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1987년 2부 여름 13회 권오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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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기억이 떠오르고 나니 테니스 칠 마음이 뚝 떨어졌다. 통통 튀는 공이 마치 오석을 약 올리는 것 같이 느껴쳤다.
이게 다 저 교수가 궤변을 늘어놓아 기억을 소환한 탓이다.
오석은 그 교수를 향해 무자비한 파워 발리 공격을 가함으로써 단단히 앙갚음을 했다.
“나이스 샷!”
“야, 이거 젊음은 당할 수가 없어. 허허허.”
하지만 그 때 마다 그 교수는 이런 말로 화답하며 오석의 앙갚음을 무력화했다. 오석은 테니스로는 마음의 혹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만 확인했다.
대충 한 세트만 치고 짐을 쌌다.
“좀 더 하지 그래?”
교수는 아쉬운 모양이다. 할 때마다 지면서도 젊은 사람하고 라켓 섞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오석은 그의 기쁨조가 될 생각이 없었다.
“외삼촌 댁에 가야 해서요. 잘 쳤습니다.”
“그렇다면 얼른 가서 봬야지. 수고했네.”
오석은 거짓말을 못한다. 그 교수와 말 섞기 싫어서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이렇게 말 한 이상 정말로 외삼촌 댁에 가야만 했다.
사실 별 대단한 일은 아니다. 어차피 외삼촌 댁은 오석네 집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고, 심지어 옆의 옆 동이기 때문이다. 집에 가서 샤워만 하고 바로 가면 된다.
집에 가니 방금 학교 끝나고 온 여동생 혼자 있고, 고등학교 다니는 남동생은 아직 오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실감이 확 났다. 대학교는 중고등학교 보다 여름방학이 한 달 빠르다. 개학은 더 늦고. 그런데 등록금은 왜 훨씬 비쌀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직 은행과 약국에서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이리 집에 오려면 멀었다.
“외삼촌 댁 갈래?”
여동생에게 슬쩍 한 마디 던졌다. 하지만 전화통 붙들고 친구와 기나긴 수다를 떨고 있는 여동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꼭 데리고 갈 생각도 없었다. 나중에 왜 혼자 갔냐 따위의 짜증을 면하고자 던진 말이니까. 여동생 소진이는 또래 사촌들이 있고, 외할머니한테 용돈도 짭짤하게 챙길 수 있는 외삼촌 댁 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말 안하고 혼자 갔다간 뒷감당이 되지 않았다.
오석이 외삼촌 댁을 자기 집처럼 드나 든 역사는 10년도 넘았다. 학교 끝나면 오석네 세 남매가 집이 아니라 바로 외삼촌 댁으로 가는 날도 많았다. 어차피 어머니가 약국에서 퇴근하기 전까지 집에 가 봐야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외숙모는 전업주부인데다 마음씨 좋은 가정부도 고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게 결정적이었으리라- 삼남매가 우르르 놀러 와도 번거로워하지 않았다. 4살, 6살 터울의 어린 사촌 누이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여러 손주들 중 유독 오석을 끔찍이 사랑하는 외할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도 아예 퇴근길에 외삼촌 댁에 먼저 들러 갔다. 어릴 때는 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애들 친정 엄마한테 맡겨 두었다 퇴근길에 데리러 가는 셈이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야근이나 출장 중일 때는 아예 어머니까지 외삼촌 댁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아이고, 우리 서울대 손주가 왔네.”
아니나다를까 외삼촌 댁에 들어서자 마자 외할머니가 두 팔을 번쩍 올려 반겼다.
외할머니는 70대 후반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운 피부와 세련된 스타일을 자랑했다. 한 마디로 전형적인 부유층 할머니 그 자체였다.
외할머니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그 세대 여성 최고 엘리트였다. 학교를 졸업한 뒤 계성국민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당시 교장이던 장면 박사의 주선으로 종로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외할아버지와 만나 결혼하였다. 이후 어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이모를 차례로 낳았고 -당시 기준에서 3자녀는 정말 드물었다. 대체로 훨씬 더 많았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외삼촌 댁에 계속 살고 계신다. 외할아버지가 경영하던 약국은 강남에 분점을 낸 뒤 종로점은 외삼촌이 강남점은 어머니가 경영하고 있다.
“오석아, 요즘 왜 이렇게 뜸했어?”
외숙모가 활짝 웃으며 말한다.
”저번 주에도 왔잖아요?”
”그 두배는 왔어야지. 저녁 먹고 갈거지? 아예 엄마랑 동생들도 다 오라고 하지?”
외숙모가 활짝 웃는다.
외숙모는 재벌이라기엔 모자라고 중소기업이라기엔 큰 어느 중견 기업 집안 따님이다. 40대 초반이지만 20대나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 피부와 몸매를 자랑한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을 나왔다고 하는데, 정작 피아노 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쨌건 그들의 환대에는 어떤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로 오석을 반가워했다. 그들이 어서 와 반갑구나 하면 정말 반가운 것이고, 밥 먹고 가라고 하면 정말 식사 같이 하고 싶은 거다. 물론 그 식사 준비를 외할머니나 외숙모가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게 결정적인 이유겠지.
어쨌든 오석은 외가 쪽이 본가 쪽 보다 훨씬 편했다. 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경상북도 농촌 출신이다. 본가 쪽 친척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으며 촌스러웠다. 아버지도 서울법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어머니와 결혼은 고사하고 그 집 문지방도 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석이 가난과 촌스러움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천박한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이건 불편하고 편하고의 문제다.
하지만 아무리 가식없는 환대를 받는다 해도 어쨌든 한 세대 차이가 나는 아주머니는 아주머니고 두 세대 차이가 나는 할머니는 할머니다. 어릴 때 부터 치고박고 같이 자라다시피 한 사촌 누이들이 보이지 않으니 할 말도 궁했고 할 일도 딱히 없었다.
“정은이 경은이는요?”
“방에 있어. 지금 과외 공부 중.”
아 과외 중이구나. 그렇다면 장하영이 와 있다는 뜻이다.
“오석이 덕분에 좋은 선생님 만나 고맙단 말 하려던 참이야.”
“다행이네요. 하영이는 똑똑하고, 성실하고, 착하고.”
그러자 외숙모가 윙크를 던지며 놀림조로 한 마디 던졌다.
“결정적인 한 마디를 빼놓네?”
“네?”
“예쁘고. 그치?”
“아, 예.”
오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오석은 중학교 다니는 딸 둘을 가르칠 과외 선생을 구하던 외숙모에게 과 동기 장하영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외숙모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하영은 집안이 어려워 등록금이 반의 반값(국립대라 반값, 거기서 다시 반값)이면서 서울대학교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사범대학을 선택한 아이다. 하지만 교사가 될 마음은 없어보였다. 하긴 교사될 마음 없는 것은 오석도 마찬가지긴 했다.
하영의 어려운 형편을 알게 된 것은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어, 오석아!”
3월 중순경이었나? 하교길에서 반가운 목소리를 들었다.
의예과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 한준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으로 매우 가깝게 지냈던 친구다. 무엇보다 어머니들끼리 친했다. 어머니는 한준이를 거의 잠정적인 사위로 간주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도시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관악 캠퍼스에 들어오고 보니 해수욕장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흩어져 거의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 넓은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너무 반가워서 바로 집에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맥주 한 잔하고 가자.”
“그러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의기투합해서 서울대 입구역에 있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바로 거기에 빨간 앞치마를 두른 장하영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과 동기를 만난 오석은 설핏 반가움을 표시했지만 하영은 오석을 완전 모르는 사람 취급하며 접대용 미소와 깍듯한 친절한 말투로만 대했다.
오석은 눈치가 빠른 편이라 하영이 여기서 일하는 것을 몰라주었으면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오석도 계속 모르는 척 하며 하영을 직원으로만 대했다. 하지만 아무리 모르는 척하기로 해도 하영이 테이블에 올려주는 맥주와 안주를 받는 일은 영 불편했다.
“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이런 인사까지 받았다.
“야, 저 알바생.”
사정을 모르는 한준이 쿡큭대며 속삭였다.
“뭐?”
“진짜 이쁘지 않냐? 야, 우리 여기 문 닫을 때 까지 버텨 볼까? 어니면 저 알바생 퇴근 할 때까지?”
“집어 쳐 새끼야. 오늘 너무 늦으면 안돼.”
“그럼 우리 저 애 언제 나오는지 알아내서 여기서 동창회
한 번 할까?”
“하여간, 너란 새끼는.”
오석이 면박을 주었지만 홀을 다니며 서빙하는 하영을 훔쳐보는 한준을 막을 수 없었다. 표정을 보니 진짜 기회만 오면 플러팅 할 기세였다.
녀석은 하영이 지나가기만 하면 괜히 노가리, 과일안주, 음료수 등 추가 주문을 하며 테이블로 불렀다. 어느새 먹지도 않을 안주와 마시지도 않을 맥주가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였다.
오석의 머리속에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부끄러운 기억이 스쳐갔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마지막 날, 여름방학을 앞두고 오석, 한준, 정우가 같이 영화를 보러 갔다. 중앙 극장에서 ‘실버 라도’인가 하는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시간이 많이 남아서 명동 웬디스에 가서 햄버거와 밀크 쉐이크를 시켜 놓고 시간을 떼웠다.
그때 한준이가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듯이 말했다.
“야, 저 누나 예쁘지 않냐?”
“어, 진짜네?”
역시 꽤나 밝히는 편인 정우도 반응했다.
“얼굴도 얼굴인데 목소리가 진짜 이뻐.”
“호오, 그래?”
사실 오석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주문 확인하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마치 오페라 레시타티브처럼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한준이 녀석은 그 목소리 예쁜 직원과 한 번이라도 더 말 걸어 보기 위해 걸핏하면 가서 주문을 했다. 거의 여섯 번은 움직였을 것이다. 세 소년은 각자 햄버거 세 개, 밀크 쉐이크, 오렌지 쥬스, 콜라를 앞에 늘어 놓았다. 그 중 절반밖에 먹지 못했다.
계산은 몽땅 한준이가 했다. 단지 예쁜 직원 얼굴 한번 더 보고, 목소리 들어보기 위해 그 직원 시급 몇배나 되는 돈을 그냥 써버린 것이다. 누가 봐도 강남 도련님들이 그야말로 돈지랄 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직원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오석은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런데 한준이 녀석이 그 짓을 오석의 과 동기 장하영게 하려는 것이다. 더구나 그 때는 고등학생과 어른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같은 또래. 한준이는 단지 주문만 자꾸 하는 수준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플러팅을 할 기세였다. 오석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가시방석에 앉아야 했고, 한준이가 플러팅 거는 조짐만 보이면 화제를 돌려서 하영이 빠져나가게 했다.
그 어색함과 불편함은 계산을 마치고 호프집을 나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영이가 깍듯이 손님에게 하는 인사를 한 뒤 고개를 살짝 들어 살짝 윙크와 작은 손인사를 보내 주었다. 입모양으로 봐서 “고마워.”라고 하는것 같았다. 다행히 한준이 녀석은 그걸 보지 못했다. 그 날 이후 한준이가 그 호프집에 또 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 여러번 더 갔을 것이다.
오석은 하영의 그 살짝 윙크와 작은 손인사를 학교에서
더 자주 보게 되었다. 하영이 그 모습을 더 자주 보여 준 것인지, 아니면 평소에도 그런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아이였는데 그 동안 오석이 보지 못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다 5월 교양 체육 시간에 파트너가 되면서 하영과 부쩍 가까워졌다. 교양 체육은 3 ,4월은 테니스, 5, 6월은 포크 댄스였는데, 여러 포크 댄스 중 컨트리 댄스, 왈츠, 스퀘어 댄스를 배우도록 되어 있었다. 이 춤들은 모두 모두 남녀가 짝을 이루는 것들이었다.
오석은 당연히 수현과 짝을 이루고 싶었지만 강사는 단칼에 그들을 갈라놓았다.
“파트너는 추첨으로 정하죠.”
결국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추첨했다. 그 결과 오석은 하영의 파트너가 되었고 수현은 여학생이 많다는 이유로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어느 공대생의 파트너가 되었다.
오석은 수현과 파트너가 되지 못해 실망했지만, 추첨 결과가 하영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현과 파트너가 되지 못한다면 민경 아니면 하영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경이야 과에서 가장 흉허물 없이 지내는 친구니 당연했고, 하영은 호프집 윙크 이후 부쩍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그 동안 하영은 도도하다고 할까 차갑다고 할까 보이지 않는 벽이 둘러쳐 있어 쉽게 곁을 주지 않는 아이였다. 그래서 호프집에서 직원과 손님으로 마주치기 전까지 입학하고 한 달이 지나도록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다. 하영이 먼저 말을 걸어오지도 않거니와, 오석이 먼저 말을 걸 엄두도 나지 않았다.
“자, 그럼 오늘은 스퀘어 댄스부터 배워 봅시다.”
파트너가 정해지자 교수가 네 커플 단위로 하나씩 그룹을 짓더니 춤동작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오석은 워낙 몸치라 동작 따라하는 것이 어색했지만, 하영은 의외로 날렵하게 동작을 잘 따라했다. 자연스럽게 하영이 오석에게 춤 동작을 가르쳐주는 입장이 되었다.
“자, 그럼 이제 파트너와 마주 서시고, 자세 잡고, 정식으로 시작합니다.”
교수의 지시에 따라 오석은 하영과 마주 섰다. 수현과 마주 서면 코 바로 앞에 머리카락이 있어 향긋한 냄새가 났는데, 키가 큰 하영과 마주 서자 눈과 눈이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어 부담스러웠다.
하영의 살짝 웃는 듯한 표정의 커다란 쌍 꺼풀이 바로 앞에서 진지하게 오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석이 쭈뻣쭈뻣 하자 하영의 윤기 있게 반짝이는 도톰한 입술이 가볍게 움직이며 “왜?” 하고 물었다. 오석은 고개를 살짝 흔들어 별 일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영이 배운 동작대로 손을 내밀었고, 오석은 그 손을 잡았다. 조금 촉촉하고 통통한 느낌을 주던 수현의 작은 손과 달리 하영의 길다란 손가락 관절이 느껴졌다.
그 시간 이후 하영과 많이 가까워졌다. 그렇게 손을 잡고 마주보는 시간을 계속 가졌으니 가까워지지 않기도 어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춤만 추는 것이 아니라 춤 추며 여유있게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그렇게 그들은 꽤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 따라 무슨 일인지 수현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교양 체육 시간은 매주 화요일 7, 8 교시다. 8교시가 끝나면 이미 오후 다섯시가 넘었기 때문에 오석은 수업 끝나면 수현이랑 같이 저녁 먹고 귀가 했다. 그런데 수현이 없기 때문에 혼자 가방을 싸 들고 사범대학에서 정문으로 가는 기나긴 내리막길을 터덕 터덕 걸어 내려갔다.
문화관과 정문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후생관 삼거리를 지나는 데 등 뒤에서 갑자기 씩씩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권오석!”
깜짝 놀라 돌아보니 두 손을 옆구리에 받치고 서 있는 코카 콜라 병 같은 하영의 실루엣이 보였다. 쌍꺼풀이 선명한 커다랗고 또랑또랑한 눈을 반짝이며 노려보고 있는 하영의 모습은 결코 우호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 하영아.”
“너, 전에도 한 번 말하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쌩 하고 가 버려서 말 못했어. 너 매너가 왜 그래?”
“매너라니?”
“아니 춤 끝나자 마자 파트너 팽개치고 그냥 막 가는 게 어딨어?”
“미안. 그, 그건.”
오석이 난처한 모습으로 말을 잇지 못하자 하영이 성큼 성큼 다가왔다. 키가 크고 늘씬한 하영이 바짝 다가오자 오석의 눈과 거의 비슷한 높이에서 하영의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반짝였다.
“알아. 알아. 수현이 챙겨야 하는 거.”
“응. 그래.”
“그런데 오늘은? 수현이도 안 왔는데? 내가 무서워? 꼭 도망치는 것 같잖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오석이 어물어물 하는데 하영이 뜻밖의 말을 던졌다.
“소주 한 잔 할래?”
“뭐? 소주?”
“봐, 날씨가 좀 그렇잖아?”
하영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고개를 들어 보니 말마따나 잔뜩 찌푸린 하늘이 당장이라도 쥐어 짜면 물을 쏟아 낼 것 같은 칙칙한 행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영이 말했다.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을 하고서 말투며 목소리는 마치 변성기 전의 소년 같았다.
“우중충 하지? 이럴 때 난 라면, 순대, 그리고 소주가 생각 나거든.”
오석은 순대와 소주에는 전혀 공감하지 않았지만 라면에는 공감했다. 어차피 저녁 먹고 복잡한 퇴근시간 좀 지나서 집에 가야 했기 때문에 어디든 들렀다 갈 참이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라면, 순대, 그리고 소주가 모두 있는 녹두 거리 입구에 있는 작은 학사주점인지 분식집인지 경계가 모호한 가게로 갔다. 오석은 가구며 식기며 다 지저분할 것이 분명한 그런 가게라 걸음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두워 지저분한 티가 많이 나지는 않았다.
라면 한 그릇 씩, 그리고 순대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체육 수업 마친 뒤 끝인데 다시 20분을 걸어온 터라 음식이 나오자 오석도 하영도 문답불용 일단 라면부터 허겁지겁 말아 넣었다.
라면을 어찌나 맹렬하게 흡입했는지 순식간에 국물 한 방울 남지 않은 빈 그릇만 남았다. 스텐 대접이 허름한 형광등 조명을 반사하며 마치 백금처럼 반짝였다.
하영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까르르 웃었다.
“하하. 우리 엄청 배고팠나봐. 10분?”
“정확히 말하면 7분 30초.”
“니히트 에센, 존던 압소비렌이네. 자, 여기.”
하영이 소주 병과 잔을 들어 한 잔 따랐다. 그리고 또 한 잔을 따라 오석 앞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 놓았다.
“나도?”
“당연하지, 파트너.”
하영이 가볍게 잔을 부딪치더니 단숨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전형적인 미인 스타일의 하영이 이렇게 터프하게 말하며 순대를 안주 삼아 소주를 털어 넣는 모습이 묘한 조합을 이루었다.
어쩔 수 없이 오석도 소주 잔을 들어 입에 넣어 보았다. 달면서도 쓴 냄새가 고약해 도저히 다 삼킬 수 없었다. 1/3 잔 정도만 만시고 잔을 도로 내려 놓았다.
“자, 이제 네가 따라 줘.”
하영이 탈탈 털린 빈 잔을 쓱 들이 밀었다. 오석은 말없이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워주었다. 하영은 그 잔도 단숨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하영은 호기로운 행동과 달리 술이 그렇게 세지는 않아, 소주 두 잔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매끈하고 하얀 얼굴이 달아오르자 마치 프랑스 인형 같은 모습이 되었다.
발그스름한 볼을 움직이며 하영이 입을 열었다.
“오석아. 나.”
“응. 뭘?”
“나, 아르바이트 좀 구해주라.”
술기운 때문에 그런지 평소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마산 지역 억양이 살짝 묻어 나왔다. 경기도 안성 쪽에서 왔다고 하던데, 원래 고향은 경남 쪽인 모양이었다.
“아르바이트? 지금도 하고 있잖아? 더 하려고?”
“바보야. 호프집, 커피숍 이런데 말고. 몰래바이트 말이야.”
“아, 과외?”
“그래.”
“왜?”
아차. 순간 오석은 스스로 뺨을 때리고 싶어졌다.
아니, 거기서 왜가 왜 나오냐고? 하지만 하영이 기다렸다는듯이 말을 늘어놓는다.
“왜는 무슨 왜야? 돈 필요하니까 그렇지.”
“그, 그래.”
“오해는 하지 마. 핸드백 사고, 유흥비 쓰고 그러는 거 아니니까. 그래 딱 까놓고 말할 게. 부끄러울 게 뭐 있다고. 우리 집 가난해. 진짜 가난하다고. 학비도 방세도 다 내가 벌어야 해. 기숙사 들어가면 좀 절약되는데 그것도 똑 떨어지더라. 쳇. 그런데 호프집 아르바이트, 이런 거 가지고는 어림없더라고. 그거 하루 네시간씩 한달 내내 해 봐야 10만원 도 안 되는 걸. 공부는 또 언제 하고? 그런데 과외 하면 일주일에 네 시간만 해도 한 달에 20만 원이잖아?”
오석은 호프집 아르바이트가 그렇게 헐값에 일하는지 처음 알았다. 그런 일 안해본 것이, 그리고 거기 비하면 터무니 없이 많은 돈을 받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이 말이 튀어나왔다.
“미안해. 몰랐어.”
하영이 쿨한 그러나 조금 꼬부라진 목소리를 털어냈다.
“아니, 그게 또 뭐 미안할 일이야? 네가 뭐 남의 돈을 뺏아간거도 아니잖아? 문제는 말이야, 나야. 나. 돈은 필요한데 그 과외 자리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다들 알음알음 통해서 하는 것 같은데, 내가 과외 시킬 만한 부잣집 아는 데가 어디 있어야지. 너라면 좀 알 것 같아서. 내가 아는 강남 아이는 너하고 민경이 밖에 없걸랑. 근데 같은 여자끼리, 민경이 한테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잖아? 솔직히 너 한테도 맨정신으로는 못하겠어. 미안해. 그래서 술 마셨어.”
오석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하영이가 가난한 집 아이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미인이라고 가난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미인을 보면 가난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오석은 가난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니 가난의 흔적, 가난의 냄새 같은 것은 전혀 맡지 못했다.
물론 오석은 자신이 부유층이라는 것, 세상에는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빈곤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들어서 아는 것과 실제 아는 것은 다르다.
왜 그랬을까? 오석은 가난한 여학생은 생긴 것도 가난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얀 피부, 반짝이는 눈, 큰 키와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옷이며, 신이며, 가방이며 모양과 색 배합 잘 맞춰서 세련된 느낌을 주는 하영을 너무 당연히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세히 보면 그 옷이며, 신이며, 가방 따위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검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것도 용돈이 필요한가보다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뜻밖의 고백을 들을 줄은 몰랐다.
하영은 이렇게 신상에 대해 털어 놓은 것이 민망했는지 소주를 두어 잔 더 마셨다. 오석은 이럴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서 소주 한 병을 더 시켜서 마셨다.
최종 스코어로 오석은 네 잔 하영은 아홉 잔을 마셨다. 소주 네 잔이면 오석에게는 신체적인 고통이 느껴질 정도의 양이다. 하영 역시 말투가 꼬부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사범대학 그것도 독어교육과에 왔는 줄 알어?”
하영이 난감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되려고?”
일단 무난한 대답을 해 보았지만 하영이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간츠 니히트. 그럴 생각이면 졸업하면 100% 발령나는 교대 갔지 뭐하러 발령도 안나는 독어교육과 왔겠냐? 그냥 서울대 졸업장이 필요해서야. 사범대학이 서울대학에서 등록금이 제일 싸고. 국립이라 반, 다시 사범대라 반, 1/4 이잖아? 나중에 취직 생각하면 영어 교육과가 좋은데, 점수 모자라서 독어, 불어 중 고른 것이 독어야. 영어는 부전공 하기로 하고. 외국어 많이 해 두면 나중에 다른 공부 보태서 취직하기 좋으니까.”
“아, 그렇구나.”
”야, 그런데 1/4 등록금도 장난 아니더라. 밤 새도록 아르바이트 해서 10만원 벌어 봐야 월세 5만원 내고 생활비 5만원 빼면 하나도 안 남아. 등록금 28만원은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입학때는 부모님이 여기저기 쥐어짜서 내 주셨는데, 앞으로 학기마다 손 벌려야 한다면 이거 너무 죄송하고.”
오석은 그 말에 또 다시 충격받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영이 부모님이 학비를 내주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연세대, 고려대 같은 대학의 1/4 밖에 안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학비조차. 더구나 하영은 학비며 생활비며 다 혼자 벌어서 졸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석은 그런 식으로 대학 다니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한 적 없었다. 학비와 생활비는 당연히 부모님한테서 나오는 것으로 알았다.
하영이 세상을 한참 더 산 선배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하영의 목소리가 더 꼬부라졌다.
“나, 그 동안 체육 시간에 너랑 수현이 둘만 같이 노는 거 정말 꼴 보기 싫었어.”
“미, 미안해.”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고. 너희가 잘못한 게 아니고. 그냥 서울 애들끼리 뭉치는구나 뭐 그런거지. 너랑, 수현이, 그리고 민경이 딱 셋만 어울렸잖아? 더구나 체육시간 테니스 할 때 너희 셋만 개인 라켓 가지고 오고. 너희 셋만 교수님이랑 치고. 너무 샘 났어. 그래서 나도 라켓 보러 가 봤다는 것 아니겠어? 싼 것도 3만원이 넘어. 네가 들고 왔던 라켓, 그거 상표까지 다 적어서 알아봤는데 10만원도 넘더라. 수현이 것, 민경이 것도 다. 그때 너희 셋 라켓만 팔아도 한 학기 등록금이었어.”
오석은 쥐구멍이든 수채구멍이든 찾아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하영이 운동권 학생이 되어가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런 세상에 화나지 않는다면 그건 바보 천치일테니까.
“너무 내 얘기만 했네. 그런데 권오석. 넌 우리 과 왜 들어왔는데?”
“비슷해. 어떻게든 서울대는 들어가야 하겠고, 점수 맞춰 가다 보니 여기로 왔네. 아버지는 연고대 절대 안된다고 하고.”
“하긴, 너 같은 애가 째째하게 교사 나부랭이 할 생각은 아니었겠지. 뭐 뻔하지. 독일 유학 갈 생각으로 왔지?”
“응. 그 생각도 좀 했어. 독문과랑 놓고 생각했는데, 어차피 배우는 건 같고, 교사 자격증도 주고 하니까. 별로 쓸 일은 없어도 없는 것 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그래. 열심히 공부해서 독일 가. 독일서 무슨 공부할건데?”
“문학, 예술 이런 거. 난 시 쓰고 소설 쓰면서 살아가고 싶어. 세상을 시와 소설로 더 아름답고 좋게 만드는 게 꿈이야. 물론 부모님은 독일 갔다 와서 교수 되길 바라지만. 문학 교수가 되는 것과 문학가가 되는 건 전혀 다르니까.”
“그럼, 교수하면서 글 쓰면 되잖아?”
“그게 과연 잘 될까 싶어. 모르겠어. 난, 내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 뭐가 되고 싶은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냥 어디라도 좋으니 전공이고 뭐고 따지지 말고 서울대만 들어가고 보자, 이러면서 12년을 학교 다녔고, 막상 들어오고 나니 아무 생각이 없어. 모르지 뭐. 이러다가 그냥 졸업하면 회사원이나 될지.”
오석의 대답이 갈수록 초라해졌다.
“그래도 넌 졸업 걱정은 안하네. 난 당장 다음 학기 걱정을 하는데.”
하영이 거의 눈물이라도 흘릴것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미안해.”
“넌 참 별 게 다 미안해? 미안하단 말을 벌써 몇번째 하냐?”
하영이 시무룩한 모습을 풀고 피식 웃었다. 쌍커풀 진 커다란 두 눈 아래로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그러더니 하영이 갑자기 카운터에 있는 아주머니를 보고 바로 그 작은 윙크와 손인사를 하며 말했다.
“저기, 사장님. 노래 좀 해도 되요?”
“그럼요. 학사주점인데.”
“고맙습니다.”
하영이가 아주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손바닥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탁 탁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저 산맥은 말 도 없이 오천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저 강물은 말 도 없이 오천년을 흘렀네. 온갖 슬픔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설악산을 휘휘 돌아 동해로 접어드니, 아름다운 이 강산은 동방의 하얀 나라.
동해바다 큰 태양은 우리의 희망이라. 이 내몸이 태어난 나라, 온 누리에 빛나라.
자유와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손으로, 역사의 숨소리. 그날은 오리라.
그날이 오면은 모두 기뻐하리라. 우리의 숨소리로 이 터를 지켜나가자.
곱상한 외모와 딴판으로 걸죽한 목소리였다. 거기에 소주까지 잔뜩 들어갔으니 절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석은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마음뿐, 클래식만 듣고 대중가요를 듣지 않는 오석은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알지 못해 그냥 듣고만 있었다.
“이 노래 몰라?”
“응. 처음 들어봐.”
“뭐? 진짜?”
“가요를 안 들어.”
“그럼?”
“클래식만 들어.”
하영이 잠시 신기하다는 듯이 오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노래가 신형원이라는 가수의 ‘터’라는 노래라고 알려 주었다.
오석은 집에 들어가는 길에 바로 신형원 2집 카셋트 테이프를 사서 워크맨 -아, 이것도 하영한테는 한 학기 등록금 소리 듣는 물건이다- 들었다. 하지만 막상 귀에 깊이 박혀든 노래는 ‘터’가 아니었다. 그 노래는 앨범 타이틀 곡이기도 한 ‘개똥벌레’였다.
‘친구가 없네.’
이 대목이 마치 이명처럼 박혀서 계속 들렸다. 모차르트를 들을 때도 들렸고, 잠자리에 들어도 들렸고, 수업 시간에도 들렸다. 대학 들어와서 결국 멀어져버린 정우를 떠올리자 ‘가지 마라. 나를 위해 한 번만 노래를 해 주렴.’ 이라는 대목이 가슴을 후볐다. 결국 ‘이렇게 울다 잠이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