.

폭발음이 몇 번 나자 회사원들이 흩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가두로 뛰어들어 시위대에 동참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인도를 가득 메우고 있던 하얀 물결이 썰물처럼 쑥 줄어들고 그 하얀 물결을 빨아들이듯이 받아들인 넓은 차도가 학생들의 이런 저런 색깔의 티셔츠와 회사원들의 하얀 와이셔츠로 반짝였다. 마치 대형 카드섹션이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큰 길은 물론 골목길까지 온통 시위대로 가득 찼다. 시위대의 선두와 후미를 도무지 구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위대의 행진 방향이 어딘지도 의미 없게 되었다.

이때 명호의 눈에 어느 전경이 흘리고 도망간 진압봉 하나가 들어왔다. 얼른 집어 들었다. 명호는 아까 그 놈 방독면 벗기고 뿌리친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번에 또 자기 몸에 손 대는 백골단이 있으면 그놈의 백골을 깨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 소리가 다시 거대한 합창이 되어 거리를 메웠다.

백골단을 향해 수백명, 수천명의 학생들이 집어던지는 분노의 보도 블럭 조각이 6월의 뜨거운 태양을 가리며 화살처럼 새까맣게 하늘을 덮었다.

전경들은 방패를 들어 돌을 막아 보았지만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들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전경들의 방패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명호는 갑자기 두려움이 아니라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손목 시계가 없으니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뉘엇뉘엇 내려가고 있었다. 햇살 쨍쨍한 한낮에 시작되었던 시위 아니 싸움이 길고긴 하지의 해가 떨어질 때까지 계속된 것이다.

그런데 저 높은 빌딩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거대한 전광 뉴스판에서는 전혀 다른 나라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씨 대통령 후보로 선출.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 무산. 도심에서 산발적 시위.’

이런 글자들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산발적 시위라고? 이게? 폭발적 시위가 아니고 산발적 시위라고?

명호는1980년 5월, 광주에서 그 참혹한 싸움과 학살이 벌어질 때 신문과 뉴스가 어땠는지 떠올려 보았다. 그때는 무장공비가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보도 되었었다.

엉뚱한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그 때 그 놈들이 지금 이 놈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총을 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서울에 무장공비가 침투했다고 보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가 가까운 후덥지근한 여름 밤이지만 등판이 서늘해졌다.

더구나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시위대 수가 빠르게 줄어들면서 정말로 산발적 시위가 되고 말았다. 사실상 진압을 포기하고 있던 경찰이 기세를 회복하더니 다시 최루탄을 쏘며 달려들었다.

시위대는 수십명, 수백명 단위의 조각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조각들이 명동 골목 골목으로 흩어져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달렸다. 전경들도 조각조각 갈라져 비좁고 복잡한 명동 골목 골목을 쫓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했다.

명호도 연철과 명동 골목골목을 달렸다. 전라북도 장수에서 나서, 18년 동안 전주가 다녀본 가장 큰 도시였던 명호가 서울 올라온 지 반년도 안 되는데 복잡한 명동 골목길 지리를 알턱이 없었다. 이 골목을 달리다 보면 전경들이 막고 있고, 저 골목을 달리면 최루탄이 날아왔다. 그냥 무작정 달리는 수 밖에 없었다.

“저기, 저기로 가자.”

이제는 뛸 힘도 없어 꼼짝없이 잡히겠다 싶을 때 연철이 뾰족탑을 가리켰다.

아, 저 뾰족탑. 언덕 위의 뾰족 탐. 저기가 어딘지는 촌놈들도 잘 아는 곳이다. 사진으로 워낙 많이 봤으니까. 바로 명동 성당이다.

“명동 성당 아니냐?”

“그래.”

“저리 가자.”

“좋은 생각이다.”

웬지 저기 까지만 가면 전경들도 함부로 치고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았다.

명호는 이미 탈진하기 직전이 된 연철을 어깨에 걸쳐 질질 끌다시피 하며 명동성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에는 이미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과 전경들 사이를 온화한 표정의 수녀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전경들도 성직자들이 치고 있는 장벽은 부담스러웠는지 그 선을 넘지 못하고 대신 성당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방패진을 세웠다. 성당까지 쳐들어오지는 않겠지만 한 발짝만 벗어나면 당장 잡아갈 기세였다.

“명호야.”

이제 힘을 좀 차린 연철이 손을 내밀었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 손을 잡아 주었다.

“고마워.”

“생뚱맞게 뭔 소리냐?"

“이럴 때 같이 있어주는 게.”

“뭔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러냐? 여기가 무슨 80년 전남도청이냐?”

“웬지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현장 지휘관이야 성직자랑 성당이 부담스럽겠지만 전두환도 그럴까? 사찰도 털었던 놈이 성당인들 못 털까? 아마 일단 멈추고 상부 명령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여간 연철이 이 녀석은 생각이 너무 많다. 생각이 많으니 겁도 많은 법. 그런데 명호도 비슷한 이유로 겁이 났다.

설마 놈들이 수녀님들, 신부님들도? 설마 할 일이 아니었다. 80년 5월, 광주에 설마 성직자가 없었을까? 그때 놈들이 성직자를 조금이라도 부담스럽게 생각 했을까?

그래도 연철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다. 명호는 연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까짓거 겁 안난다. 싸우면 되지 뭐. 몇 날 며칠이라도 버티고 싸우자고.”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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