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2부 여름 12회 권오석 1

by 권재원

권오석


1

오석은 신문 보는 것이 두려웠다. 신문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기사 한 줄 한 줄이 다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민주화 조치를 약속.... 국민에게 항복하는 기분으로....


달력을 보았다. 6월 29일.

6월 10일부터 시작된 연 이은 시위. 그로부터 한 달, 아니 20일도 지나지 않았다. 박종철 선배의 죽음으로부터 계산하면 넉 달. 불과 넉 달 만에 그토록 완강하고 잔혹하던 공권력이 손을 들어버렸다. 믿을 수 없었다.

오석은 신문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종이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게. 그렇다고 잉크의 무게도 아니다. 오석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신문을 놓치고 말았다. 손을 벗어난 신문지가 나풀거리며 방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저 거대한 공권력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차피 질 것이 뻔한 싸움이라고 애써 치부했다. 그렇게 문득문득 떠오르는 혹시 자신이 비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억누르고 가망 없는 싸움에 몸을 던지며 신세를 망치는 학생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

오석은 수현과 같이 민주화 투쟁 자체에 대한 반감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온갖 화려한 수사를 다 가져다 붙여도 다른 이유가 없었다.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밖에. 싸움이 두려웠고, 수현과 헤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비겁자. 서양인들이 죽음보다 더 두려워했다는 말.

비겁자. Coward. Chicken.

시를 쓰겠다고? 소설을 쓰겠다고?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 기여하겠다고? 이 모든 것이 엄청나게 초라하고 왜소하게 느껴졌다.

예술이라고? 겨우 예술가 지망생에 불과한 오석이 예술을 핑계로 싸움을 피하고 있을 때 세계적인 예술가 정우는 그 중요한 잘츠부르크 음악제 공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쇠파이프 까지 휘두르며 거리에서 싸웠다.

정우가 명동성당 농성장에서 확성기에 연결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외신기자들에게 찍혀 타임지 아시아판 표지에 실리고 말았다. ‘디누, 건반 위의 체 게바라’ 라는 타이틀과 함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된 그 사진.

정우가 예술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거친 싸움에 뛰어들었을까? 그건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석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한심하다. 너무 한심하다.

하지만 핑계만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문학. 미움이 없는 분노가 없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문학. 분명 포기해 버리기에는 너무 멋진 꿈이 아니던가?

이 꿈을 포기해야 할까? 정말 그래야 할까? 하지만 문학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꿈 자체도 코메디가 아닐까?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감동적인 소설을 써서, 자본가를 독재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개과천선이라도 시키겠다고? 설령 그런 일이 가능 하다고 쳐도 과연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권오석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가슴 속에서 네가 무슨 모차르트나 셰익스피어라도 된단 말이냐 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예술은 핑계에 불과했다. 차라리 겁나서 투쟁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발가벗은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더 도덕적일 것이다.

오석은 아버지가 틈만 나면 말하던 4.19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1960년 4월 19일 당시 아버지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학년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경무대(청와대)로 행진하는 시위대열에 있다가 경찰이 쏜 총에 허벅지를 맞았다. 그리고 당시 이화여대 약학과 학생이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약대 1학년 학생이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실제로는 약사이던 외할아버지- 응급조치를 받고 그게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오석은 4.19 혁명의 아들인 셈이다.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힌 이야기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4.19 의거, 4.19 혁명 등에 대해 배울 때 마다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1987년 6월은 아버지의 4.19에 해당되는 바로 그날이다. 그런데 오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2010년 정도 된 미래의 어느 날 미래의 자녀가 묻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오늘 학교에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대해 배웠는데, 아빠 그때 대학생이었지?”

“으응.”

“아빠는 그때 뭐 했어?”

“아빠가 그때 뭐 했냐 하면.”

오석이 어물거리자 미래의 자녀가 감히 아비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내 친구 아빠가 아빠는 그때 남들 다 싸울 때 혼자 시험 쳤다고 하던데? 그래서 아빠는 겁쟁이라고? 정말이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시험 친 건 맞지만 겁쟁이인 건 아니야.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 절규하고 호소할 상대가 없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격려하는 수밖에.

오석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그래. 다 좋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나는 나의 방식대로 세상에 보탬이 되면 되는 거다. 그들은 싸움으로, 나는 아름다움과 서정으로. 그게 뭐가 나쁜가? 그게 그렇게 욕먹을 짓인가? 그렇다고 전두환 편에 서서 어용 짓을 한 건 아니지 않은가?’

마음을 굳게 정리하자 비로소 몸에 힘이 좀 돌았다.

몸에 힘이 좀 생기자 몸을 좀 휘저어서 울울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오석은 라켓을 챙겨 들고 동네 테니스 코트를 향했다. 땀이 뻘뻘 나도록 뛰고 공을 신나게 때리면 기분이 좀 좋아질 것 같아서다.

“어이. 권오석군. 오랜만일세.”

테니스 코트 클럽 하우스에 들어서자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라는 테니스 동호인이다. 이 클럽에서 가장 부지런한 회원이다.

“안녕하세요?”

“자, 한 게임 쳐야지?”

“네.”

“그런데 자네 혼자 강의실에 들어가서 기말고사 쳤다고?”

“사실은 혼자가 아니라 여자친구하고 둘이서요.”

그러자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허허허. 거 정말 대단한 용기일세. 자. 뭐, 그런 것 때문에 기죽지 말게.”

아, 이 분은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다.

오석은 다른 친구들이 따돌리거나 그럴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오석은 지금 학생들의 투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반대편에 서서 나름의 저항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교수는 오석이 용감하고 소신있는 우익학생이라고 생각하는지 계속 격려의 말을 이어갔다.

“물론 어용 학생이니 뭐니 하겠지. 하지만 어용이 뭔가? 권력이 있는 쪽을 따라가는 게 어용이야. 대학생 사회에서는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운동권이야. 데모하는 학생들 앞에서는 교수도 꼼짝 못하는 게 요즘 대학 아닌가? 그러니 대학생 사회에서는 운동권 따라다니는 게 어용이라 이말일세. 혹시 자네더러 누가 어용학생이라고 뭐라 그러면 이렇게 말해 주게나.”

“예.”

대답은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교수의 말은 동문서답을 넘어 동문월답이고, 심지어 궤변에 불과했다.

물론 저 사람이 자기 소속 대학 안에서 반 운동권 집회라도 열어보거나 했다면 말이 되겠지만,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 말은 단지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의 변명거리에 불과하다. 운동권이 나쁘면 운동권을 비판하고, 정부가 나쁘면 정부를 비판하고, 둘 다 나쁘면 둘 다 비판해야 마땅한 것 아닐까?

하지만 오석은 이 궤변론자 교수와 자신이 무엇이 다른지 대답할 수 없었다. 차라리 수현은 명백히 운동권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뜻을 분명히 밝혔다. 수현은 민주주의니 평등이니 하는 거창한 이념을 내건 사람들 못지 않게 소박하고 평범한 꿈을 가진 사람들도 올바르다고 항변했다. 다만 나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지 말라고. 너희의 정의는 폭력이라고.

오석에게는 그런 정도의 이유도 없었다. 오석이 학회를 안하고 데모에 안 나간 것은 결국 낯설고 두려워서였다. 기말고사를 거부하지 않고 가서 시험 친 것은 학생으로서 성실함을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수현을 따라갔을 뿐이었다. 정우와 소원해진 마당에 수현마저 놓치면 안 된다는 절박함에 어찌어찌 하다 보니 우익 학생처럼 보이는 지경이 되었다.

못났다. 정말 못났다.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정말 못났다.

오석은 못난 생각을 털어버리기 위해 라켓으로 자기 머리를 두드렸다. 통통 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못난 생각이 털리긴 커녕 공연히 기분 나쁜 기억만 소환되었다. 일 주일 전? 아니면 그 보다 조금 더 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6월 10일 이후 6월 26일 이전의 어느 하루였다.

고등학교 동창 진현이 한테 전화가 왔다.

“오석아, 너 바쁘냐?”

“아, 딱히.”

“하긴 뭐 바쁠 리가 있겠냐? 시험도 안 치는데.”

이렇게 물어보는데 오석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난 가서 시험 쳤어.”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저 놈들이 명동으로 종로로 나가 데모할 놈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들 다 거부하는 시험 가서 칠 놈들도 아니니까.

“으, 응.”

대충 이렇게 뭉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진현이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잘됐다. 그럼, 우리 오랜만에 한 번 뭉치자.”

“뭐, 좋아.”

“테니스 좋지?”

“응.”

“그럼 우리학교에서 모이자. 우리 학교가 적어도 테니스 장 하나는 좋거든.”

오석도 이건 인정했다. 연세대학교 테니스 코트가 산 중턱에 있는 서울대 코트보다 훨씬 좋은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이렇게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이기로 했다.

동창들 모임이라고 반창회나 동창회 같은 것은 아니고, 고등학교 시절 자주 어울렸던 친구들, 일종의 비공식 클럽 같은 친구들 모임이었다.

사실 이 모임이 만들어진 배경은 영 탐탁치 않았다.

집안 빵빵하고 성적도 최상위권인 아이들끼리 어울려 노는 비공식적인 모임, 그때 표현으로는 써클이었다. 진현이는 성적은 아주 뛰어나지 않았지만 귀염성 있는 외모와 사근사근한 매너로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전교 1, 2등 하는 녀석들을 제치고 이 모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래 저래 연세대에 딱 어울리는 녀석이다.

물론 성적이 전교권에 미치지 못한 대신 집안 배경이 최상위권, 아니 성층권이긴 했다. 그래서 이 비공식 모임은 어느새 진현이 그룹이라 불리게 되었다. 심지어 그 멤버의 엄마들까지 그룹을 만들어 학교를 좌지우지했다.

사실 오석은 진현이 그룹 정규 멤버(?)는 아니었다. 하지만 친한 친구들이 거기 많이 있었고, 실제 그 써클 모임에 같이 어울려 식사도 하고, 음악회도 가고 했기 때문에 진현이는 당연히 오석도 자기네 멤버라고 생각했다.

당시 진현이네 써클과 맞먹을 정도로 영향력 있던 그룹은 단연 성진네 그룹, 즉 송백회였다. 이 그룹에는 유독 학생회 간부, 학급 반장, 동아리 반장 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명 인사인 정우가 멤버라 학생들 사이에 영향력이 큰 그룹이었다.

비교하자면 이랬다. 진현이 그룹은 부잣집 아이들끼리 어울리는 모임, 송백회는 일종의 학교 리더십 그룹이었다. 물론 두 그룹 다 결국 공부 잘하는 애들 모임이었으니 보통 학생들 사이에서는 똑 같이 재수없는 녀석들이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석은 굳이 따지자면 성진 그룹 멤버였다. 정우 때문이기도 했고, 학생회 간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성진 그룹 역시 엄마들까지 그룹이 이루었고, 학교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말은 곧 오석의 어머니가 두 엄마 그룹 멤버를 겸하는 슈퍼 알파 맘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오석은 본의 아니게 두 주류 써클 모두로부터 멤버십을 인정받은 그야말로 인사이더가 되었다. 때로 두 써클 사이에서 뭔가 조율할 일이 있을 때 으레 오석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사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조율할 일이 많지 않았고, 주로 두 그룹 엄마들 사이에서 조율할 일이 많았는데, 그 역할을 오석의 어머니가 담당했다.

하지만 바로 그 문제의 학교 축제 사건으로 성진 그룹이 박살 났다. 진은 자퇴했고, 정우는 해외 순회 공연을 핑계로 거의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오석은 진현이 그룹의 고정 멤버가 되고 말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아예 진현이네와 같은 독서실 다니면서 고된 입시를 함께 견뎠다.

막상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자주 모이지 못했다. 진현이 연세대로 간 것이 컸다. 진현이 재수를 고민하며 두문불출하던 몇 달 동안, 먼저 나서서 “우리 모이자.” 할 만한 활달한 녀석은 멤버들 중에 없었다. 그렇게 사회성 떨어지는 서울대학생과 카이스트 학생들로 구성된 멤버들은 그냥 데면데면하게 대학 첫 학기를 보냈다.

그런데 진현이 돌아왔다. 재수 포기하고 연대 계속 다니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진현이 계속 전화로 시간, 장소, 준비물 등을 알려주었다. 시간은 6월 19일 금요일 오후 네 시. 장소는 연세대학교 테니스 코트. 준비물은 당연히 운동복, 테니스 라켓, 그리고 갈아입을 옷.

진현이가 짜 놓은 프로그램은 이랬다.

멤버가 모두 여덟 명이라서 학교 코트 두개를 예약해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복식 팀 넷을 만들어 두 코트에서 동시에 경기해서 이긴 팀들은 결승, 진 팀들은 3 4위전을 한다.

이렇게 한바탕 테니스 하고 나면 옷 갈아 입고 신촌에서 뒷풀이를 하는 것이다. 뒷풀이 장소로 무슨 클럽을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클럽만 예약해 둔 것이 아니라 조인트 할 여학생들까지 다 섭외해 두었다고 했다.

하여간 그 방면으로는 도가 튼 녀석이다. 고등학교 때 부터 그랬던 녀석이다.

오석은 모처럼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인다고 하고, 또 과에서 고립 되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테니스 라켓과 운동복을 챙겨 연세대학으로 갔다.

오석을 포함하여 서울대학생 3명, 카이스트 학생 2명, 건대 치대 1명, 그리고 진현이를 포함한 연대생 2명이 모였다. 고생을 전혀 모르고 자란 매끈한 얼굴들. 그야 말로 “뉘 집 자식들인고?” 소리가 나오는 그런 엄친아들이었다.

하지만 오석은 연세대학교 교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교문에서부터 테니스 코트까지 가는 동안 교정 곳곳에 붙어있는 현수막과 지라시들 때문이다.

이한열을 살려내라!

입학할 때 부터 대학 생활을 공포와 자책으로 몰아넣었던 이름 ‘박종철’. 여기에 ‘이한열’이 추가되었다. 오석이 수현과 기말고사를 치러 강의실에 들어갈 때, 같이 춘천으로 나들이를 갓을 때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그 이름.

오석은 그 이름의 물결을 헤치고 테니스를 치러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바로 그 현장에서 말이다.

마음이 불편하니 몸도 말을 듣지 않았다. 테니스가 잘 될 리 없었다. 평소 실력의 반의 반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컨디션 안 좋아?”

진현이가 물어보았지만, 문득 오석은 그 얼굴이 싱글싱글 웃고 있는 것이 너무 보기 싫었다. 진현의 얼굴에서는 놀랄 정도로 이한열의 영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진현뿐 아니라 연세대 다니고 있는 다른 녀석에게서도 그런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진현이 책임이 아니다. 그 녀석은 원래 싱글싱글 웃는 녀석이니까.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동안 오석은 진현이 성내거나 찌푸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석은 그런 진현의 얼굴을 라켓으로 후려 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야, 너네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너네 학교잖아?”

이 말이 울컥거리면서 가슴과 목청 사이를 오갔다. 하지만 그럼 당장 이 대답이 반사되어 나올까 두려웠다.

“그럼 박종철네 학교 다니는 놈은?”

이러면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결국 오석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 개도 안 걸리는 여름 감기야.”

그러자 엄친아 그룹 답게 나머지 일곱명이 모두 경기를 중단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오석 주변으로 모였다.

“진짜 안 좋아 보인다.”

“테니스는 안되겠다.”

“오석이 아프다니까 그만 하자.”

“그럴까?”

“그럼, 일단 밥 먼저 먹고, 오석이 보내고 클럽 가자.”

“그래. 그게 좋겠다.”

이런 그들의 모습이 오석을 더 힘들게 했다.

너무 착한 녀석들이다.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녀석들이다. 세상에 태어나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라고, 세상의 그림자는 전혀 겪어보지 못한 그런 녀석들이다. 그래서 마음씨에 구김이라든지 그림자도 없는 그런 녀석들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 착한 녀석들이 이 죽음들을 이 불의를 외면하고 있단 말인가? 이 착한 녀석들, 이 똑똑한 녀석들이 교과서와 영 반대인 세상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성내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 때 마다 오석은 이 한 마디가 두려워 생각을 멈추어야 했다.

“그러는 너는?”

결국 그날 테니스 경기는 그것으로 마치고 오석은 점심이라기엔 늦고 저녁이라기엔 이른 식사를 마친 후 먼저 집으로 왔다. 나머지 일곱명은 아마 진현이 주선해 두었을 여학생들과 놀기 위해 클럽에 갔을 것이다.

오석이 갑자기 빠진 빈 자리를 채울 대타는 진현이 금방 구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 그룹에 끼고 싶어하던 친구들이 많았으니까 전화 돌리면 금방 얼씨구나 좋아라 하며 누군가 튀어 나왔을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지나간 신촌 오거리에는 엊그제의 시위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아직 청소되지 않은 최루탄 가루가 날리면서 화학적 눈물을 강요했다. 오석도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화학적 눈물인지 심리적 눈물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