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1987년 2부 여름 14화 권오석 3
3
다음 날 오석은 바로 외삼촌과 이모에게 전화를 돌렸다.
오석의 외삼촌에게는 중학교 다니는 딸이 둘, 이모에게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두 집 모두 그 정도 과외비는 얼마라도 쓸 수 있는 집이고, 안 그래도 오석에게 용돈 넉넉히 줄테니 와서 과외 좀 해 달라고 성화하던 참이었다.
오석은 두 분에게 사촌 오빠한테 과외 받으면 애들이 편한 마음에 앵겨 붙어 효과가 적다면서 하영을 소개시켜 주었다.
두 집 모두 첫 눈에 하영을 마음에 들어했다. 서울대학생이 예쁘기까지 한데 싫을 턱이 없었다.
그렇게 하영은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고 오석의 외가 과외선생이 되었다. 그리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외가의 보물단지가 되었다. 외할머니도, 외삼촌도, 외숙모도, 이모도 다들 하영을 예뻐하였고, 사촌 누이들도 모두 친언니처럼 따랐다. 하영도 오석의 외가집을 편하게 생각했고, 거의 가족 같이 지냈다.
이렇게 지난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빨리 지나간 모양이다. 수업이 끝났다. 사촌 누이 방 문이 열리더니 정은이 경은이가 뛰어나왔다.
“오빠!”
언니인 정은이는 그래도 중3이라고 점잖을 빼는데 중1인 경은이는 꺅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오석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천천히 하영이 나왔다.
“어, 오석이 왔네?”
하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오석도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외가집에서 만난 게 처음은 아니니 그것 때문에 어색한 것은 아니었다. 오석이 저녁 먹으러 외삼촌 댁 갔을때 수업 마친 하영까지 같이 식사한 날이 적지 않았다. 그럴 때는 하영이 그냥 사촌 누이들 중 하나로 느껴졌다.
때로는 약국에서 퇴근하는 어머니와 동생들까지 같이 식사 하기도 했다. 하영은 그럴 때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고 당당하고 당연하다는듯이 한 자리 차지하고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런데 오석은 그렇게 편하게 대해왔던 하영에게서 어색함을 느꼈다. 무엇이 둘 사이를 이렇게 어색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시험거부에 동참 안하고 수현과 단 둘이 시험 친 것 때문일 것이다. 하영은 6월 10일에도 6월 26일에도 진심이었으니까. 이한열이 사경을 헤맨다는 뉴스 보고 엉엉 울었던 아이니까.
“수업 끝났으면 저녁 같이 먹을까?”
외숙모가 생글생글 웃으며 서울 토박이 특유의 도도도도 거리는 톤으로 말했다.
그런데 하영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저, 죄송하지만 오석이랑 할 말이 좀 있어서 식사는 저희끼리 따로 나가서 하면 안될까요?”
그러자 외할머니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에그. 에미야. 눈치도 없이. 오석이가 우리 보러 왔겠냐? 얼른 보내 줘라.”
졸지에 오석이 하영이 과외 끝나는 시간 맞춰 데이트 하러 온 쪽으로 스토리가 정리되어 버렸다.
오석은 외숙모에게 등을 떠밀려 쫓겨나다시피 집 밖으로 나가야 했다.
막상 나와보니 딱히 갈 곳이 없어 무작정 ‘강남패션 1번지’라는 광고로 유명한 백화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사람이 타박타박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킥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화단 뒤로 후다닥 숨는 실루엣 두개가 보였다. 정은이 경은이 뒷 모습이라는 게 한 눈에 보였다.
둘은 화단 뒤에 숨어서 계속 킬킬 거리더니 결국 들켰음을 인정하고 튀어나와 “파이팅!” 하고 외치더니 후다닥 집으로 돌아갔다.
애들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백화점을 향해 걸었다.
오석의 오른팔과 하영의 왼팔이 약 15센티미터 거리를 두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와 친밀한 거리 사이의 애매한 거리.
“좀 궁금한게 있어서 따로 보고 싶었어.”
그 애매한 거리에서 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뭘까?
오석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불안을 털어버리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그냥 이실직고하는 것이다.
“나 시험 친 것 때문에 그래?”
이렇게 선수를 쳐 놓으면 오히려 다음 이야기가 편한 법이다. 그런데 의외로 하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걸 왜?”
“그거 아니야?”
오히려 당황한 것은 오석이다. 아니, 그럼 뭐지? 그런데 하영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솔직히 나도 가서 시험 치고 싶었는 걸? 분위기가 그래서 못 한거지.”
“너도 시험 치고 싶었다고?”
“너 갑자기 메아리가 된거야?”
“미, 미안.”
“하하. 또 미안하다고 한다. 오석아, 그거 알아? 내 평생 들어본 미안해 소리 중 절반이 너한테 들은거야. 참, 시험 말이야. 시험은 시험이고, 투쟁은 투쟁이고, 난 그렇게 생각했거든? 시험 치고 나서 시내 가서 싸우면 되잖아? 왜 시험 치고 싶은 사람까지 못 하게 막고 그래? 그래서 오히려 너랑 수현이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사실은 수현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넌 마음 약해서 혼자 시험치러 갈 성격 못되고, 수현이가 끌고 갔겠지만. 그치?”
“뭐, 그런 셈이야. 그런데 그거 아니면 따로 할 말이 뭔데?”
“돈 문제야. 이게 참 말하기 어렵네.”
“외숙모가 너무 적게 줘? 그럼 내가 잘 말해 볼게.”
“아니 아니, 그 반대야.”
“그 반대라면?”
“너무 많이 주셨어. 정은이, 경은이 둘 과외 하면 40만원 받는게 맞잖아? 그런데 어제 집에 가서 봉투를 보니까 60만원이 들어 있는 거야. 그래서 계산이 좀 틀리지 않느냐, 돌려 드리겠다고 했더니 괜찮다는 거야. 안 그래도 갈 때마다 저녁도 진수성찬으로 챙겨 주시고 그러는데, 그것 까지 계산하면 너무 미안해. 20만원 씩이나 돈을 더 받아도 되나 싶기도 하고. 혹시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야?”
이건 오석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사실 외삼촌네는 늘 인심이 후해서 세뱃돈도 깜짝 놀랄만큼 주곤 했으니 오석으로서는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하영은 당연히 깜짝 놀랐을 것이다. 60만원이라면 한 학기 하숙비가 그대로 굳어버릴 정도의 돈이었다. 만약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계속 했으면 여섯달 꼬박 일해야 겨우 벌었을 돈을 한 달 만에 번 것이기도 했다. 이건 외삼촌 댁에서 받은 돈만 계산한 것이고 이모네에서 받을 돈까지 보태면 한 달 만에 한학기 하숙비와 등록금이 바로 해결되어버린 것이다.
거금을 들고 덜덜 떠는 하영의 모습이 오히려 신선해 보였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고맙습니다 하고 말 일인데 하영은 마치 남의 돈이라도 가로챈것처럼 걱정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부끄럽다는 생각이 돌개바람처럼 떠올랐다. 어찌나 부끄러운지 하영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오석은 그 동안 부모님은 물론 외할머니로부터 적지 않은 용돈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썼다. 그리고 이모가 소개해준 과외자리 하나까지 보태서 학교 생활은 물론 취미 생활과 수현과의 데이트에도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지내왔다. 한 일이 없는데도 넙죽넙죽 잘도 돈을 받아 썼다.
그런데 하영은 주는 돈을 당연하게 받지 않았다. 이유가 있는 돈이고 늘 돈에 쪼달리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영이의 모습이 점점 다양해졌다. 전에는 예쁜 아이, 똑똑한 아이, 데모 좀 하는 아이 정도로 보였는데, 여기에 현명한 아이, 올곧은 아이, 존경스러운 아이의 모습이 추가되었다.
그래도 하영을 계속 고민 상태로 남겨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오석은 얼른 그 고민을 덜어주었다.
“부담 갖지 마. 외삼촌네 약국 한 번만 가 보면 하나도 안 미안해질거야. 그걸 약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민망해. 거의 제약회사나 다름없으니까.”
“그래도. 공돈 받는 거 별로 안 좋아.”
“공돈 아니야. 그 만큼 네가 열심히 한 거니까.”
하지만 하영의 얼굴을 보니 별로 납득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석은 그 얼굴 속에서 강한 자존심을 읽었다.
한 동안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하영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이거 너 아니었으면 못 했을 자리니까 너한테 20만원 줄게. 소개비로.”
“헉. 그건 좀 아니다.”
“그럼 이건 어때? 기왕 백화점 까지 왔으니까 오늘은 내가 근사한 저녁을 살게. 그래 봐야 내가 받은 거에 한참 못 미치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아. 고마워.”
“웬걸? 내가 고맙지.”
하영이 강남패션 1번지와 세상을 가로막고 있던 커다란 유리문을 밀었다.
아차차. 오석은 남자인 자신이 문을 밀어 주었어야 했는데 하며 당황했다. 하지만 하영의 재빠른 동작이 미처 손 쓸 사이를 주지 않았다.
하영은 남자가 문을 열어주고 여자가 도도하게 들어가고, 그런 그림이 싫었던 것일까? 심지어 하영은 계속 문을 잡고 서 있다가 오석이 백화점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문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고마워.”
오석은 뭔가 입장이 바뀐 느낌을 받으며 일단 인사를 했다.
“비테 쇤.”
하영이 그 특유의 서글 서글한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며 고개를 까딱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