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호는 눈을 뜨자 마자 몸부림을 치며 일어났다. 처음 보는 엉뚱한 방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방바닥에 널려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깔끔한 방이었다. 벽과 천장은 모두 밝고 화사하게 도배되어 있었고, 빈 자리 마다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한 귀퉁이에 서 있는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열린 틈바구니로 화사한 색깔의 옷가지들이 보였다.
블라우스, 자켓, 스커트.
맙소사. 명호는 순간 땅바닥을 파고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여학생 방인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란 말인가?
명호의 실천이성은 먼저 ‘여성에게 실례를 범했으면 최대한 빨리 사과해야 한다.’라는 격률을 세웠다. 그리고 보편화 가능성의 시험을 하자마자 아주 가볍게 통과했다.
명호의 다음 행동이 바로 결정되었다. 재빨리 일어나서 방주인인 여학생에게 혹시 술김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무례한 행동에 대해 최대한 정중히 사과하고 한시라도 빨리 이 방에서 나가는 것이다.
명호는 일단 자기 뺨을 몇 번 때려가며 정신을 챙겼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덜 깨었는지 뇌수가 두개골 속에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것 같은 출렁거림이 느껴졌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 봐도 방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여학생이 술에 절어 골아 떨어진 남정네하고 한 방에 있긴 곤란했을 것이다. 여기 이렇게 퍼져 있는 동안 다른 친구 방에 가거나 했을 것이다.
명호는 얼른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복기했다.
어제 출소했다. 교도소는 커녕 기껏 경찰서 유치장에서 며칠 쳐박혀 있다 나온 것에 출소라는 말은 과하지만 명호가 느끼기로는 출소나 다름없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모범생이었는데 경찰서에 끌려 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유치장에서 나와 신림동에 다시 발을 디디는 순간 명호는 온 몸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 올랐다. 함께 풀려난 학생들이 일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 형제 울부짖던 날 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진리를 외치는 형제들 있다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우리 새역사 삼천리 방방골골 농민의 깃발이여 찬란한 승리의 그날이 오길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 있다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 있다
노래에 맞춰 10여명의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4박자 춤을 추었지만 누구 하나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심지어 박수치는 시민도 있었다.
하지만 그 힘찬 기상은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물리적 현실 앞에 순식간에 사그러졌다. 명호는 굶주린 배를 안고 일단 ‘열린 글방’으로 갔다.
역사교육과 학생들이 약속을 정할 때 주로 열린 글방 귀퉁이의 메모판에 핀으로 메모지를 꽂아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방에 들어서자 메모장 볼 것도 없이 인우와 난영을 바로 만났다.
“여! 소림사 테러리스트!”
인우가 활짝 웃으며 손을 치켜 들었다.
“아, 형. 그 말은 좀.”
명호가 손을 내저었다.
이 별명은 명호가 머리를 스포츠 형으로 짧게 깎고 다니는데다 6월 10일, 그 거대한 가두 투쟁에서 백골단과 치고박고 열심히 싸우는 모습을 보고 선배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손을 내젓긴 했지만 딱히 듣기 싫지는 않았다.
“출감 축하해.”
난영이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출감은 무슨. 빙딱 같이 잡혀갔다 나온 게 무슨 자랑이라고 호들갑이냐?”
그러자 인우가 등을 탁 치며 말했다.
“그게 임마, 다 훈장으로 받아들여.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야. 1987년에 구류 한 번 안 살아 본 것을 큰 부끄러움으로 여기게 될 그런 날 말이야.”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그럼. 그러니까 이렇게 힘들어도 싸우지.”
“그 말이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저기.”
난영이 슬그머니 명호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왜? ”
“연철이는? 며칠 동안 안 보이는데, 연철이도 잡혀있니?”
“너가 연철이는 왜 물어 보는데?”
“야, 너 몰랐냐? 둘이 사귄다.”
“오메. 진짜냐?”
“아, 참. 인우 형!”
“아이고. 미안하다. 천기 누설했구나.”
“천기누설은 무슨. 이미 알고 있었는데. 연철이는 3월부터 너하고 다리 놓아 달라고 엄청 졸라댔다. 난영아, 걱정 마라. 연철이는 지금 명동성당에서 열심히 농성하고 있을 거다.”
“그렇구나. 그런데 넌 같이 안 있고 어쩌다 잡혀 간 거야?”
“아, 이건 좀 긴 이야긴데.”
“괜찮아. 시간 많아.”
명호는 주린 배를 잠시 진정시켜 놓고 6월 10일 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일단 6월 10일 밤, 명호는 명동 골목에서 경찰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이리 저리 밀려 다니다 연철과 같이 명동성당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전경들이 성당 마당까지 쫓아왔지만 신부들과 수녀들이 나서면서 일단 싸움은 멈추었다. 대신 전경들은 성당 주변을 에워싸고 출입을 통제했다.
꼼짝없이 성당 마당에서 농성하며 밤을 지새우다 깜박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웬 1톤 트럭이 성당 마당으로 들어왔다. 트럭에는 커다란 확성기가 달려 있었는데, “계란 사세요.” 라거나 “고장난 시계 팔아요.” “꿀 사과가 왔어요.”라거나 하며 돌아다니는 행상이 연상되는 그런 모양이었다.
그런데 짐 칸에는 계란도 고물도 아닌 피아노 같이 생긴 악기가 놓여 있었다. 진짜 피아노는 아니고 디지털 피아노나 키보드였을 것이다.
그런데 트럭 문이 열리자 농성중인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술렁대기 시작했고, 그 중 몇몇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명호는 금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트럭에서 바로 권정우, 디누가 내린 것이다.
디누는 농성하느라 퀘퀘해진 학생들을 미소 띤 얼굴로 둘러 보더니 가벼운 몸놀림으로 풀쩍 트럭 짐칸에 올라가 키보드인지 피아노인지에 이리저리 선을 끼워 넣었다.
음질은 좋지 않았지만 확성기를 통해 피아노 소리가 쩌렁쩌렁 명동성당 일대를 흔들었다.
“아, 저거야 바로 저거.”
연철이 명호의 팔뚝을 두드렸다.
“저거라니?”
“내가 말했던 그 음악회에서 연주했던 곡.”
바로 그 곡이었다. 명호가 클래식이려니 하고 안 가봐서 아쉬워했던 그 음악회에서 정우(음, 명호는 디누라고 부르자니 낯이 간지럽다. 통성명 했으니 그냥 학교 친구 정우다)가 연주했던 곡, 바로 ‘광주 판타지’가 농성투쟁 현장에서 생음악으로 그것도 작곡가 실연으로 울려퍼진 것이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무 가사도 없고, 사람도 없고, 오직 피아노 한대만 소리 내고 있는 데도 수 많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처음에는 원한과 분노에 차 있었지만 차차 기대와 희망의 목소리로 바뀌어 갔고, 마침내 몰아의 황홀경으로 치고 올라갔다.
대단한 음악회였다. 외신 기자들이 일제히 몰려와 농성중인 학생들과 그 앞에서 연주하는 정우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갑자기 탄식과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너무 감동 받아 외치는 그런 소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깜짝놀라는 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정우가 휘청 거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트럭 위로 뛰어 올라가는 성진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성진 혼자 정우를 들쳐 메고 가기 버거워 보였다. 명호는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몸을 던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힘 하나는 자신 있는 몸이니까.
경찰이 포위하고 있는 마당에 구급차 부르기도 힘들것 같았다. 그래서 명호는 정우를 업고 길 건너 백병원으로 뛰었다. 외신 기자들도 명호를 따라 뛰었다. 물론 기자들의 관심사는 명호가 아니라 업혀있는 디누였지만, 덕분에 전경들도 명호를 막지 못하고 슬금슬금 길을 비켜주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야기가 여기쯤 진행되자 인우가 그 다음 이야기 안 봐도 뻔하다는 표정으로 낄낄 웃었다.
“우하하. 알겠다. 일단 명동성당 나와서 병원 갔으면 그냥 그걸로 끝인데, 굳이 명동성당 다시 들어가려다 잡혔구나?”
“어?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작년 건대에서 그랬거든. 전경들이야 나가는 사람은 안 막지. 그런데 다시 들어가려고 하면 하하. 뭐 뻔한 거지. 자, 자, 타령은 그만 하고, 가자. 내가 한 잔 산다.”
“좋습니다요.”
그렇게 그들은 어깨를 서로 걸고 학사주점 ‘스페이스’로 갔다. 아직도 명동성당에서 풍찬노숙하며 농성투쟁 중인 연철에게는 미안했지만.
“아따! 술맛 한번 오지게 좋습니다. 가슴이 그냥 뻥 뚫리는 것 같네요. 기왕 술 내셨으니 담배도 좀.”
“구류 며칠 가지고 이 정도면 구속이라도 되면 아주 한 재산 내 달라 하겠다. 유세 떨기는. 그런데 난 담배 없다. 난영아. 네거 좀.”
난영이 담배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명호는 얼른 한 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난영도 한 개비 뽑아 입에 물고, 연기를 모락모락 뿜었다.
‘아니 난영이 이 녀석은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지?’
명호는 아직 옛날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학생이 담배 피는 모습이 낯설었다.
“자. 우리 명호 소감 한 번 들어 볼까?”
“소감이라뇨?”
“그 정도 싸웠으니 느낀 바가 있을 것 아니냐?”
“아, 그 소감이요? 그거라면 뭐랄까 희망적입니다. 이대로 쪼매만 더 싸우면 조만간에 놈들 항복 하지 않을까 싶네요. 4.19처럼요.”
그런데 인우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글쎄? 좀 모자라지 않을까?”
“모자라다뇨? 그 이상 또 뭐가 있다고?”
“있지.”
번번히 그런다. 인우도 그러고, 연철도 그러고, 진도 그런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이 싸움이 전부가 아니라고, 그 다음에 더 있다고 자꾸 그러는데, 명호는 도무지 그 다음이 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민주주의, 그 다음은? 더 강한 민주주의? 아니면?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확인해 보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그 이상 무엇이라면, 설마, 공산주의라도 꿈꾸나요?”
인우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난영이 툭 끼어 들었다.
“왜? 겁나?”
“아니, 겁난다기 보다는.”
명호가 고개를 갸웃 거리자 인우가 언제 아까처럼 촐삭거렸냐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재자들이 한결 같이 반공을 외치고 좌파를 척결하자고 외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왼쪽과 붉은색에 공포감을 느끼게 온 국민을 조건반사 시킨 이유가 대체 뭘까? 국민들 생각해서 그러진 않았겠지?”
“그렇겠죠?”
“그럼 왜? 두렵기 때문이야. 독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야. 우린 갈림길에 왔어. 4. 19 수준에서 만족하고 다시 학업에 충실한 모범생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진짜 세상을 바꾸는 혁명의 길을 가느냐.”
명호가 동동주를 연거푸 두 사발을 들이킨 뒤 숨을 깊게 쉬고 말했다.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 쉽게 안 받아들여지네요. 그럴 생각도 없고요. 맹목적으로 공산주의는 나쁜 것, 이렇게 세뇌된 거 인정 하지만서도,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갑자기 공산주의는 좋은 것이여 이렇게 생각해 버리면 그것도 역시 맹목적이긴 마찬가지라서요.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여튼 먼저 공부부터 하고, 그 담에 생각할랍니다.”
“그게 올바른 태도지. 나도 맹목적 싸움꾼은 원하지 않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님 존경하고 있습니다.”
“아부 떨지 마. 자 한 잔 더.”
이렇게 또 한 잔을 들이켰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명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거부감이 치밀었다. 이게 전부 12년 동안 주입 받아왔던 맹목적인 반공 교육 탓일까?
하지만 명호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저작은 커녕 그 주석서나 입문서도 읽어 보지 못했다. 뭘 알아야 좋고 말고 할 것이 아닌가? 읽자. 그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읽을 거리는 연철이 책장에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
그리고 계속 술만 퍼마셨다.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에도 없다. 공산주의나 자유민주주의, 둘 중 하나는 알코올에 씻겨 내려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둘은 씻겨 내려가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엉켜버렸다. 마구 엉킨 두 이데올로기에 알코올이 가세하면서 명호의 머리 속을 카오스 상태로 만들었다.
속이 거북해진 명호는 비틀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토하면 시원할 것 같아 왕희지체 갈지자와 비슷한 모양의 걸음을 걸으며 온갖가지 냄새가 혼합되어 있는 화장실로 들어섰다. 냄새 탓인지 술기운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장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위장이 강렬한 경련을 일으켰다.
-우웩, 우웨엑
그 경련과 동시에 오버이트, 그 절묘한 콩글리시에 딱 울리는 역겨운 생리현상이 시작되었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마치 육신이 모조리 녹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시뻘건 토사물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우욱!
헛구역질이 몇 번 나오더니 마침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구토가 멎었다.
방금 전 구토가 계속될 때에는 세상에서 다시 겪기 힘든 고통 같았는데 막상 속이 비고 나니 웬지 시원하고 가뿐했다. 야릇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구토가 끝난 뒤의 빈 속. 이것도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 해야 할까?
뭔가 시원한 것이 마시고 싶어져 근처 슈퍼에서 게토레이 한 병을 사서 들이켰다. 마시는 순간 아차 싶었다. 게토레이 광고 문구가 떠올랐다.
“물 보다 흡수가 빠르다.”
이미 늦었다. 차가운 게토레이가 위 벽을 두드리는 순간, 위장 속에 남아있던 알코올이 물보다 빨리 흡수되는 게토레이를 따라 일제히 혈관 속으로 빨려들어왔다. 머리가 혼미해졌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여학생 방에서 눈을 떴다.
“이제 깼니?”
방 주인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 목소리는 명호가 절대 못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바로 손미현의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여기는? 아이고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김명호, 일어났어?”
미현의 목소리가 다그치듯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명호가 하는 수 없이 어리벙벙하게 대답했다.
“깨기는 깼는데, 뭐가 어떻게 된 지 모르겠다. 내가 어쩌다가 여기 와서 이렇게 누워 있냐?”
“어머. 아무 생각 안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 마침내 방문이 열리고 미현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명호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일단 사과, 아니 변명부터 했다.
“혹시 내가 무슨 실례라도 하지 않았냐? 만약 그랬다면 제발 용서해 주라. 나 어제 완전히 필름이 끊겨 버렸다.”
다행히 미현의 얼굴에 화나거나 짜증스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풋 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만 말고, 진짜로 내가 무슨 엄한 짓거리 안했냐?”
“기억 안 나는 걸 굳이 알아내려 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그냥 묻어 둬. 암만 술이 떡이 되어도 김명호는 김명호더라. 걱정마. 자, 아침이나 먹자.”
“그러지 마라. 부담스럽게.”
“그냥 맨날 먹는 데서 밥 한 그릇 더 놓는 건데 뭐? 너 겉모습은 터프한데 속은 영 딴판인가 봐?”
명호는 미현을 그냥 얌전한 아이로 알았는데 의외로 말 펀치가 세서 놀랬다. 역시 사람은 좀 겪어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말 펀치의 충격을 남겨두고 미현이 방밖으로 나간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경쾌한 콧노래가 들리더니 이내 향긋한 콩나물국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콩나물이 숙취 해소에 좋다는 말이 헛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현이 작은 상에 국과 밥 그리고 김치 약간을 차려서 들고 왔다. 명호는 얼른 일어나 상을 받아 들어 방 가운데에 내려 놓았다.
“차린 건 정말 없지만 맛나게 먹어줘.”
“차린 게 없다니 거 무슨 실없는 소리냐? 나 한텐 이 정도면 궁중 정식이다.”
명호는 씩씩하게 수저를 휘두르며 ‘머슴 스타일’ 이라는 식사법이 사전에 나와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이다 싶은 모습으로 정신없이 밥과 국을 입에 퍼 넣었다.
따뜻한 국물이 정신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더운 밥이 위장을 차곡차곡 채우기 시작하자 밤새 구토에 시달렸던 명호의 소화기관들이 천천히 가라 앉으며 제 자리를 찾았다.
“아따! 이제 좀 살겠네.”
명호는 편안해진 배를 두드리며 뒤로 물러 앉았다.
“고마워. 맛있게 먹어줘서.”
“무슨 소리냐? 내가 고마워 해야지. 너한테 언짢은 짓도 했을 것인데 밥까지 얻어 먹고 보니 너무 빚진것 같아 맘이 편치 않다. 보답을 해야 쓰겠는데, 뭐든지 말해 봐라. 내가 힘 닿는 데 까지 들어줄게.”
“그럼,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
“이야기? 대하 소설이라도 들어 줄게.”
“훗. 그 정돈 아니고. 음, 나 사범대 문학회 가입했어. 중학교 때부터 문학이 꿈이었거든. 아 신입생 환영회 때 말 했던가? 역사과 지망한 것도 토지 같은 대작 쓰고 싶어서라고 그랬지? 그런데 문학회 가입하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직 시 한 줄, 소설 한 토막 같이 읽어보거나 써보지 못했어.”
“어째서?”
“다들 가투 나갔거든.”
“너는?”
명호는 뱉아 놓고 순간 아차 했다. 이 상황에서 “너는?” 이라니. 너는 왜 가투 같이 안나갔냐며 비난하는 것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명호가 그렇게 느낄 정도라면 그 말을 듣는 미현은 오죽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미현이 몸을 잔뜩 움츠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속으로 몇 번이고 같이 싸우러 나가자 그랬지만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늘 빈 동아리 방에 혼자 앉아 가슴만 잡아 뜯었어. 너무 부끄럽고 미웠어.”
“뭔 소리냐? 세상에 싸움하러 나가는 것이 안 무섭다고 말하는 놈이 있다면 그딴 놈은 완전히 허풍장이에 거짓말쟁이다.”
“너도 무서워?”
“무섭지 않고? 나갈 때 마다 점점 더 무섭다.”
“그런데 어떻게 또 싸우러 나가? 유치장에 이틀이나 갇혀 있다가 나왔다면서? 어떻게 또 싸우러 나갈 마음이 생겨?”
“이틀이 아니라 사흘이다만, 뭔 용기랄 것이 있겠냐? 내가 싸움에 빠지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 그러면 큰 죄를 짓는 것 같다는 느낌, 난 그 느낌이 경찰한테 얻어맞고 끌려가는 것 보다 더 무섭다. 열 배 천 배는 더 무섭다.”
“도덕적 동기구나.”
“미현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내가?”
“그럼.”
“어떻게? 다른 친구들 피터지게 싸우고, 이한열이 목숨 잃어가며 싸울 때 이렇게 가만 있기만 하는게 어떻게 도덕적이야?”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네 마음이 편치 않다는 증거 아니냐?”
“맞아. 편치 않아.”
“그 편치 않은 마음이 계속 쌓여 간다면 어찌될 것 같냐? 그걸 견딜 수 있겠냐?”
미현이 입술을 열려다 다시 닫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더니 짦고 간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못 견뎌.”
명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엄지를 치켜 올렸다.
“나도 그래서 싸우러 나가는 거다. 경찰의 몽둥이보다도 최루탄보다도 그 마음이 무서워서.”
미현이 두 팔을 밥상위에 올려놓고 손을 포개어 얼굴을 받쳐 든 자세로 고개를 왼쪽으로 살며시 기울인 체 명호를 바라본다. 이 분위기에 너무 안 어울리는 표현이지만 명호는 그 모습이 깜찍해 보였다.
하지만 그 자세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미현과 눈을 마주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명호는 천장 벽 책꽂이 등으로 눈동자를 정처 없이 돌려댔다.
“명호야.”
미현의 나직한 그리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이리 저리 흩어지던 명호의 시선을 다시 끌어 당겼다.
“으, 응?”
“오늘도 시내 나가면 가두 투쟁 같은 것 하고 있을까?”
“명동성당 진입투쟁 하고 있으니까 시내 어딜 가든 온통 싸움터일 것이다.”
“같이 가면 안될까?”
“네가?”
“나도 힘을 보태고 싶기는 한데, 혼자 가자니 겁나고. 너랑 가면 어떨까 싶어서.”
“정말?”
“응.”
“왜 하필 나냐?”
그러자 미현이 살짝 눈을 치켜 올리며 명호를 노려보았다. 귓가도 발그스름했다.
“왜 그렇게 캐물어? 거절하는 거야?”
아이고 맙소사. 무슨 말도 안되는? 명호는 바보같은 말을 연거푸 내뱉는 자신을 책망하며 손을 내저었다.
“거절이라니? 그럴 리가 있겠냐? 오늘 하루 기꺼이 네 보디가드로 충성을 다 할 것이다.”
“고마워.”
“그럼 나는 내 방에 좀 들러 씻고 옷 갈아입고 올게. 사흘동안 쩔어서리. 1시에 상업은행 앞에서 보자.”
“그래.”
“아 참, 설거지는 내가 할게.”
“괜찮아. 보디가드가 설거지에 체력 낭비하면 안 되잖아?”
“그러냐? 1시에.”
“응. 이따 봐.”
명호는 미현의 방을 나와 자취방까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있는 힘껏 달렸다. 도저히 느긋하게 걸을 수 있는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이야기가 참 요상하게 흘렀다. 미현과 민주주의의 거대한 바퀴가 굴러가는 역사의 현장에 같이 서다니. 꿈이 현실이 되다니. 그것도 이렇게 훅 다가오다니.
혹시 이것이 꿈은 아닐까? 아직도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앞으로 뭔가 일이 꼬이느라 짐짓 좋은 일이 일어나는 척 하는 운명의 희롱 같은 것은 아닐까? 자꾸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명호는 뭐 아무려면 어떠냐며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딱 하나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미현이랑 가투에 간다. 그 다음에 있을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문득, ‘야 이 자식아 가투가 투쟁이지 데이트냐?’ 이러는 양심의 꾸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명호는 그것도 묵살했다. 그까짓 거 뭐. 둘을 꼭 구별할 필요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