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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1987년 2부 여름 4화 박연철2

by 권재원

인우는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잡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소용돌이. 두개골 안에서 뭔가 물컹한 것들이 서로 뒤엉키며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때문에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바깥 공기를 있는 힘껏 흠뻑 마셨다. 심호흡을 열 번 넘게 한 다음에야 소용돌이가 멈추었다.

“CA에 넣어 주세요.”

신입생한테 이런 말 들을 줄 몰랐다. 신입생이라면 자기 과에서 과 학회 하고, 과 행사에 참석하고, 그러면서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차차 깨달아 가고, 진실에 눈 뜨고, 바른 의식을 갖춘 뒤, 작은 투쟁부터 차근차근 참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마저 어지간한 결단 없이는 어렵다. 그런데 대뜸 언더 써클에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신입생이라니. 무섭고 징그러웠다.

무엇보다 박연철 이 녀석이 어떻게 인우가 CA 언더 조직 소속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인우가 어디 가서 “나 CA요” 하고 떠들고 다니지 않았다. 게다가 인우는 CA의 중요한 활동가도 아니다. 2학년 부터 언더에 들어왔기 때문에 활동한 경력이 없고, 같은 CA 86학번들 사이에서 조금 무시당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물론 인우는 CA에 들여 보내 달라고 선배에게 부탁하지 않았고, 누가 그럴 위치에 있는 선배인지 알지도 못했다. 학회 세미나와 크고 작은 투쟁 현장에서 눈여겨 보았던 선배들이 같은 과 선배인 이진철에게 인우의 영입을 요청했고, 그 요청을 들은 진철이 조용히 뜻을 물어왔을 뿐이다.

“요즘 좀 어때?”

당시 진철은 이렇게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인우는 이럴 때 뭐라 대답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어 난감했다. 그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어버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우의 어버버에 대한 진철의 대답만큼은 기억에 생생했다.

“우울해 보여서.”

우울. 이것이야 말로 당시 인우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었다. 진철이 이렇게 말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인우에게 우울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았다. 인우가 의식적으로 웃고 농담하며 밝은 모습으로 학교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우는 우울했다. 우울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1986년 10월 28일. 인우가 건국대학교 농성에 어찌하다 휘말린 날짜다.

인우는 다만 선배들을 따라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 발족식이 열리는 건국대학에 갔을 뿐이었다. 당시 인우는 차갑고 까칠한 진철 보다는 후배를 다정하게 대해주는 다른 선배들을 잘 따랐다. 그들이 대체로 NL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스스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반미자주, 조국통일 등의 말을 입에 자주 담아서 그럴 거라 생각했다.

인우는 이거든 저거든 투쟁은 다 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선배들을 따라 집회며 시위에 참가했고, 그 날도 그저 다른 대학에서 열리는 흔한 연합집회 정도로 생각하고 건국대학에 갔다. 전국에서 3천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모여서 집회를 열었다.

시작부터 뭔가 이상했다. 경찰들이 학생보다 훨씬 많이 몰려왔다. 엄청난 수의 경찰들이 건국대의 모든 출입문을 막고 밀려들어오더니 학생증을 검사해서 건국대 학생이 아니면 학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며 건물 안으로 몰아 넣었다. 수천명의 학생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건국대 건물들 안으로 토끼몰이 하듯 밀려 들어가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라디오에서는 “좌경 용공 학생” 한 마디로 빨갱이 대학생들이 건국대학교를 점거하고 과격한 농성을 하고 있다고 나왔다. 아니, 농성이라니? 경찰들이 길을 다 막고 내보내주지 않아 갇혀 있는 것이지 이게 무슨 농성이란 말인가? 농성을 한다기 보다 농성 당했다라고 불러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세상에서는 몹쓸 빨갱이 학생들이 감히 대학 건물을 점거하고 과격한 시위를 하는 것으로 상황이 확정되어 버렸다.

학생들은 그렇게 사흘을 건국대학교 건물안에 쫄쫄 굶어가며 감금되어 있다 차례차례 연행되었다. 당연히 인우도 질질 끌려갔다. 이때 인우는 같이 연행된 다른 학생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 푹 숙이고 있을때 혼자 벌떡 일어나 당당하게 경찰에게 맞서다 그 댓가로 집단구타를 당했다. 그나마 1학년이라고 기소는 면했다.

나중에 들었다. 연행된 학생이 1500명이 넘고 1200명이 구속되어 단일 사건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구속자가 발생한 대기록을 세웠다고. 인우도 한 달 정도 구속되어 있다가 검찰에서 1학년이라고 봐준 것인지 몰라도 기소 유예로 처분하여 간신히 구치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출소하고 나니 그게 그렇게 죽기로 버티고 싸울 일이었나 하는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싸우긴 싸워야 하는데, 이렇게 싸우는 건 아닌데, 이런 생각으로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냥 모든 것이 허무했다.

이 모든 것을 진철이 한 마디로 정리했던 것이다.

우울.

그리고 이어진 진철의 말은 이랬다.

“그 우울, 커다란 꿈을 함께 꾸면서 녹여보는 것 어때?”

이 말에 인우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다정하게 굴던 선배들 중 누구도 인우의 우울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직 까칠한 진철만이 그 우울을 알아주었다. 그래서 진철이 소개하는 모임에 나갔다.

처음에는 학습이 좋아서 나갔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 그게 운동권 언더 조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인우는 남을지 나갈지 한참 고민해야 했다. 진철은 강요하지도 설득하지도 않았다. 결국 결심은 인우의 몫이었다.

인우는 그때 결단을 본인에게 맡긴 진철의 방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언더 팀은 1년 동안 충분히 생각하고 나름대로 싸움에 참가해 본 뒤 그 경험을 토대로 스스로 문제의식을 느끼는 그런 후배들을 찾아 스스로 결단할 시간을 주고서 꾸려야 한다. 그러려면 2학기 중간은 되어야 한다. 인우는 순진한 신입생들을 단지 조직 확대를 위해 꼬여낼(?) 생각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직 상부(?)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1학년 언더 팀 빨리 꾸리라고 성화가 대단했다. 엔엘이 벌써 각 단과대학 마다 신입생 써클을 박테리아 번식하듯 엄청나게 편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사범대 학생회장 선거때 NL쪽에서는 언제 그렇게 긁어 모았는지 1학년 30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문화 선동대를 동원해 요란하게 선거운동을 했다. 결국 신입생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엔엘 후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그 때 CA조직의 상부로부터(인우는 그곳에 대해 구체적인 것은 모른다. 그저 상부라 부를 뿐)에서 ‘1학년 전위조직 건설의 시급성에 대하여’라는 문건이 내려왔다.

인우는 반대했다.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다. 되는 대로 긁어 모은 애들이 어떻게 혁명의 전위가 될 수 있는가? 이런 논리를 내세우며 버텼다. 1학기는 그냥 넘겨 달라. 그 동안 눈여겨 보다 2학기 부터 서서히 도모하겠다. 이렇게 요구했고, 다행히 상부에서는 이 정도로 타협해 주었다.

이런 상황인데 아직 대학 첫 학기가 지나기도 전에 스스로 자신을 언더에 가담시켜 달라고 자청하는 후배가 나타났다. 인우는 이런 돌발 변수는 예상은 커녕 상상도 못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저 놈 혹시 경찰 프락치 아니야?”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경제학과 박연희 선배의 동생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신뢰감을 주긴 했다. 하지만 이름이 비슷하다고 꼭 동생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안기부나 경찰이 가르쳐 가짜 준 이름일 수도 있다. 설사 진짜 동생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믿을 수 없었다. 경찰이 연희 형의 형량을 낮춰주는 조건으로 동생에게 프락치 노릇 해 달라고 협박 혹은 회유 했을수도 있다.

짜증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병든 세상을 살다보니 영혼도 같이 병들었다. 후배를 무턱대고 의심하는 것, 이건 정말 낯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덥썩 받는 것 보다는 시간을 두고 보는 것이 답인 것이다. 의심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흥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후배를 위해서나 인우 자신을 위해서나 신중해야 했다.

인우 스스로도 자신이 선택하고 가고 있는 길에 대해 아주 떳떳하지 않았다. 인우가 가는 길, 연철이 데려달라고 하는 길은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신세 망치는 길이다. 자기 한 사람 신세만 망치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과 가족을 슬프게 만드는 길이다. 조선 시대 같았으면 비장한 각오로 “삼족의 목숨을 걸겠다.”라고 했을 그런 길이다.

“내가 선택한 길, 후회는 없다.”

애석하지만 인우는 이렇게 당당하게 외치고 선언할 자신이 없다. 아니, 오히려 후회했다. 후회 하지만 그 길이 옳기에 후회와 싸워가며 버티며 갈 뿐이었다. 그 동안 괴로웠다. 정말 괴로웠다.

아직 순진한 신입생들의 영웅심리를 자극해서 이런 길로 끌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기다려야 한다. 2학기 중반 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깨달을 때 까지.

게다가 윤리과의 성진이라는 녀석. 그 녀석의 정체를 도무지 모르겠다. 마르크스 저작을 독일어 원문으로 술술 읽고 다니는 신입생이라고? 아무리 독일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고 해도, 아버지가 유명한 진보지식인인 철학과 성훈 교수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쉽사리 납득되지 않았다.

성훈 교수 역시 안기부 따위 공안 기관의 압박을 많이 받는 분이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

‘맙소사. 이 따위 생각이라니?’

민주화 운동의 든든한 지원자로 존경받는 이 땅의 참 지식인을 두고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인우는 자신의 영혼이 병듦을 거푸 확인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인우는 영혼의 병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사랑하는 어머니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만들고 아버지를 그렇게 떠나게 만든 아들에게 무슨 온전한 영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막둥이 보아라.


이렇게 시작하는 어머니 편지가 떠오르지 않은 날이 없었다. CA 언더 조직에 가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 방학을 앞두고 온 편지다. 지우려 해도, 잊으려 해도 지울수도 잊을수도 없던 그럴수록 오히려 해마를 뒤흔들고 장기 저장장치에 본능처럼 새겨지고 말았던 편지.


어릴 때 부터 남달리 영특하고 의협심 많은 우리 막둥이. 네가 오죽이나 깊게 생각하고, 많이 고민하고 선택한 길이겠느냐? 엄마는 네가 너무도 마음이 올바르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볼수 있기에 차마 모른척 할 수 없어 그 길을 선택 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경찰이 다녀간 뒤 아빠가 너무 많이 놀라셔서 편찮으시다. 세상에 다시 없는 정의며 무엇이며 하더라도 효도가 그 모든 것의 근본이 아니겠니? 아빠를 생각해서라도 너의 그 끓어오르는 정의감은 조금은 참아줄 수 없겠냐?

데모 하지 말아 달라고는 차마 부탁 못하겠다. 엄마도 안다. 엄마도 너 같은 청춘이었으면 당장이라도 거리에 뛰어나가 소리도 지르고 돌도 던졌을 거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 주면 안 되겠니? 수천명의 학생들 중 하나 정도가 되어 스크럼 속에 묻혀 정의롭게 외치고, 나머지 시간은 착실하게 공부에 힘써주면 안 되겠니?

이제 겨우 1학년 2학기인데 벌써 좌경 용공 비밀조직 이런 이야기에 네 이름이 오르내리는구나.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벌렁벌렁 거려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 아빠는, 평생 아이들 가르치느라 남들 다 누리는 그런 것 하나 못 누리고 정년이 다 되어가는 아빠는 그만 혼절하여 몸져 누우셨구나.

아빠를 위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앞으로 한 눈 팔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렇게 한 마디 적어서 편지라도 보내 줄 수 없겠니?


인우는 그 편지를 여기까지만 읽었다. 그 다음 내용을 차마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머니가 쓴 편지니 버리지 않았지만 책꽂이나 책상 서랍 어딘가에 적당히 쑤셔두었다.

말하자면 반성문을 쓰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우는 절대 그런 글은 쓸 수 없었다. 국어 교사인 어머니의 글솜씨에 설득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몸져 누웠다는 아버지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인우를 회유하기 위해 반성문 한 줄 받아 내려 쇼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교장인 아버지는 예전부터 인우의 고집을 꺾기 위해 몸져 눕기 신공을 시전했었다. 다시 속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한 달 뒤 아버지가 덜컥 세상을 떠나버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인우는 끝내 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써 달라는 반성문 한 줄 쓰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지기 싫어서. 교육을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독재 체제의 관료인 아버지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조국과 민중을 위해 아빠한테 불효 하니 장하냐, 장해?”

아버지 장례때 큰 누나가 이렇게 비난했다. 아버지가 꼭 인우 때문에 쓰러진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경찰이 “서인우 여기 있습니까?” 이러며 영장 들고 쳐들어와서 이방 저방 뒤지고 다니거나 혹은 교육청에서 “서 교장 자식 교육 똑바로 못해?”라고 질책을 들었다거나 해서 뒷목잡고 쓰러진 것인지, 아니면 평소 지병으로 쓰러진 것인지, 그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인우는 누나의 비난에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인우는 아비 잡은 아들이라는 죄목을 스스로 뒤집어 썼다. 어쩌면 이는 언더 조직 활동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한 핑계가 필요해서였을수도 있다.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다시 서울에 올라와 조직활동을 더 열심히 했다.

“아빠로 모자라 엄마까지 잡으려 그래? 너 미쳤어”

누나가 거의 막말 수준의 비난을 퍼부었지만 인우는 오히려 조직 활동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이, 그래서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해방의 깃발이 휘날리게 만드는 것이 아버지에게 속죄하는 길이라 믿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 다른 한 켠에서는 후회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 말대로 아주 큰 싸움에만 적당히 참여하는 시늉하면서 진보적인 일반 학우 수준으로 활동 했다면, 아니 그런 척이라도 했더라면 아직 정정한 아버지를 만나 뵐 수 있었을 것이란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인우가 조직 활동에 선뜻 후배를 끌어 들일 마음이 들지 않는 배경에는 이런 원죄의식이 뿌리박고 있었다.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일에 가담시키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혹시 그 후배 집안에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자기 책임일 것 같아 무서웠다.

결국 인우는 진철의 자취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미리 이야기는 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다. 만약 박연철, 성진 이 녀석들이 인우에게 대답 못 듣고 진철에게 조직에 넣어달라고 이야기 하거나 하면 인우 처지가 난감해질 수 있었다. 중대한 사안을 조직에 은폐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려 했다는 신랄한 비판이 두려웠다.

그 신랄한 비판은 틀림없이 이유진 입을 통해 나올 것이다. 이유진은 불어 교육과에 다니는 86학번 여학생이다. 인우와 동기지만 이미 1학년 1학기 때 조직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언더에서는 선배 포지션이고, 조직내 영향력도 인우보다 훨씬 강했다.

더구나 이유진은 조직의 세를 키우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다. 인우가 굴러 들어온 인재를 연결 안하고 밀어냈다는 것이 유진 귀에 들어간다면? 그 다음 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면피. 결국 면피하러 가는 거다.’

이런 생각이 자꾸 머리를 두드리자 진철의 자취방 까지 가는 여정이 꽤나 힘들게 느껴졌다.

객관적으로도 꽤나 힘든 길이긴 했다. 우선 녹두 거리 위로 한 없이 뻗어 있을 것만 같은 콘크리트 오르막길을 계속 올라가야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멀면 멀수록, 지상에서부터 고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방세가 기하급수적으로 싸지는 지역 특성 때문에 가난한 학생들의 방은 주로 고지대에 몰려 있었다. 그 길은 여름은 물론 겨울에도 땀 흘리지 않고서는 다닐수 없었다. 여름에는 더워서 비오듯 흐르는 땀, 겨울에는 빙판 때문에 스며 나오는 진땀.

그렇게 힘겹게 등반을 마치면 고개 꼭대기 조금 못 미쳐서 허름한 집이 하나 나타나는데, 그 허름한 집에 진철의 자취방이 있냐 하면, 그건 아니고, 다시 그 집 마당 구석에 있는 무너지기 직전 꼴을 하고 있는 별채에 진철의 자취방이 있었다. 허름한 동네인 신림동에서 다시 더 허름한 꼭대기, 거기서 가장 허름한 집에서 다시 별채. 그래도 진철은 그 곳을 무려 ‘별궁’이라 불렀다.

별궁 문을 탁탁 두드리자 바로 문이 열렸다. 그런데 문이 열리며 나타난 얼굴은 진철이 아니라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대충 질끈 동여맨 여학생이었다. 다름아닌 인우에게 공포의 대상인 이유진이다.

인우는 유진이 진철 자취방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튀어 나왔다 해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한 두번 있는 일도 아니고 어차피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유진 역시 진철의 자취방에서 완전히 풀어져 있는 모습으로 있는데 인우가 찾아왔다고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할 타입도 아니었다. 동성 친구 혹은 남동생이라도 찾아온 것 처럼 태연하게 인우를 맞이했다.

“어, 인우야. 웬일로 이 높은 곳까지 힘든 발걸음을 다 옮기고?”

“뭣 좀 상의 할 일이 있어서.”

“아. 진철이 형 보러 왔구나. 난 또. 나 보러 왔다고.”

“내가 널 보러 왜 이리 오냐?”

“아, 얘기 안했나? 나 자취방 뺐어. 어차피 내 방보다 여기서 자는 날이 더 많은데, 돈 낭비할 필요 없잖아?”

“그래? 형은?”

“글쎄, 뭔가 회의 있다면서 나갔어. 지금 정세는 혁명을 예고하잖아? 엄청 바빠. 그러니까 뭔 일인지 몰라도 나한테 말하는게 어때? 서인우가 의혹에 빠지면 이유진이 풀어준다. 우리 그런 관계 아니었어?”

“싱거운 소리 그만 하고, 나 들어가도 돼?”

“당연하지. 들어와.”

유진이 문을 열어둔 채로 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더니 선풍기를 탁 소리가 나게 켰다.

“아니, 이 날씨에 선풍기도 안 틀고 있었어?”

인우는 얼른 방에 들어가 선풍기 바람을 제일 많이 얻어맞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나 대구 출신이잖아? 35도 이하는 더위 취급 안해. 오늘겨우 29도야.”

유진이 담배 하나를 쓱 빼어 물고 인우 옆에 털퍼덕 주저 앉았다.

파자마를 연상시키는 폭 넓은 7부 바지와 얇은 티셔츠 한 장 뿐인 지나치게 편한 차림이었다. 선풍기 바람이 불 때 마다 티셔츠와 파자마가 펄럭였고 가슴과 허벅지가 조금씩 보였다 사라졌다 했다.

유진이 담배 한 까치를 들이 밀었다.

“한 대 줄까?”

“아니. 나 안 피우는거 몰라?”

“아, 그랬지. 자꾸 깜박한다. 그건 그렇고 자, 말해 봐. 어차피 진철이 형한테 말하나, 나한테 말하나 마찬가지니까.”

유진은 언제나처럼 거침없었다. 인우는 유진이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저작은 거의 다 꿰고 있고, 이런 저런 상황에서 그들의 이론이나 어록을 끄집어 내어 적용하는 순발력도 뛰어났다. 진철이 3학년이고 카리스마 있는 남성이라 대외적으로 나서고 있을뿐, 실제 그 내용을 유진이 제공하고 있다는 것 역시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니 진철에게 하려고 한 말을 유진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이었다. 어차피 진철에게 말해 봐야 진철이 유진과 상의할테니.

“좀 황당한 일을 당해서.”

“황당한? 어떤?”

“윤리교육과의 어떤 87학번 녀석이 자기하고 친구를 언더 팀에 넣어 달라고 졸라.”

“과 학회로는 안 되겠던 모양이지?”

“과 학회 선배들을 무시하더라.”

그러자 유진이 별궁이 떠나가라 웃었다. 별궁이니 망정이지 본채였으면 집주인이 튀어 왔을 정도였다.

“야, 이웃 쪽팔리게. 뭐가 그렇게 웃긴데?”

“통쾌하고 신나서. 하긴. 웃을 일도 아니지. 머리 안에 우동사리가 든 게 아니라면 주사파 논리에는 안 넘어가지. 아니 넘어 갈 수가 없지. 잘 됐네. 뭘 고민해?”

“뭘 고민 하다니? 몰라서 물어?”

“모르겠는데?”

“1학년 팀 꾸릴 준비 안 되어 있는거 알잖아? 그 윤리교육과 두 명만 달랑 데리고 팀을 꾸려?”

“준비 안 되어 있다는 건 네 의견이지 조직 방침은 아닌 걸로 아는데? 오히려 진철이형 한테 사범대는 왜 1학년 언더 안 꾸리냐고 압박 들어오는 거 몰라?”

“알아.”

순간 인우는 자신이 완벽하게 을의 자리에 들어가고 말았음을 직감했다. 어차피 맞을 매 미리 맞는 셈이다. 그나마 조직원들 앞에서 공개 비판 받는 것 보다는 이렇게 파자마 차림으로 담배를 뻑뻑 빨고 있는 유진에게 사적으로 비판 받는 쪽이 더 편하다.

하지만 갑이 된 유진의 말투가 점점 신랄해졌다.

“그런데 서인우 학형. 지금 뭐 하고 있는거야? 오는 애 까지 마다하고? 둘 밖에 없는 게 문제라면 다른 과 애들까지 여기저기서 모아봐. 그게 네 역할 아니야?”

인우는 듣기 거북했다. 애들 모으는게 역할이라고? 물론 인우는 조직이 자신을 그런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이를 받아들인 상태긴 했다.

활동가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세가지다.

1. 마르크스 레닌 사상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현실을 분석하고 전망을 내는 이론적 능력. 이를 통해 당면 투쟁의 전략과 전술이 도출된다.

2. 전략 전술을 실행에 옮기는 강인한 투쟁력

3. 매력과 설득력 혹은 선전선동능력으로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영향력

이 중 인우는 1과 2에서 과락이었다. 영어나 독일어를 잘 못하니 어려운 좌파 이론서를 읽지 못했고, 번역서를 봐도 알쏭달쏭할 뿐이었다. 생각이 많고 신중한 성격 때문에 과감한 투쟁에 선도적으로 나서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이 인우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많은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여학생 비율이 다른 단과대학보다 월등히 높은 사범대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장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들으면 정말 기분 나쁘다. 심지어 동기생한테 그런 말을 듣고싶지는 않았다.

마침내 인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무슨 채화사야 뭐야? 아니면 무슨 신입생 유괴범이야?”

“미안, 미안, 그렇게 들렸다면 정말 미안. 하지만 어쩌겠어? 넌 매력 있거든. 86 활동가 중 너 처럼 인기 많은 애가 또 있을까? 다들 좋아하는데 어쩌겠어? 그렇다면 그게 우리 사업의 중요한 자원 아니겠어? 당연히 활용 해야지.”

“말이 그렇지 그게 어디 될 말이냐? 내가 무슨 연예인이야?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조직이 무슨 팬클럽이야?”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넌 팬클럽이 되었건 뭐가 되었건 애들 모으기나 해. 다음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나는 꼬셔라, 넌 세뇌하겠다 이거야? 고등학교 써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인생이 180도 바뀌어 버릴 수 있는 무서운 결단인데, 충분히 고민이나 경험도 하기 전에 낚으라고? 이건 정신적 유괴야. 유괴.”

“인우아. 그건 네 고집이야.”

“고집이 아니야. 내 경험에서 나온 믿음이지. 너도 알잖아? 나 1학년 때 NL이었던거?”

“그랬지.”

“왜 그랬는지 알아?”

“네가 들어간 동아리가 NL 성향이 강한 써클이었으니까.”

“잘 아네. 그런데도 넌 이게 신기하단 생각 안해? NL이 강한 과나 동아리 아이들은 결국은 NL이 되고 CA가 강한 과나 동아리 아이들은 결국 CA 되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민요 연구회 아리랑에 어떤 아이가 들어갔다고 하자. 그럼 우리는 당연히 그 아이가 우리와 같은 노선을 걷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잖아? 민속 탈춤반도 그렇고, 총연극회도 그렇고, 영화동아리 얄라셩도 그렇고. 반대로 동양사상 연구회, 기독교 학생회, 가톨릭 학생회 이런데 들어간 아이는 결국 NL 될 거라고 생각하잖아?”

“그런 경향이 좀 있지.”

“이게 말이 되냐고? 이건 의식화가 아니라 과선배나 동아리선배 정치노선을 비판 없이 주입식 공부 하듯 받아 들였단 뜻이잖아? 이렇게 주체성 없이 운동권에 들어서게 된 아이들이 진짜 활동가라고 할 수 있어?”

“뭐.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난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해. 1학년은 여러 노선들과 투쟁방향을 충분히 검토할 기회를 가져야 해.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하고. 그 다음에 스스로 옳다고 판단한 정치노선에 따라 정파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게 제대로 된 전위 활동가 아니겠어? 1학년 1학기 때부터 아무 생각 없이 우리 동아리가 CA니까 나도 CA 이런 식으로 줄줄 남의 뒤만 따라온 녀석 따위를 전위 활동가라고 불러야 하는 운동이고 혁명이라면 차라리 안하는 게 나아.”

“브라보! 미래의 총학생회장님다운 훌륭한 연설이야.”

“누구 맘대로 총학생회장이야?”

“네가 결정할 일은 아니야. 어쨌든 넌 결국 사범대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야 하고, 이건 반드시야. 그리고 경우에 따라 총학생회장이나 부총학생회장 후보로 선정될 수도 있어. 네 생각은 상관없어. 조직은 그렇게 보고 있어. 네가 가진 자원을 써먹어야 하니까.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우선 두 명이라도 좋으니까 팀 꾸려. 걔들은 주체성 있는 거잖아?”

“두 명으로 어떻게 팀을 꾸려?”

“그럼, 거기에 몇 명 더 집어넣자.”

“하던 얘기 반복된다. 난 애들 꼬시는 짓 안 한다니까.”

“그럼 어쩌자고? 스스로 판단한 애들이 제 발로 찾아 올 때까지 한없이 기다리겠다는 거야? 쓸 만한 애들 NL이 모조리 휩쓸어 가 버리고 나면? 아무리 후회해도 늦어.”

“유진아. 넌 왜 매사에 NL이랑 경쟁하려 들어? 우리 운동 목표가 NL 하고 쪽수 대결 하는 거야? 적이 대체 누구야? 전두환이야 NL이야? 넌 전두환 타도보다 NL하고 활동가 수 경쟁하는 데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아. 걔들이나 우리나 다 같은 운동권이야.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통전

[1]


동반자라고

.”

“아니야. NL은 주타방이 아니라 주공방이야.”

“징하다 징해.”

“네가 그렇게 나오다니 뜻밖인 걸? NL이 혁명을 앞당길 것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전선을 흐리멍텅하게 만들어서 혁명의 과실을 소부르주아들에게 넘겨버릴 거라고 생각해?”

“확실히 후자야. 그래서 내가 NL에서 나와 이리 온 거고.”

“그러니 한 명의 활동가도 NL에게 넘겨주지 않고 먼저 확보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혁명투쟁 아닐까? 응?”

인우는 순간 ‘아차’라는 감탄사를 내뱉을 뻔 했다. 또 말려들었다. 인우는 유진과 논쟁해서 한 번도 뜻을 관철시킨 적이 없다. 워낙 청산유수인데다 논리를 교묘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세미나 때도, 회의 때도 일단 유진이 자기 주장을 펴면 인우는 늘 방바닥이나 바라보곤 했다.

그래도 그냥 물러나기 억울해서 몇 마디 던졌다.

“그렇게 말하면 솔직히 할 말은 없어. 그래도…”

하지만 유진은 그 몇 마디 보탤 시간도 주지 않았다.

“네가 연초에 공언한 말을 번복할 수 없다 이거잖아?”

“맞아. 기억해 주니 고맙네.”

“걱정하지 마. 그 일은 내가 할테니까.”

“네가 한다고?”

“그래. 내가 1학년들 중 쓸 만 한 애들 골라 언더 팀 꾸릴 테니까 넌 아까 네가 말한 일을 해. 충분히 고민하고 결단한 애들 중심으로 팀 꾸려 보라고. 혹시 내가 꾸린 팀에서 멋도 모르고 선배 따라 가는 그런 애들이 있으면 잘 설득해서 더 깊이 빠지기 전에 나가게도 하고. 어때 이렇게 하면 문제 없지?”

“그건… 음, 정신적 유괴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

“그럼 합의 한거다.”

“우리 둘만 합의 하면 되는거야? 진철이 형, 유정이 누나, 명순 누나, 태민이 형, 그리고 진희, 희영이, 연지, 현자 다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일단 우리 둘, 그리고 진철이 형. 그리고 전체 모임에서 확정하자. 사실 너한테 좀 미안한 이야기긴 하지만. 음.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 하지 마.”

인우는 유진이 이상하게 말을 꼰다는 느낌이 들었다. 워낙 남모르게 일을 자꾸 벌이는 녀석이라 불길했다. 인우는 미리 기분 나빠질 준비를 하고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뭔데?”

“그 동안 내가 1학년들 몇 명 모아 놓았거든. 너한테 말 안하고 숨긴 것, 정말 미안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인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팀을 꾸리고 있었다? 분명 1학년 팀 꾸리는 일은 인우 과업으로 되어 있었는데, 당사자도 모르게? 그런데 이렇게 시치미 뚝 떼고 왜 1학년 팀 안 꾸리냐며 조직의 방침을 운운했다고?

결국 인우는 왈칵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워낙 타고난 목소리가 테너보다 조금 높은 고음역이라 강력한 분노를 전달하기엔 위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네 마음대로 할 거면 여태까지 한 이야긴 다 뭐야?”

하지만 유진은 태연히 인우를 따라 일어서더니 어깨를 쓰다듬고 토닥토닥 두드렸다. 결국 인우가 앙탈 부린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미안. 미안하다고 했잖아? NL에서 자꾸 세 늘리는 거 도저히 가만히 두고 볼수 없는데 어떡해? 너는 2학기나 되어야 1학년 팀 꾸리겠다며 넋 놓고 있고. 이러다 좋은 애들 NL한테 다 빼앗기겠다 싶고. 그래서 1학년 중 교투, 가투 현장에 자주 보이는 아이들 체크해 두고, 틈 날 때마다 만나 설득했어.”

“결국 네 말발로 애들 꼬셨단 얘기잖아.”

“내 말발에 미모까지 더했다고 할까? 아, 이건 농담이야.”

유진은 나름 농담까지 섞어가며 말하지만 인우는 결코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했다는데? 그냥 현황 파악이나 하고 맞춰 가는 수 밖에.

“그래. 네 말발과 미모로 얼마나 꼬셨는데?”

“한 서너 명. 참, 그 중 정난영도 있어.”

“뭐? 난영이도?”

잠잠해 지려던 인우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심하잖아? 난영이는 우리과 후배고, 더구나 내가 지도하는 학회에 있는데, 그런 애를 나한테 말도 안하고 따로 만나 언더 팀에 넣어? 사람 핫바지 취급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유진이 얼른 수습했다.

“난영이가 민요연구회 아리랑 회원이잖아? 걔는 내가 얘기 안 했어도 어차피 제 발로 우리 팀에 찾아올 애였다고.”

“아리랑 회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그렇게 단정해?”

“그게 현실이니까.”

유진이 분홍빛 감도는 탐스러운 입술에 담배 한 까치를 하나 더 빼어 물었다.

“그럼 우리과 명호는? 동아리가 동양사상 연구회라서 제외 한 거냐? 보나마나 엔엘이라서?”

“일단 그렇긴 하지만 명호 룸메이트가 제 발로 찾아 왔으니 조만간 명호도 우리 편에 들어오지 않을까?”

“젠장. 난 이런 게 정말 싫었다고.”

인우는 투덜거림 말고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유진이 입술을 동그랗게 만들며 담배연기로 링을 만들어 인우 얼굴을 향해 날렸다. 링이 조금씩 찌그러지더니 얄궂게도 하트모양이 되어 날아왔다. 인우는 손을 휘저어 하트를 흩어버렸다.

“하지 마.”

“인우야. 우리 인우야. 넌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적이야. 그게 너와 나의 차이야.”

“그래 그게 우리 차이야. 내가 인기있다고 했지? 그 비결이 뭔지 알아? 바로 그 차이가 내 인기의 원천이야.”

“나도 알아. 네 가슴에는 새로운 세상을 꿈 꾸면 먼저 그 꿈 꾼 세상처럼 살고 행동하라는 도덕적 요청이 있겠지. 하지만 나는 당장 승리할 생각밖에 안 해. 우리 처지는 한국은 커녕 이 관악 캠퍼스 안에서조차 민족주의 기회주의자들과의 노선 다툼에서 밀리고 있는 거야. 군사파쇼 부르주아에 맞설 진짜 싸움은 시작도 못하고. 알아 듣겠어? 엔엘이 지휘관 자리 모두 차지하고 우리는 졸병이야. 어떤 일을 먼저 할까? 응? 지휘관 자리를 차지해야 우리 작전대로 싸울 수 있잖아? 안 그래?”

“후우.”

인우는 아무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아 유진이가 자꾸 날려 보내는 담배연기 링을 한숨으로 날려버렸다. 방 안에 가득 찬 담배연기가 한숨에 밀려 이리저리 화려한 춤사위를 선 보이며 흩어졌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진철이 형은? 진철이 형은 네가 언더 팀 꾸리는 것 알아?”

“진철이 형 생각은 같은 과인 네가 잘 알텐데?”

“아니. 나 보다는 같은 방 쓰는 네가 더 잘 알 것 같아서.”

말을 뱉자 마자 아차 싶었다. 아무리 공공연한 사이라도 사생활에 대해 이렇게 빈정거리는 건 인우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은 행동이었다.

사과하려는 순간 유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정말 화가 많이 났구나? 인정해.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 잘되자고 한 일 아니야. 올바른 전망을 가진 혁명 정파의 세력이 빨리 커져 저 얼치기 민족주의자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 뿐이야. 인우 널 위한 일이기도 하고.”

이 말에 인우는 창자가 꼬였다. 몽둥이질 하면서 “널 위해서 하는 거야.”라고 말하던 고등학교 시절 폭력교사가 떠올랐다.

유진은 인우가 모르는 사이에 1학년들을 마구 ‘꼬셔서’ 언더 팀을 꾸렸고, 그 중 인우가 지도하는 학회 후배도 아무 말 없이 끌어갔다. 그러면서 “널 위해서야.” 라고?

“뭐가 날 위해서야?”

“내년, 네 선거.”

“내 선거?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리야 그게?”

“사범대 학생회장 아니면 총학생회장 선거 말이야. 아까 말했잖아? 조직에서 그렇게 본다고. 이번에 모은 애들이 네 손발이 되어줄 거야. 내가 아니라 네 손발이라고. 그런데 네가 그렇게 꽁하게 그러니까 마음이 편치 않아.”

유진이 그 큰 눈을 촉촉하게 만들어가며 이렇게 말하자 인우는 더 이상 골을 내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선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인우는 사범대 학생회장도 총학생회장도 출마하겠다고 말한 적 없다. 그런데 유진은 그것을 기정사실로 말했다.

어쩔 수 없다. 누나 말 대로라면 큰 불효를 감수하며 뛰어든 길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학생회장을 하라면 있는 힘껏 할 수 밖에. 당선 된 다음의 일이겠지만.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은 주제에 몸을 사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니 그야말로 끝장을 봐야지 어정쩡하게 할 수는 없다.

인우는 할 수 없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한테 꽁하지 않아. 현실이 너무 마음에 안 들 뿐. 엿 같은 현실이나, 이 엿 같은 현실이 싫어서 투쟁 하자는 사람들의 현실이나.”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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