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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1987년 2부 여름 6화 성진2

by 권재원

1980년 5월이 끝나갈 무렵, 김나지움 2학년이던 진은 선생님이나 급우들이 던지는 걱정스러운 혹은 뭔가 수상한 시선을 느꼈다.

집에 갔더니 부모님 역시 여느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이 나쁜…~~~~~~”

아버지가 허공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전공한 절반쯤 신학자에 가까운 철학자 입에서 나올 수 없는 그런 거친 말들이었다.

말 뿐 아니라 얼굴도 무서웠다. 당장 눈 앞에 그 욕설의 대상이 있으면 갈갈이 찢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순간 성진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고 이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아무 말 못하고 겁 먹은 고라니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진은 그때 아버지 눈빛에 담긴 감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연민이었다.

진은 당황스러웠다. 대체 아버지가 연민을 느껴야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일자리라도 잃었나? 사기를 당해 전재산이라도 날렸나? 이혼하고 외갓집에 맡겨지는 것일까?

하지만 아버지는 속 시원한 대답 대신 말 없이 테이블에서 신문을 집어 어떤 기사를 가리키며 읽어 보라는 몸짓을 했다.

기사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진은 기자가 Nord Korea를 Sud Korea로 착각해서 오보를 낸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광주라는 도시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 참혹한 내용은 틀림없이 남한, 대한민국, 진이 장차 돌아가게 될 조국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TV 에서도 광주 5.18의 참상이 생생하게 방영되었다. 리포터는 차마 방송에 내 보낼 수 없는 끔찍한 장면이 더 많이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성진은 덜 끔찍하다고 소개된 장면 만으로도 이미 PTSD가 남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진은 어렸지만 한국이 온전한 민주국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폭압적인 통치기구가 지식인이나 저항세력을 간첩으로 몰아 고문하고, 투옥하고, 심지어 살해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들락거리는 유학생들과 아버지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압기구가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고 고문하는 것과 군대가 시민에게 사격을 가하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일이다. 하나는 독재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심지어 독재국가조차 못되는 야만사회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진은 처음에는 두려움을 나중에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독일 사람들에게 Korea 라는 나라가 오직 한국전쟁과 광주 이 두 키워드로 각인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정작 독일 선생님들은 한국에 대한 경멸 보다 그런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성진의 앞날에 대한 걱정을 더 많이 보여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걱정은 진심이었다.

김나지움 5학년이던 1982년, 그나마 광주 학살의 나라 국민이라는 부끄러움을 덜고 한국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살려준 사건이 있었다. 독일 예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뮌헨에서 열린 국제 실내악 콩쿠르에서 한국인 남매가 그것도 10대 소년 소녀가 당당하게 최고상을 받은 것이다. 그 남매가 바로 권미우와 권정우, 즉 ‘미우 & 디누’ 듀오였다.

이 거칠것 없는 남매는 곧 이어 누나가 베른에서 동생이 취리히에서 각각 권위있는 국제 콩쿠르의 1위와 1위 없는 2위를 수상 하면서 다시 한 번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미우는 17세, 그리고 정우는 진과 같은 14세에 불과했다.

진을 자랑스럽게 만들어 준 또 다른 존재는 바이올리니스트 강소정이었다. 비록 한국, 프랑스 이중국적자로 지네트라는 프랑스 이름으로 활동하고, 강소정이라는 이름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국제 음악계에서도 프랑스인으로 보고 있었지만 어쨌든 부모가 한국인이다.

지네트 역시 성진과 한 또래였다.그런데 진이 디누보다 지네트를 더 자랑스러워 하는 까닭은 명성을 얻은 과정이 디누와 달랐기 때문이다.

디누가 어린 나이에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활동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음악 뿐 아니라 매력적인 외모도 한 몫 했다. 괜히 클래식 아이돌이라는 말을 듣는게 아니다. 화장품 광고에도 나왔을 정도니 말이다.

물론 진은 디누가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모차르트와 쇼팽 연주는 열아홉 살 청년이 아니라 쉰아홉살 거장 중에서도 필적할만한 사람이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디누가 연주할 때 객석을 꽉 채우는 청중들 중 1/3, 아니 절반 정도는 연주를 듣기보다 연주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었다.

지네트는 달랐다. 지네트는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다. 오직 바이올린 연주만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열 네살 소녀가 파가니니 등 기교적으로 어려운 곡을 현란하게 연주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하지만 열 네살 소녀가 기교적으로 어려운 곡을 재해석하여 깊이 있는 곡으로 바꾸어버리는 연주를 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같은 일이었다.

미우, 정우 남매와 지네트의 활약 덕분에 당시 독일 지식층 사이에서 한국은 더 이상 전쟁과 광주라는 부끄러운 키워드 만으로 거론되는 나라가 아니게 되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한국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광주라는 주제를 회피하고 미우&디누와 지네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그리고 귀국을 앞두고 있던 1983년 겨울, 지네트의 공연이 룩셈부르크에서 열렸다. 트리어 같은 소도시는 지네트 투어 일정에 끼지 못했기 때문에 룩셈부르크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연주회였다. 성진은 그 동안 모은 용돈을 다 털어 좋은 좌석을 구했다. 덕분에 차비가 없어 자전거를 타고 가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연주회 당일, 진은 룩셈부르크까지 자전거로 한시간을 달려갔다. 지네트는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 중 몇 곡,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 중의 몇 곡을 엮어 프르그램을 구성했다. 명불허전의 연주였다. 소리만으로는 열 다섯 살 소녀의 연주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독일이 자랑하는 소녀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소피 무터와도 아예 차원이 달랐다. 음악을 듣는 시간 동안 그 소리가 들리는 범위 만큼을 세계에서 분리하여 작은 천국으로 만드는 그런 연주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과장일까? 연주가 끝난 뒤 깜깜한 밤길을 자전거로 한 시간을 달려야 했던 귀가길도 그 기쁨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다.

바로 다음달 진은 아버지를 졸라 지네트의 음반을, 그리고 조르는 김에 미우 & 디누의 음반도 몽땅 구입했다. 아직 어린 연주자들이라 모두 샀다고 해 봐야 몇 장 되지는 않았다. 레코드 판을 아끼기 위해 원본은 잘 보관해 두고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한 것을 듣고 또 들었다. 이 신동들은 광주라는 키워드 때문에 무참하게 짓밟혀 시들어 가던 성진 내면에 암브로시아 역할을 했다.

덕분에 귀국을 기다리는 -귀국이라는 말이 어폐긴 하다. 아버지는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진은 처음 가는 것이니 말이다- 정서가 두려움과 절망에서 희망과 투지로 바뀌었다.

그때 진은 이렇게 생각했다.

한국은 이런 음악의 천재들을 배출한 나라다. 이런 나라에는 희망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비록 광주 학살과 같은 참변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한국인은 그 본성에 천재성이 번득이는 그런 민족이다.

이런 자부심 때문에 독재 정권에 대한 적개심도 강해졌다.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결코 민족의 현 상태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성적”이라는 헤겔의 말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성적이라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한 것 과 같다.

미적인 것은 언제나 실천을 요구한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얼굴과 몸을 늘 관리하고 가꾸어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하듯, 아름다운 민족이라는 자부심은 그 민족의 상태를 늘 아름다운 상태로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했다.

한국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성진의 자부심은 한국의 천재성과 아름다움을 억압하는 세력을 제거하고 한국을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는 강력한 실천을 요청했다. 그것이 바로 지네트 연주회가 바꾸어 놓은 진의 마음이었다.

이후 시민을 학살하는 군사독재의 나라 한국에 간다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한국에 돌아가 절망의 나라, 공포의 나라를 희망의 나라 아름다움의 나라로 바꾸고 싶다는 의욕과 투지가 채웠다.

아버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귀국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한국에서 날아오는 편지들이 많아졌다. 멀리 본, 베를린, 뮌헨에서부터 유학생들이 집에 드나드는 날도 많아졌다. 그들이 서쪽 구석에 있는 트리어까지 와서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직이니 선언이니 이런 단어가 종종 들렸고, 때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진은 한국에서는 신문과 방송이 통제되어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억압되어 있고, 심지어 외국 여행도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그때 진은 결심했다. 한국에 진실을 알리기로. 먼저 광주의 진실을 알릴 녹화 테이프를 구했다. 독일에서는 이미 광주 5.18에 대한 영상들이 방송되었기 때문에 녹화 테이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다음은 그 테이프들을 편집하여 비디오 테이프에 옮겨 담았다. 비디오 테이프에 바로 녹화하는 순진한 짓은 하지 않았다. 축구 경기 하나를 녹화 하고, 30분 이상 경과된 지점부터 광주 영상을 녹화했다. 한 테이프에 10분 이상 녹화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비디오 테이프 5개에 흩어서 녹화했다.

한국에 들어가면 이 흩어진 영상을 다시 하나의 테이프로 모을 것이다. 화질은 많이 떨어지겠지만 중요한 것은 진실이지 화면의 선명함이 아니었다. 녹화를 마친 비디오 테이프들에는 모두 분데스리가 라벨을 덕지덕지 붙였다.

다음은 한국에서 금지되어 있는 사상을 알릴 준비를 했다. 책은 세관을 통과하기 어렵기 때문에 공책에 옮겨 적었다. 마르크스, 엥겔스, 마르쿠제, 아도르노의 저술을 꼼꼼하게 공책에 옮겨 적었다.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하지 않고 공부도 하고 나름의 해석도 첨부했다. 열 다섯 살 소년이 그런 책들을 어떻게 읽고 정리할 수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성진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게 나다.”

이걸 사춘기 소년의 어이없는 자기중심성, 과잉 팽창된 자아라고 비웃어도 좋다. 어쨌든 성진은 그런 일들을 아주 진지하게 했고, 입국하는 날 세관에서 오줌이 지릴 정도로 긴장했으니 말이다.

“이게 무슨 내용이지?”

공책들을 노려 보는 세관원의 눈매는 날카로우면서 차가웠다. 한 눈에도 단순한 세무 공무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법무부 공무원들이었다. 하지만 성진이 공책에 독일어로 휘갈겨 쓴 글자들을 읽어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좋아하는 독일 작가들 필사했어요.”

진은 이렇게 얼버무렸다. 독일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알아 볼 수 있는 단어들, 가령 Marx, Engels, Proletarien, Umwalzung 같은 단어들은 다 적당한 암호로 바꾸어 적었기 때문에 알아채지 못할 거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누구?”

세관원은 여전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세관원이 의심한 것은 아마 성진이 아니라 아버지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뭔가 불온한 내용을 적어서 아들 공책으로 위장 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깊게 패인 이맛살에 가득 담겨 있었다.

“후고 폰 호프만슈탈, 마틴 발저, 막스 프리쉬, 지크프리트 렌츠.”

진은 일부러 한국인들이 잘 모를것 같은 독일 작가 이름들을 댔다. 세관원들이 이 공책들을 보고 그 사람들 작품이 맞는지 확인할 능력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끝내 의심하여 독일어에 능한 직원을 불러 꼼꼼하게 확인하거나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에 긴장을 풀지 못했다.

다행히 대충 납득한 모양이었다. 공책들을 후르륵 빠르게 넘겨 보더니 성의 없이 트렁크에 휙 던져 넣었다. 진은 얼른 공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축구 좋아하나?”

세관원이 이번에는 비디오 테이프를 가리켰다. 진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이 남자애들은 축구가 최고지. 좋아하는 팀 있어?”

“바이에른 뮌헨, 함부르크, 도르트문트.”

“요즘 분데스리가 한 물 갔잖아? 세리에 A, 거기가 진짜지. 유벤투스, 에이에스 로마. 응?”

세관원이 괜히 아는 척을 했다.

진은 그게 아는 척이 아님을 직감했다. 축구 경기 녹화 테이프를 여러개 가지고 올 정도로 정말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인지 슬쩍 떠 보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 세관원에게는 미안하지만 진은 정말 축구를 좋아하고, 학교 축구팀에서 골키퍼로 나름 명성을 날렸던 몸이었다. 축구에 대해서라면 밤 새도록 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벤투스는 플라티니를 영입하고도 함부르크한테 졌죠. 이래도 세리에가 무조건 분데스리가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나요?”

이렇게 반박했다. 유러피언 컵 결승전 결과를 말한 것이다.

“아 그런가? 이거 진짜 축구 팬이로군. 좀 물어봐도 될까? 이 테이프는 멋진 경기 장면들?”

“물론이죠.”

진은 비디오에 녹화되어 있는 경기들을 미리 보고 경기의 진행 과정을 모두 머릿속에 넣어 두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마치 실황 중계하듯이 경기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세관원이 비디오 테이프 중 몇 개를 꺼내 재생하며 진이 하는 말과 실제 녹화된 경기가 비슷한지 확인했다. 예상보다 훨씬 치밀하고 집요한 놈이었다. 그렇게 테이프 네 개 정도를 빨리감기 몇 번 해 가며 보다 다섯개째 테이프에서도 축구경기가 나오자 씨익 웃으며 테이프를 꺼내 다시 트렁크에 성의 없이 던져 넣었다.

집요한 놈이지만 다행히 지독하지는 않았다. 만약 지독하기까지 한 놈이었다면 십분 정도만 빨리감기 해 보고 다음 테이프로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다 돌려보려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중간 중간에 삽입해 놓은 광주 영상을 발견했을 것이고 성진 뿐 아니라 아버지까지 끌려가 지독한 심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세관을 통과하고 마침내 입국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진은 화장실로 전력질주 해야 했다. 오줌을 지릴 정도로 두렵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체험하고 말았던 것이다. 화장실에서 축축해진 팬티를 벗어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나자 진은 자신이 결심한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실감났다. 두려움이 지나간 자리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겨우 이 정도에? 그럼 진짜 싸움에서는 어쩌려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겁먹고 불안에 떠는 사춘기 소년을 노려 보았다. 그 소년이 신념에 불타는 청년으로 바뀔 때 까지 계속 노려보았다. 그리고 의연한 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앞으로 한국에서 보금자리가 될 대치동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재편집 작업에 돌입했다. 비디오는 여러 테이프들에 흩어진 영상을 하나로 모았고, 공책은 독일어로 된 내용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타자기로 꼼꼼하게 읽기 좋은 문서로 작성했다.

그런 식으로 진은 광주 5.18 비디오를 만들었고,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의 ‘1844 파리수고’, ‘정치경제학비판개요 서설’, ‘임노동과 자본’을 읽기 좋은 타자본으로 만들었다. 남은 일은 학교에 가서 이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더 많은 카피본을 만들어 퍼뜨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이들 모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전학 간 학교는 강남구에 있었고, 강남구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전두환에 대한 반감이 높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고학력층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 특성상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와 실제 이루어지고 있는 군사독재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학부모들이 대체로 대학 시절 4.19 혁명에 참가했던 세대라 더더욱 군사독재에 대한 반감이 높았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라 정부가 은폐하고 있는 광주의 진실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소식통, 특히 외국의 지인들을 통해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아이들 역시 알게 모르게 그런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이른바 광주사태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전학 간 학교에서 진은 학생들의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네트워크를 어렵지 않게 확보했다. 독일에서 왔다는 것, 아버지가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것, 학업 성적이 높다는 것. 이 정도면 고등학생 사회에서 주류가 되기에 충분했다.

진은 그 학교에 권정우, 즉 디누가 다니고 있어 깜짝 놀랐다. 어렵지 않게 디누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디누가 음악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진이 하고자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서 다시 놀랐다.

진이 가지고 간 비디오 테이프는 그 동안 정부가 유언비어라며 일축했던 것들이 사실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테이프를 본 아이들은 광주의 참상이 유언비어보다도 오히려 더 참혹했다는 것을 보고 전율했다. 오석은 화장실에 가서 구역질 까지 했다.

진은 아이들이 격앙되어 있을 때 바로 질문을 던졌다.

“이런 일이 전두환이라는 싸이코 한 놈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해? 전두환 같은 놈이 득세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거란 생각 안해봤어?”

이런 식으로 학교 친구들과 세상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그 이름을 송백회라 붙였다. 학교 뿐 아니라 다니던 성당을 중심으로 더 많은 모임을 만들었고, 대학생들과도 연계하였다. 광주 테이프, 그리고 소위 불온 사상의 해설서도 복사해서 돌렸다.

그러다 결국 진은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얻은 뒤 학력고사를 치고 서울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지하 활동가가 되겠다며 수상한 장소에서 약속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남는다고 멍청한 전자오락이나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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