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장편소설 2부 여름 2화 오수현 2

by 권재원

수현은 제대로 된 장소에서 데이트 분위기를 내고 싶었지만 자그마한 시골 읍내에 그런 곳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허름한 2층 건물에 있는 중국집이 그나마 최선이었다. 그래도 들어가 보니 가게가 깨끗해서 마음이 놓였다.

“뭐 먹을까?”

“볶음밥.”

“여기요, 볶음밥 둘 주세요.”

오석이 물 주전자와 컵을 들고 오던 아주머니에게 말하자 아주머니가 알았다는 듯이 주전자와 컵 두개를 내려놓고 주방을 향해 어슬렁 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서울 같았으면 저 보다 세배 이상 빠르게 걸었을 것이다. 아니면 주방을 향해 “볶음밥 둘!” 하고 소리를 쳐서 최대한 빨리 주문을 전달하거나.

그런데 여기서는 시간 자체가 어슬렁 어슬렁 흘러가는 것 같다. 수현은 아인슈타인이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한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물론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만.

수현의 인생은 늘 빠른 시간으로 흘렀다.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할 때 까지 1등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공부 계획으로 가득 찬 빈틈없는 시간을 살았다. 시간은 늘 부족했고 늘 빨리 달렸고, 빠를수록 더 빨리 달렸다. 대학 들어와서야 수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슬렁거릴 수 있는 시간을 만났다.

문제는 오히려 그게 수현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독일 문화의 이해’라는 수업에서 “독일인들은 걱정거리가 없으면 걱정거리가 왜 없는지 걱정한다.”라는 속담을 들었는데, 수현은 이 말이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느껴졌다.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10년만에 처음 ‘남는 시간’이라는 것이 생기자 수현의 무의식은 그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미완수 과업’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시간이 남을 리가 없어. 내가 빼먹은 것이 있을 거야.’

수현은 시간이 남을 때 마다 이런 생각이 머리 속을 활퀴고 다녀 견딜 수 없었다. 뭐든 공부 할 것을 찾아 채워야 했다. 그래서 토플, 파스칼, C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에 유학을 가고 싶다거나 프로그래머가 되어야만 하겠다는 등의 목표는 없었다. 독일과 관련된 무엇을 할 생각으로 지금 이 과에 들어온 것이 아닌 것과 비슷했다.

수현이 보기에 집회, 시위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데모하는 학생들, 학회 활동 열심히 하면서 이념서적 공부하는 학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갑자기 비어 버린 시간을 견디지 못해 뭐라도 해야겠기에 그러는 것이다. 갑자기 비어버린 시간이 주는 그 텅 빈 공황상태,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 그런 면에서라면 수현도 그들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불안한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각자의 자유이며 서로 가치평가하고 재단할 이유도 권리도 없다. 이게 수현의 생각이었다. 수현은 집회, 시위, 이념서적 탐독 등과는 다른 방식으로 불안한 공허를 채울 것이다.

물론 전두환, 노태우가 나쁘다는 것, 우리나라가 국민윤리 시간에 배운 것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수현이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년부터 주어지는 투표권을 정당하게 행사함으로써 실천할 것이다.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천의 수위를 어느 정도까지 할 것인지는 각자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정체가 모호한 이념으로 사람을 재단하고 길거리에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행동에 참가하거거나 그런 행동에 찬동해야만 그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을 그럴 이유는 없다. 그들을 좌익폭력세력이라고 손가락질 할 마음도 없지만,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 받을 이유도 없다. 이게 수현의 생각이다.

“무슨 생각해?”

오석의 목소리가 생각에 빠진 수현을 깨웠다. 어슬렁 어슬렁 걷는 아주머니 때문에 잠시 넋나간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갑자기 생긴 수현의 공허한 시간을 오석이 많이 채워주고 있다. 같이 걷고, 이야기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토플공부, C공부 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이럴 수가? 대학 들어온지 불과 반년 만에 남는 시간의 거의 절반을 남학생과 노는데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신의 변화에 수현은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당장 오늘만 해도 그렇다. 오석이 알던 여자 아이, 여자친구 조차 아니었던 아이 무덤까지 따라왔다. 이거야 말로 엄청난 시간 낭비가 아닌가?

“너무 놀라서.”

“뭘?”

“남자 친구가 좋아했던 여자애 성묘하는데 따라 온 나라는 여자애한테.”

“그러게. 아무리 생각해도 좀 그러네. 미안해. 이런 데 오게 만들어서.”

“여자애라는 건 몰랐지만, 내가 먼저 오자고 했는데 뭐. 걱정 마. 내가 죽은 사람 질투할만큼 속 좁은 애로 보이니?”

“아니.”

수현은 이야기 흘러가는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질투라는 말을 왜 꺼냈을까? 수현은 질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겪어보지도 못했다. 6년간 여중, 여고를 다니면서 연애는 커녕 남자 자체를 만나지 못했는데 질투는 무슨 질투?

6년 내내 일어나자 마자 학교 가고 학교 끝나면 독서실 가서 공부하고 달과 별을 벗삼아 귀가하는 생활만 반복했다. 환경조사서 종교란에 ‘불교’라고 적었지만 절에 다닌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알고 지낸 남자는 아빠 아니면 선생님들 뿐이었다.

‘나만 그런 거 아니야.’

수현은 늘 이런 마음으로 자위했다. 여중, 여고 다니다 관악산 자락에 있는 이 삭막한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은 거의 다 처지가 비슷할 것이니까. 정상적인 소녀생활을 하고 들어올 수 있는 학교가 아니니까.

문제는 오석과 가깝게 지내고는 있지만, 이게 연애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이 있으면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기고, 헤어져 각자 집으로 갈 때는 너무 아쉽고, 아침에는 학교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 기대되기는 했다.

하지만 수현은 자꾸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했다.

“이게 연애 맞아? 첫사랑이라면 애틋하고 짜릿하고 환상적이고 그래야 하는거 아니야? 이건 너무 밋밋한 거 아니야? 그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쿵쿵 거리고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그 얼굴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런 열병 같은 감정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억울했다. 단 한 번 뿐인 첫사랑을 친구인가 애인인가 긴가민가 이러다 말아야 하다니. 그래서 수현은 아직 연애가 아닌 것으로 규정했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연애일까? 수현은 할리퀸 로맨스에서 한결같이 연애의 축포처럼 묘사하는 키스를 그 경계로 정했다. 아직 키스하지 않았으니 오석과의 관계는 연애가 아니다.

그런데도 오석이 다른 여학생들하고 같이 있는 걸 보면 기분 나빴던 건 왜일까? 다른 여학생들하고 있으며 웃는 모습 보이면 버럭 화가 치밀어 오르기까지 한 까닭은 무엇일까? 심지어 ‘어떻게 내가 없는데 즐거울 수 있고, 내가 아닌 다른 아이들과 웃을 수 있지? 심지어 여자 아이들과?’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수현은 동기 여학생 여섯 명 중 특히 주민경, 장하영 두명이 오석 근처에 있는 것이 싫었다. 하필 오석은 다른 여학생들과는 별 대화도 교류도 없었지만 저 둘과는 꽤 친하게 지냈다. 그건 수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여학생들이야 오석과 이야기를 나누건 같이 웃건 별 느낌 없었다. 남녀 공학 학교에서 오석더러 수도승처럼 지내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저 둘만 아니라면. 저 둘은 수현이 가지지 못한 장점을 적어도 하나 이상씩 가진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주민경. 그야말로 강남 아이다. 오석과 물리적으로 가까운 -걸어서 15분 거리라고 했다- 공간에 살고 문화적으로도 불광동 사는 수현이 공유할 수 없는 강남 아이만의 뭔가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셋이 이야기를 하면 둘이 주로 이야기 하고 수현이 슬그머니 밀려나는 그런 상황이 의외로 많았다. 공통의 공간, 공통의 경험이 만드는 무형의 장벽이 존재했다. 그 장벽은 주로 경제적인 형편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민경은 옷, 신, 가방 모두 수현과 차원이 달랐다. 하나 같이 교사 월급으로 네 자녀 주렁주렁 먹여 살려야 하는, 중산층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수현네 집에서 꿈도 못 꿀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석도 입학 첫 날 부터 꽤 튀는 복장으로 다녔다. 반짝반짝 하는 새 블레이저, 자켓, 구두 등을 입고 다녔으니. 수현은 오석 말고는 블레이져, 자켓, 구두 차림의 남학생을 보지 못했다.

오석과 민경, 둘은 금방 친해졌고, 등하교를 같이 하는 날도 많았다. 수현도 처음에는 그게 자연스러워 보였는데, 오석과 관악산 간 뒤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오석에게 수업 끝나면 바로 집에 가지 말고 8열람실에서 공부하자 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민경 혼자 하교 할테니까. 점심도 자연스럽게 사범대학에 있는 4식당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가까운 학생회관 식당으로 유도했다. 결국 오석은 수업 시간 외에는 민경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장하영. 더 거슬리는 아이다. 민경이 수현이 가지지 못한 부유한 환경을 가졌다면 장하영은 한 마디로 예쁜 아이기 때문이다.

입학하고 첫 두달 동안은 그렇게 티가 나지 않았다. 도수가 엄청나게 높은 안경을 쓰고 다녀 크고 예쁜 눈이 있는 부분이 굴절 실험하는 비이커 처럼 왜곡되어 보였다. 남루한 차림새도 한 몫 했다. 옷, 신, 가방 모두 고등학교때 것을 계속 쓰는 것으로 보였는데, 고등학교 때도 새 것이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5월부터 하영이 꾸미기 시작했다. 좋은 아르바이트를 구하 모양이었다. 가방이 바뀌고, 새 옷을 입고, 마침내 안경을 벗고 콘택트 렌즈를 하고 다녔다.

하영이 안경을 벗자 크고 예쁜 두 눈이 공개되었고, 남학생들이 열광했다. 사범대학 5대 미인이니, 3대 미인이니 하는 객쩍은 농담의 소재가 되었는데,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5월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수현의 마음에 짚이는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교양체육 수업때의 일이다. 교양체육은 한 학기에 두 종목을 배우게 되어 있는데, 3, 4월 종목은 테니스였다. 같은 과에서 자기 테니스 라켓이 있는 학생은 오석, 민경, 수현 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비치된 오래된 우드 라켓을 사용할 때 셋만 가벼운 그라파이트 라켓을 가지고 다녔다. 심지어 민경은 이 수업을 위해 새로 산 것으로 보이는 윌슨 라켓을 들고, 역시 이 수업을 위해 따로 쇼핑했을 테니스 스커트 차림으로 나타났다.

테니스를 쳐 본 학생도 이 셋 뿐이라 다른 친구들이 가장 기본적인 자세 연습, 벽치기 연습을 할 때 셋은 교수까지 끼워서 복식 시합을 했다. 수현은 당연히 오석과 팀을 이루었고 교수와 민경이 팀이 되어 쳤다.

즐거운 체육 시간이었다. 오석은 테니스가 능해서 가끔 교수가 깜짝 놀랄 만한 나이스 샷을 날리기도 했다. 민경도 그 스커트를 나풀거리며 깡총깡총 잘도 뛰어 다녔지만 막상 체력이 별로라 결국 수현-오석 조가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수현은 중고등학교 내내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체육이었는데, 3, 4월 두 달은 체육시간이 모든 수업 중 제일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중간고사가 끝나고 교양체육 종목이 포크 댄스로 바뀌었다. 수업 장소도 경영대 뒤에 있던 테니스 코트에서 버들골 잔디밭에 있는 노천강당으로 바뀌었다.

강사는 한 눈에도 춤 좀 출 것 같이 생긴 여자였는데,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포크 댄스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민속 무용이죠. 탈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덩실덩실 어깨춤도 다 코리언 포크 댄스죠. 하지만 여러분이 앞으로 같이 배울 포크 댄스는 유러피언 포크 댄스입니다. 유럽 민속 춤의 특징은 아시겠지만 남녀가 짝을 맞춘다는 것입니다. 물론 라인 댄스 같이 안 그런 경우도 있지만, 기왕이면 짝 맞춰서 추는 춤 중심으로 배워볼까 합니다. 그래서 오늘 파트너를 추첨합니다.”

수현은 파트너를 정한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오석을 생각했지만, 추첨이라는 말에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모든 것을 하늘에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석이 성이 권씨라 학번이 앞이라 먼저 추첨하게 되었는데 하필 장하영을 뽑았다. 수현의 눈치를 슬쩍 보긴 했지만 오석의 얼굴 빛에서 좋아하는 기색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수현은 괘씸하고 분했다.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장하영의 파트너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오석 만큼은 그래서는 안되었다.

수현은 어느 덜떨어져 보이는 너디한 공대 학생의 파트너가 되었다. 공대생이 사범대 수업을 일부러 수강신청 했을 때는 그 속이 뻔히 보이는 법인데, 그 학생은 수현이 파트너가 되자 입이 귀에 걸리면서 노골적으로 좋아했다. 수현도 여학생들 중 꽤 예쁜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반면 수현은 몹시 화가 났다.

오석이 하영과 마주보고 빙빙 도는 모습이 잘 어울려 더 화가났다. 물론 오석은 민경과 있을 때도 잘 어울렸다. 그래도 그때는 편안한 오누이 처럼 보였다. 그런데 하영과 있을 때는 정말 무슨 일인가 일어 날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수현은 이 따위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오석이 첫사랑의 대상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이 감정이 질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첫질투. 맙소사 첫사랑보다 첫질투가 먼저라니.

이때 수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랑은 애매모호한 감정이지만 질투는 명확하고 날카로운 감정이라는 것, 사랑의 달콤함 보다 질투의 쓰라림이 훨씬 더 강렬하다는 것.

“무슨 생각해?”

오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현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뭐라고 빨리 둘러대야 하는데 머리속 생각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대답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얼떨결에 튀어나온 말. 아아, 최악이다. 이렇게 대충 얼버무리고 나면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고 침묵의 시간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춘 남녀가 마주보고 앉아서 어색한 침묵이라니.

중국집 아주머니가 구세주가 되었다. 볶음밥 두 그릇을 들고 와서 딱히 흠잡을 데는 없지만 그렇다고 결코 친절하지는 않은 동작으로 탁 내려놓은 것이다.

수현에게 드디어 할 말이 생겼다.

“고마워. 잘 먹을게.”

눈웃음을 지어 보여주고 일단 밥부터 먹었다.

아까 배고프다고 한 말은 절대 빈 말이 아니었다. 수현은 정말 배가 고팠다. 전투적으로 숟가락을 놀리며 부지런히 볶음밥을 입에 퍼 넣었다.

그런데 오석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지 아니면 입맛이 없는지 그야말로 숟가락을 깔짝깔짝 놀리기만 하다 절반 정도 남겨두고 내려 놓았다.

“왜 그래? 어디 안좋아?”

“아니. 아침을 좀 많이 먹어서 배가 안 고파.”

“그래? 난 아침을 안 먹어서 배가 많이 고파.”

수현은 오석이 남긴 볶음밥 중에서 절반을 슥 쓸어 자기 그릇에 옮겨 담았다.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 치우고 나서야 슬쩍 고개를 들어보았다. 오석이 뚫어지게 보고 있다.

“식사하는 숙녀 그렇게 보는 건 무슨 매너야? 나 밥 먹는 게 재미있어?”

수현이 쏘아 붙였다. 생각해 보니 숙녀가 신사가 남긴 밥을 쓸어담아 먹는 것도 좀 이상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뭐?”

이때 갑자기 오석의 손이 쓱 뻗쳐온다. 수현은 순간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저 손 끝이 어디로 올까? 뺨? 턱? 그런데 하필 이런데서? 무드가 영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석의 손가락이 입술 바로 옆에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무릎이 부르르 떨렸다.

그게 전부였다. 수현이 눈을 떠 보니 오석이 밥풀 하나를 냅킨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이게 묻어 있어서.”

수현은 그만 온 몸의 긴장이 다 풀려버렸다. 너무 허무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억울해서라도 오늘 일정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게 되었다.

“이제, 어디 갈래?”

먼저 운을 띄웠다. 그랬더니 오석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글쎄. 여긴 너무 시골이다. 음. 이건 어때? 너희 동네가 가까우니까 거기 가서 좀 찾아 볼까?”

하지만 수현에게 별로 좋은 생각으로 들리지 않았다.

“불광동도 어차피 뭐 없긴 마찬가진데.”

“아니, 그.”

오석이 우물쭈물했다. 이때 수현의 입에서 깜짝 놀랄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집 갈까?”

어라? 왜 이 말이? 수현은 도대체 이 말이 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이다.

“뭐? 그건 좀.”

오석도 깜짝 놀랐다. 수현은 서둘러 수습할 말을 찾았다.

“너 피아노 친단 말 들어서.”

던져 놓고도 수습이 될지 미심쩍었다. 과연 이 말이 먹힐까?

그런데 먹혔다. 오석의 표정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정우랑 친구다 보니 어깨 너머로 배운 것도 있고.”

“그래서 한 번 들어보고 싶어.”

“너희 집에서? 어머님이 이상하게 보실텐데?”

“걱정 마. 친구잖아? 친구 집에 놀러도 못 와?”

이렇게 둘러대자 오석이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원당에서 불광동 가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원당 시장 정류장에서 서울 서부 버스 터미널 가는 시외버스만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으니까. 버스 배차 간격도 비교적 짧은 편이라 거의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었다.

텅빈 버스 제일 뒷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다른 자리는 한 칸 씩 앉는 자리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도로 사정이 나빠 버스가 통통 튀었다. 제일 뒷좌석에 앉은 승객이 튕겨져 나갈까 걱정될 정도였다. 수현은 그 때 마다 반사적으로 오석의 손을 잡았다. 오석도 수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불광동 까지 가는 30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이리 와.”

서부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린 수현이 오석의 손을 잡고 길을 이끌었다. 슬쩍 오석의 얼굴을 살펴보니 표정에 신기함이 가득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부터 계속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오석에게 이 복잡한 골목길이 얼마나 신기할까?

순간 수현은 자괴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수현의 마음이 오석에게 마구 소리쳤다.

“그래. 네가 알고 있는 집은 아파트 아니면, 주차장과 마당과 화단이 있는 단독주택, 아니 단독저택 뿐이겠지. 마당도 없고, 주차장도 없고, 한 건물에 여러 집이 다닥다닥 들어있는 그런 집들은 처음이겠지.”

물론 수현은 이런 생각이 입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조심했다.

“여기야.”

마침내 수현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래도 2층이고 마당은 있지만 화단과 주차장은 없는 그런 집이었다. 중간쯤은 가는 셈이다.

-컹 컹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자 마자 산도가 짖었다. 산도라는 과자 닮았다고 붙여준 이름이다.

“산도! 안돼.”

단호하게 말했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산도는 낯 선 사람이 마당에 들어오면 무조건 짖고 현관문으로 들어가면 장난처럼 딱 멈춘다. 마당 까지만 자기 구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산도는 언제 짖었냐는 듯이 뚝 그치고 얌전해졌다.

집에 들어서자 수현이 날마다 보는 전형적인 중산층 커트라인 풍경이 열렸다. 날마다 익숙하게 보던 것들이 오석과 함께 보니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거실에는 낡은 소파, 피아노, 20인치 TV, 인켈 오디오, 소파 옆 장식장에는 레코드 판 몇 장과 카셋트 테이프 20여개, 비디오 테이프 대 여섯 개가 자리잡고 있었다. 수현은 오석네 집 거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분명 더 화려하고 세련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았다.

“다녀왔습니다. 엄마!”

인사를 하고 엄마를 부르는데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냉장고 앞에 가니 ‘오늘 동창회 모임 간다. 저녁 먹고 들어온다. 냉장고에 저녁 거리 다 들어 있으니까 수현이가 수고 좀 해 주렴.’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한 마디로 언니, 동생들, 아빠 저녁 식사를 준비 하라는 소리다. 집안 일 할 수 있는 자식이 수현 하나 뿐이라 엄마가 외출하면 집안 일은 늘 수현의 몫이었다.

“엄마, 안 계셔. 피아노는, 어?”

수현이 말하기도 전에 오석은 벌써 피아노 앞에 가 앉아 있었다. 수현이 덕담 한 마디를 던졌다.

“우리 집에는 피아노 체르니 30번 이상 쳐 본 사람이 없어. 그 동안 얘도 많이 심심했을 거야.”

“내가 잘 놀아줄게. 어떤 곡 쳐 줄까?”

“클래식.”

“으음. 악보 기억하는 곡이 많지 않은데. 어쨌든 해 볼게.”

오석이 건반에 손을 얹고 빠르게 손가락을 놀렸다. 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음악이 들렸다. 수현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눈을 감고 잠시 음악에 빠져 들었다. 하지만 오석의 연주는 5분도 되지 않아 멈추고 말았다.

“미안. 악보가 없어서 여기까지 밖에 기억 못하겠어.”

“충분해. 피아노가 아름다운 악기라는 거 처음 알았어.”

“다른 거 또 해 볼까? 음. 같이 하는 건 어때? 젓가락 행진곡이라도. 그건 할 줄 알지?”

“좋아.”

수현은 오석 옆에 앉아 건반에 손을 올렸다. 팔 네개가 나란히 건반 위에 늘어섰다. 늘어선 팔들을 보고 수현이 깜짝 놀란다.

“무슨 남자 애 팔이 나보다 하얘. 털도 나보다 적어.”

“아, 이거, 엄마 닮아서. 어머니 피부가 완전 꿀피부거든.”

수현은 순간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오석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보았다.

“와, 진짜네. 완전 꿀피부야.”

순간 오석의 목에서 꿀꺽 하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석 역시 수현의 팔을 살그머니 쓰다듬어 보았다. 그리고 오석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수현은 입을 꽉 깨물고 눈을 감았다. 마침내 오석의 손이 뺨을 스치며 올라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수현이 눈을 살짝 떴다. 오석의 얼굴이 깜짝 놀랄만큼 가까이에 와 있었다. 등을 감싸는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수현은 빠르게 뛰는 오석의 심장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수현의 고동과 오석의 고동이 뒤섞이면서 묘한 리듬을 만들었다. 어느새 오석의 입술이 수현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서 앞으로 갈지 뒤로 물러날지 망설이고 있었다.

눈 감고 기다릴까, 여기서 멈출까? 그런데 수현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수현의 손가락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수현의 집게 손가락이 두 입술 사이를 가로 막았다. 미모사나 말미잘 처럼 반응한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지만 이미 완료된 반사작용이었다.

순간 오석의 입술이 멀어졌다. 두 사람의 호흡도 맥박도 일정한 리듬을 되찾았다.

수현은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자기 뺨을 오석의 가슴에 얹고 팔로 허리를 감싸며 가만히 기대어 보았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이 상태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이제야 온갖 로맨스 소설에서 읽었던 마음의 떨림이 뭔지 알 것 았다.

마침내 두 사람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었다.

수현이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다.

“우린 연인이다. 우린 연인이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20화1987년 2부 여름 1화 오수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