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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1987년 2부 여름 3화 박연철 1

by 권재원

연철은 눈을 감았던 기억이 없지만 시계를 보니 잠들어 있었음이 객관적 사실로 확인되었다. 오후 네 시. 그러니까 무려 여덟 시간이나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꿈 한 자락 기억나는 것이 없다. 인간의 기억과 의식은 얼마나 얄팍한가?

죄책감이 밀려왔다. 고등학교 내내 하루 여섯시간 이상 자면 큰일 나는 걸로 알고 살았다. 그런데 무려 여덟시간, 그것도 밤이 되기도 전에 자고 말았다. 유한한 삶에서 비가역적인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다니.

놀랍게도 그렇게 잤는데도 아직 피곤이 남았다. 몸을 일으키자 마자 부위 부위가 좀 더 자야 한다며 비명을 쳤다. 비명을 묵살하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새로 이사 온 자취방은 깨끗하고 넓었다. 방 여러 개가 다닥다닥 붙어 눈치 보였던 이전 방과 달리 외따로 떨어진 방이라 좋았다. 외풍이 좀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았으니 그건 그때 생각하기로 하고.

어제 밤에 방들이를 했다. 윤리교육과, 역사교육과 친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소주병이 도대체 몇 병인지 모르겠다. 그냥 수 십 병이라고 하자. 이 병들은 투쟁의 무기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징발되었다. 이 광란의 밤은 해 뜰 무렵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니 밥상 위에 휘갈겨 쓴 메모가 있다. 글씨 꼬라지가 딱 봐도 명호 글씨다.

‘나 가투하러 간다. 안 들어오면 달려 간

[1]



알아라

.’

분명 광란의 밤은 둘이 같이 보냈는데 명호는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시위. 날마다 시위였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관우에게 3일마다 작은 잔치, 5일마다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4월 총학생회 발대식 이후 대학 생활은 잔치가 아니라 시위라는 것이 다를 뿐 딱 그 모양이었다. 3일 마다 교투, 5일 마다 가투.

박종철을 고문하여 죽인 정부가 고문 가담 경찰관 숫자를 조작하고 하위직 경찰관에게 모두 덮어 씌우려 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분노한 민심에 휘발유가 쏟아졌다. 시위에 참가하는 학생들 숫자가 눈에 띄게 불어났고, 학생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참여도 부쩍 눈에 띄었다.

연철도 명호도 교투며 가투에 부지런히 참가했다. 굳이 따지면 연철은 정근, 명호는 개근이다. 용케 둘 다 한 번도 연행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닭장차 내부는 구경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문제는 체력이다. 가두 시위는 종로 3가에서 종로 2가, 을지로 입구를 지나 시청 앞에서 다시 소공동으로 명동으로 점점이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냥 걸어다녀도 피로가 느껴질 거리를 소리를 지르며 구보를 하며, 그러다 백골단이나 지랄탄이 몰려오면 전력 질주도 해 가며 이동했다. 그러는 날 중에 방들이 한다며 광란의 밤까지 보냈다. 퍼지는게 정상이다.

연철에게는 명호가 이상한 녀석으로 보였다. 도무지 지치지 않았다. 하긴 고등학교 때 부터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었다. 100미터를 13초 이내에 뛰고, 1000미터를 3분 30초 안에 달렸으니. 교투며 가투가 연일 계속되면서 명호와 연철의 기초체력 격차가 두드러졌다. 연철은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뼈마디 구석구석 어디 한군데 쑤시지 않은 곳이 없다.

그렇다고 게으르게 뒹굴고 있는 건 연철의 성격상 차마 못 할 일이었다. 몸 쓰는 게 무리라면 머리라도 써야 했다.

책장을 둘러 보았다. 제목 안 보이게 포장지로 표지를 싼 책들이 가득했다. 전공서적은 거의 없다. 대부분 이념 서적들, 표면적으로는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다.

연철은 책장을 이리저리 뒤지다 ‘경제사 학습’이라는 작은 책자를 꺼냈다. 이미 여러차례 읽었던 책이다. 하지만 소설도 아닌 것이 읽을 때 마다 재미있고 새로운 영감을 주는 책이라 피곤할 때 딱 읽기 좋은 책이다.

연철이 책을 읽는 까닭은 납득되지 않는 세상을 사는 것을 견딜수 없어서였다. 해명이 필요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으니 스스로 찾아 해명해야 했다.

고등학교때 부터 그랬다. 아무리 어른들이 쉬쉬하고 언론이 침묵해도 전두환 일당이 광주 시민을 학살했다는 것은 이런 저런 통로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무리 학교에서 5.18은 무장공비가 침투한 광주사태라고 가르쳐도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은 적어도 호남지역 고등학생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물론 교사들에게도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철은 교과서에서 늘 강조하던 민주주의가 정작 이 나라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발생하는 인지부조화 때문에 괴로웠다. 아무리 교과서가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아무리 둘러대도 군사독재, 전체주의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외국 여행마저 금지된 폐쇄된 나라라는 것, 그러니 북한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이 마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습이 납득되지 않았다. 자유가 없는데 자유로운 척하고 민주가 없는데도 자기들의 뜻이 정치에 반영이라도 되는 줄 알고, 학생들이 고문당하고 구타당하고, 심지어 경찰이 여학생의 옷을 벗기고 성고문을 해도 애써 모른 척 하는 그 모습이 역겨웠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연철은 분노라는 감정에 휩싸여 싸움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분노라는 감정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면 투쟁의 방향이 시위를 진압하는 눈 앞의 경찰을 향하기 때문이다.

경찰, 더구나 군대 대신 끌려온 전투경찰이 무슨 죄가 있는가? 연철이 하고자 하는 투쟁은 집에 가면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버지일 평범한 이름 모를 경찰을 증오하고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내세우는 배후의 세력, 부정한 힘과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어째서 나쁜 놈들이 저 자리에 앉을 수 있고, 어째서 그런 권력이 유지되고 작동 되는지, 그런 통치자를 만들어내는 구조는 무엇이며 우리가 그들을 몰아내고 만들어야 할 세상은 어떤 것인지. 또 투쟁의 결과를 진인사대천명 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것을 현실화 시킬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는지 알고 싶었다. 투쟁은 분노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냉정한 마음으로 싸워야 함을 알기에, 싸우기 싫어도 나서는 그런 싸움이라야 했다.

연철은 이런 생각을 고등학교 때 부터 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생각일수도 있고, 고등학교 때 형이 집에 올 때 마다 한 두권씩 가져오는 책을 읽고, 또 형하고 이야기 하다 자기도 모르게 새겨진 생각일 수도 있다.

형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85학번이다. 지금은 어딘가에 숨어서 노동운동 한다고 하니 졸업할 마음도 가망도 없어 보였다.

형이 경제학과에 간다고 했을 때 막연히 돈 버는 방법을 배우나보다 했다. 심지어 형 덕분에 부자가 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방학이나 명절에 형이 집에 올때 마다 형이 가지고 다니는 책을 훔쳐 읽었다. 뭔가 돈 많이 벌 수 있는 비법이 있을 것 같았다.

책 제목은 미야카와 미노루가 지은 ‘경제원론‘이었다. 가장 기초적인 경제학 교과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돈 버는 방법은 없고 임금, 잉여가치, 자본주의 이런 말들만 계속 나왔다. 다른 책들을 펼쳐 봐도 마찬가지였다. 바란과 스위지가 저자로 되어 있는 ‘독점자본’, 코보무치 마사하키가 지은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 이런 책들.

살짝 반감이 들었다. 형은 왜 일본 사람 책을 이렇게 많이 보는 것일까? 쪽발이들 한테 뭐 배울 게 있다고. 하지만 그 보다 더 기분나빴던 것은 아무리 읽어 봐도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경제학이라고 되어 있는데 연철이 알고 있는 경제학과 전혀 달랐다. 명색이 경제학 원론이라는 책이 수요곡선, 공급곡선은 아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경제학이지?

그렇게 고민하다 형에게 들키고 말았다.

“너 지금 뭐 보고 있어?”

형이 급히 연철이 보던 책을 가로채듯 빼앗아 가방에 집어 넣었다. 연철은 변명하거나 사과하는 대신 오히려 질문을 했다.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책을 읽었는데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 상태로 남겨 둔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이건 대체 무슨 경제학이 이래?”

“당연하지. 이건 정치경제학이거든.”

“정치면 정치고 경제면 경제지 정치경제학은 또 뭐야?”

“경제현상을 경제만 뚝 떼어 보지 않고 사회의 전체적인 연관 속에서 파악하려는 학문이야.”

“그렇게 말하니까 더 모르겠어.”

“알아 들을 거라 기대 하지도 않았어.”

“그래도 가르쳐 줄 거지?”

그러자 형이 한숨을 푹 쉬더니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길게 이야기 했다.

“일반적인 경제학은 화폐와 상품만 따로 뚝 떼어서 다뤄. 마치 물리학에서 물체의 질량만 뚝 떼어 다루는 것 처럼. 하지만 물리학의 물체와 달리 경제학의 화폐와 상품은 스스로 운동하는 존재가 아니야. 실제로는 그것을 소유하고, 사용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것일 뿐. 그런데 사람은 물리학의 물체처럼 똑 같은 조건의 무심한 존재가 아니야. 화폐와 상품의 소유, 사용, 생산을 두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욕망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화폐와 상품의 이동과 변화만 수학적으로 아무리 정교하게 계산한들 그게 실제 우리 사회의 경제현상을 제대로 보여주겠냐고? 오히려 이런 경제학은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간의 갈등과 투쟁을 은폐하려는 수작에 불과해. 정치경제학은 상품과 화폐의 운동에 감추어진 계급간의 갈등과 투쟁, 이해관계를 드러내는 학문이야. 음, 이걸 지금 네가 이렇게 들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우선 쉬운 책들부터 읽어보는게 좋겠어.”

그때 형이 쉬운 책이라며 사준 책이 바로 이 ‘경제사 학습’, 그리고 존 헌트가 지은 ‘소유의 역사’였다. 연철은 그때부터 이 두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세번 정도 읽고 나니 뭔 소리인지 알게 되었다. 이후 이미 다 아는 내용이지만 읽을 때 마다 늘 새로운 재미를 주는 책이라 마치 봤던 만화 자꾸 보는 어린아이처럼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는 이 책의 핵심 논지를 바탕으로 나름의 의문이나 생각을 메모해 가면서 읽었다. 그 결과 책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공책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읽고 쓰다 보니 방이 어둑어둑해졌다. 6월에 이 정도로 어두워질 정도라면 저녁 여덟시가 다 되어간다는 뜻이다. 등이며 목이며 엄청나게 쑤셔댔다.

연철은 그대로 이부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지만 배 고프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철은 일어나기 귀찮아 누운 자세에서 소리쳤다.

“문 열렸어. 그냥 들어와.”

“알았다.”

명호나 진이가 왔다고 생각하고 반말로 소리쳤는데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어제 방들이 할 때 왔던 명호네 과 86학번 서인우라는 선배였다. 다른 친구들이 술 마시며 광란의 밤을 보낼때 진이와 혁명과 이론의 관계에 대해 한 시간 이상 토론하다 갔던 선배다.

윤리교육과 답게 연철은 황급히 몸을 세워 예의를 차렸다.

“앗, 인우 형. 안녕하세요? 미안합니다. 명혼줄 알고.”

서인우가 오히려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긁적 했다.

“어이쿠, 나도 미안. 명호 있는 줄 알고 불쑥 들어왔네.”

“괜찮아요.”

“명호는?”

“싸움 나갔어요. 명동이라던가 종로라던가? 뭐 어디든 도심 나가면 결국 가투가 붙겠죠.”

“어이구! 그 자식. 넌? 둘은 젓가락처럼 붙어 다니잖아?”

“그게요, 명호는 쇠 젓가락, 전 나무 젓가락이죠.”

“하하하! 비유 한 번. 지쳐 뻗었구나?”

“예.”

“그래도 학습은 열심히 하고 있네?”

인우가 밥상 위에 펼쳐진 경제사 학습 책을 슬쩍 봤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요.”

“그래도 쉴 때는 쉬어야지? 그것도 투쟁이야. 휴식투쟁. 하하! 말이 헛 나왔나?”

“그 말도 맞아요. 그런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김명호의 절친이 부탁하는데 당연히 되지. 뭐든 해 봐. 4. 13 호헌 지지 이런거 말고.”

“사회과학 공부하는 팀 소개해 주세요.”

“내가? 윤리교육과에도 선배 있고 학회 있잖아?”

“있긴 다 있죠. 하지만 뭔가 부족해요.”

“어떤 점에서?”

“전망이 없어요.”

“전망이 없어? 음. 그게 뭔 소리야?”

“우리 과 선배들은 이 사회가 모순 투성이라며 분노를 일으키려는 의도가 뻔히 보여요. 그런데 그게 어떤 모순이며, 어디서 비롯된 모순이며, 그것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대답 못하더라고요.”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연철은 의심스러웠다. 이런 물음을 과연 자신보다 겨우 1년 먼저 대학 들어온 스무살 짜리가 대답할 수 있을까?

“아, 윤리과 친구들이 좀 감성적이긴 하지.”

“어떻게 보면 그 때 그 때 건수 생기면 거기 따라 열심히 싸우면 되지 뭐 이러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전 과에서 선배들이 아니라 동기생한테 배웁니다.”

“아, 성진이라고 하는 이론가 친구?”

“네. 그런데 둘이서 뭘 하겠어요? 그래서 올바른 싸움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선배가 필요해요. 우리 과는 틀렸어요.”

이 말을 듣자 마자 인우의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표정이 싹 사라졌다. 대신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나타났다. 인우가 붉은 소용돌이 치는 눈으로 연철을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하필 나야?”

“형이 가장 훌륭하니까요. 인우 형 모르는 학생 어디 있어요? 작년 건국대에서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라고 할 때 혼자 당당하게 손 들었던 이야기, 사범대 전설이잖아요?”

“하하. 내가 그랬나? 난 겨드랑이가 가려워 긁으려다 그만 손 들어 버린건데….”

다시 인우가 얼굴을 장난스럽게 바꾸고 쑥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연철의 눈에는 급히 얼굴을 감추기 위해 하회탈 하나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감추어도 연철은 인우가 단지 과 학회 수준에서 활동하는 운동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틀림없이 지하조직 활동가다. 지하조직 활동가를 형으로 둔 덕분에 연철은 지하실 냄새를 잘 맡았다.

“형은 혼자가 아니잖아요?”

빙글빙글 돌려 말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연철이 바로 본론으로 찔러 들어갔다.

“혼자가 아니라니?”

“이미 짐작하고 있어요. 숨기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너무 무례한 말을 했다 싶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치 안기부나 치안본부 대공분실 같은 곳에서 “네가 단지 과대표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 배후 조직이 있잖아? 다 아니까 불어.” 이렇게 말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인우의 얼굴이 다시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돌아가더니 연철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연철은 장난스러움과 진지함 사이를 이렇게 손쉽게 오가는 인우의 얼굴이 신기하고 두려웠다.

“너, 과, 학회, 동아리 말고 다른 조직에 대해 말하는 거냐?”

“예.”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예.”

“신중하게 생각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어. 객기나 영웅심리 같은 거라면 그만두고.”

“충분히 생각했어요.”

“그 친구는? 성진?”

“진이요?”

새삼스럽게 연철은 성진을 알게 된 것이 겨우 석 달 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마치 알고 지낸지 3년은 되는 것 같다. 진이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지난 석달이 마치 삼년같이 느껴져서 그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성진이라고 합니다. 아, 성은 성이고, 이름은 진입니다.”

진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연철은 재미있게 생긴 녀석이네, 얼굴 절반이 코야, 이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부터 이어지는 말이 연철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저는 실천철학을 하고 싶어서 철학과 대신 윤리교육과를 지망했습니다. 사변철학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세계의 변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결핍된 것은 사유가 아니라 행동이며,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학입니다.”

놀랍고 반가웠다. 연철 역시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윤리교육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심을 같이하는 동기를 만나지 못했다. 신입생 대부분은 일단 서울대 붙고 보자 해서 들어왔거나, 국영수 다음으로 교사 자리가 많이 나서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녀석들은 윤리교육과가 아니라도 점수가 맞으면 어디라도 갔을 녀석들이고, 국어교육과, 영어교육과에 합격할 수 있다면 얼쑤 좋다며 달려갔을 녀석들이다. 그런데 철학에 관심있는 동기생을 만났으니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연철은 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객관적으로 사실을 진술하자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이야기는 주로 진이 했고, 연철은 주로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성진은 과 학회 세미나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진이 과 학회에서 기껏 ‘철학 에세이’, ‘세계 철학사’ 따위나 읽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세미나 끝나고 자유토론이나 뒷풀이 하는 시간에는 꼬박꼬박 나타났다.

그때 마다 연철은 세미나 하는 동안 선배들도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지 못해 어물거렸던 내용을 진에게 물어보았고, 진은 아하 내가 왜 그걸 몰랐지 하고 이마를 때릴 정도로 쉽고 간단하게 그 의미를 풀어 주었다. 뜻풀이만 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때로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 엉터리라며 신랄한 비판도 곁들였다.

“이건 완전히 헛소리야. 변증법을 이런 식으로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안돼. 이건 엥겔스가 완전히 오해한 거라고.”

이 말에 연철은 소름이 끼쳤다. 엥겔스라는 이름은 그 자체 진리에 대한 보증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트교 신자가 “사도 바울이 한 말 중 이런 이런 말은 엉터리야.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오해한 거라고.”라고 말 듣는 기분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성진이 세미나 끝나고 뒷풀이 가기 위해 가방을 싸던 연철에게 반경 30 센티미터 안에서나 간신히 들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답답하지?”

“답답?”

“변증법을 몇 개의 원리로 바꿔 놓고 대충 그거 암기 했으면 다음은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에서 열 받는 장면들에 대해 읽으면서 미국놈 몰아내자, 일본놈 몰아내자, 갈라진 조국 강산, 외세 앞잡이 군사파쇼 매판자본 몰아내자 와아, 이러면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하는 선배들 말이야.”

이건 당시 연철이 느끼고 있던 답답함과 위화감을 압축한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연철은 진이 했던 이 말을 떠올리자 이글거리는 인우의 눈 을 피하지 않고 대답할 자신감이 생겼다.

“진이 생각이기도 합니다. 진이도 저와 같이 할 겁니다.”

“진이 생각이라고? 진이 뭐라고 했는데?”

“NL과 CA, 다 틀렸다. 하지만 그래도 CA 쪽에 미래지향적인 전망이 있다. 혼자 할 투쟁이 아니라 조직을 통해서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그래도 차선책으로 CA 에 가담 하겠다.”

“둘 다 틀렸는데, 그 나마 좀 낫다. 하하하. 재밌는 녀석이네. 그건 그런데 넌, 이 얘기를 왜 나한테 해?”

“인우형이 CA 니까. 아닌가요?”

“내가? 누가 그러디?”

“대통령 직선제 쟁취라는 슬로건을 따라 외치지 않는걸 보고 알았어요. 그리고 방들이 때, 우리 과 선배들이 형하고 서로 알기는 알고 있는 사이인 것 같은데도 껄끄러워 하는 것 보고 다시 확인했고요. 우리과 선배들은 주로 NL이니까.”

“하하. 이거 참.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너 지금 NL 이니, CA 니 하는 것이 뭔지나 알고 얘기하는거냐?”

“물론이죠. NL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주의 계열이고, CA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것 정도 알아요.”

“너 그런 걸 어디서 들었어? 그것도 진이한테?”

“고등학교 때 형이 말해줬어요. 경제학과 85학번.”

“경제학과, 가만 가만, 혹시 네 형이 박연회?”

“네.”

“아, 그렇구나.”

인우의 이글 거리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연철은 형의 이름이 경제학과 범위를 넘어 사범대학에까지 그토록 강력한 신뢰의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고향에서 형의 이름은 두려움과 불안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박연회 여기 있지?”

이게 연철이 다른 사람의 입으로 형 이름 석자를 들었던 가장 강력한 기억이었다. 작년 이맘 때 형사들이 이런식으로 소리치며 구둣발로 집안에 그야말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무진장 지역의 산골 경찰들과는 눈빛이며 말투부터 아주 달랐다. 자기들이 경찰이라고 말했을 뿐 어디 소속의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여? 당신들 어디 소속이여? 영장 내놔 봐.”

부모님이 이러며 가로막았지만 그 정체불명의 사내들은 가로막는 부모님을 떠밀치며 집안을 온통 난장판을 만들었다.

“아이고, 이 놈이 기껏 서울대학까지 보내 놨더니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녀 순사들이 눈이 벌게 가지고 찾아다닌다냐?”

어머니가 책이며 속옷이며 양말이며 온갖 물건으로 엉망 진창이 된 형 방에 주저 앉아 방바닥을 두드리며 한탄을 했다. 하지만 연철은 형에 대한 원망보다는 경찰인지 뭔지 모를 그들의 횡포에 대한 분노가 훨씬 강했다.

남은 분노는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을 향했다. 어째서 어른들은 권력에게 부당한 일을 당하면 가해자에게 분노하는 대신 빌미를 만들었다며 희생자를 원망하는가? 분노 대신 원망, 의지 대신 한, 이게 민족성이라도 되는 걸까?

그런데 지금 연철 앞에는 경찰이 아니라 서인우 선배가 있다. 자신의 형, 박연희의 이름을 무한한 신뢰를 담아 말하는 선배가 있다.

연철이 인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형이 대답할 차례예요.”

하지만 인우가 고개를 푹 숙이며 한 대답이 연철의 맥을 쭉 빼 놓았다.

“미안하다.”

“네?”

“지금은 뭐라 말 못하겠다. 빠른 시일 안에 꼭 연락하마. 미안, 또 만나 볼 사람이 있어 좀 가 봐야겠다.”

그리고는 마치 형사가 쫓아오기라도 하는양 후다닥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가 너무 급하게 들이댔어.”

연철은 이렇게 어색한 결말을 정당화 했다.


[1]1980 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 가두시위(가투)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어가는 것을


달려갔다는 은어로 표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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