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호가 길을 달렸다.
“유레카!” 하고 달리는 아르키메데스 처럼,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로 달리는 전령처럼 한 손에 신문지를 들고 달렸다.
1945년 8월 15일에 선조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심훈이 ‘그날이 오면’을 노래 할 때 이런 느낌을 미리 만끽했던 것일까?
방문을 왈칵 열었 젖혔다.
연철이 TV를 보고 있었다.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묘한 자세.
TV에서도 명호가 들고 있는 신문과 같은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기자회견. 대통령 직접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이 대통령 후보를 사퇴 하겠다고 선언하는 기자회견.
명호는 후다닥 방으로 들어와 TV앞에 앉았다. 봐도 봐도 물리지 않을 뉴스다.
TV속의 노태우가 말했다.
“국민에게 항복하는 마음으로.”
항복, 항복이라. 놈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찻집 주인이 “오늘은 기쁜 날. 차값은 무료입니다.”라고 가게 문에 써 붙인 사진도 방송에 나왔다.
1987년 6월 29일은 역사책에 기록되는 그런 날이 될 것이다. 명호는 그 역사의 순간, 그 시간 한 가운데 있었던 것이 자랑스러웠다. 심지어 미현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연철의 표정이 영 뾰루퉁 했다. 마치 저축 해 준다는 핑계로 부모에게 세배 돈 빼앗긴 아이들의 입 내미는 표정 같았다.
명호가 보다 못해 몇 마디 던졌다.
“너는 어찌 그리 눈을 빼딱하니 가자미처럼 뜨고 그러냐? 군사 파쇼 정권이 항복했다고 하는데 기쁘지도 않냐?”
명호가 이렇게 말하자 연철이 무려 콧방귀를 킁 하고 뀌었다.
“뭐냐? 그 콧방귀의 뜻은?”
“항복? 쳇. 누가 누구한테?”
“그거야 당연히 노태우가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냐? 국민에게 항복한다고?”
“젠장. 넌 방학인데 집에 안 가냐?”
연철이 삐딱한 자세에서 아예 벌러덩 누워버렸다.
“아따, 이놈이. 생뚱맞게 뭔 소리여? 남이사 집에 가건 안가건. 그라고 지금 좋은 날에 먼 놈의 심술이냐고?”
“심술? 내가 뭔 심술?”
“오늘은 말이다. 제2의 4.19가 아니겠냐? 국민의 힘이 무엇인지 저 놈들이 마침내 깨달았다는 것 아니겠냐? 이제 저 놈들도 국민 무서운 것 알아버렸응게 함부로 까불지 못할 것 아니겄냐 이 말이다.”
“아이구. 퍽도 그러겠다.”
“아따, 너 오늘따라 어찌 그래 삐딱하냐?”
“에이. 짜증나.”
연철이 벌떡 일어섰다.
“웬 짜증?”
“야, 너도 이제 대학물 그만큼 먹었으면 뭣 좀 알 때도 되지 않았냐?”
“그래. 난 무식하고 너는 유식하다. 되었냐?”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신문을 꼼꼼하게 읽어보란 말이다. 그리고 항복인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라고.”
“알았다. 한번 읽어 보마. 읽어보면 될 것 아니냐? 그런데 그것 가지고 왜 역정을 내고 지랄이냐?”
“역정은 무슨 역정. 하여간 신문 읽고 생각 좀 하고 있어. 난 나갔다 올테니까.”
“야, 어디 가냐?”
“너만 여자 만나고, 난 여자 안 만나냐?”
연철이 대답도 귀찮다는 모습으로 씩씩거리며 나가버렸다.
“아따. 저 자식이 어찌 저런다냐?”
명호는 당연히 즐거워야 하는 오늘 같은 날, 연철이 왜 저러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러는 동안 텔레비전 뉴스는 6.29 선언 자화자찬 코너를 마치고 잠적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재불 바이올리니스트 지네트의 내한 공연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지네트라.
클래식 음악이라고는 평생에 1시간도 들어 봤을까 말까 한 명호도 이름과 얼굴을 알 정도로 너무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다. 그런데 화면에는 명호 또래의 자그마한 소녀가 나올 뿐이다. 그래서 더욱 감탄스럽다. 겨우 열 아홉에 저렇게 세계 최고 소리를 들으며 사는 애들 머릿속이 궁금했다. 같은 뇌가 들었는지 다른 뭐가 들었는지.
그러고 보니 명호는 저 지네트의 연인인지 절친한 파트너인지 하여간 그렇다고 하는 디누와 같이 버스 타고 시내에 갔고, 6월 민주항쟁에 함께 했고, 등에 업고 백병원까지 달렸다. 지네트가 뉴스에 나오는 거 보니 조만간 디누도 나올 모양이다. 명호는 자신이 그런 유명인사와 통성명하고 친구 먹은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성진. 명호와 같은 대학교 1학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녀석.
퍼뜩 성진이라면 연철이 놈이 왜 저따위로 반응하는지 가르쳐 줄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진이는 이미 싸움이 시작되는 6월 10일에 벌써 죽 쒀서 개 준다, 하지만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는 둥 김빠지는 소리를 했었다.
명호는 생각 난 김에 바로 방을 나섰다. 막상 나서고 보니 성진의 연락처도 모르고 어떻게 찾겠다는 것인지 막막했다. 사실상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 나왔으니 어딘가는 가야 했다. 그런데 명색이 방학이라 학교에 가고 싶지는 않고, 그런데 명색이 또 학생이라 떠오르는 곳이라곤 서점 밖에 없었다.
명호는 자취방에서 녹두거리를 내려와 도림천 다리를 건넜다. 인문사회과학 서점이라고 간판을 달고 있는 ‘열린글방’이 보였다.
이래 저래 자주 가는 곳이다. 책방이 있는 건물 2층에 있는 ‘소문난 돼지구이’라는 고기집은 가고 싶은 곳이다. 언제 나도 고기 구워 먹나, 저기서 고기 구워 먹는 팔자는 어떤 팔자인가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하도 쳐다봐서 간판이 각인되어 있을 정도였다.
책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닥다닥 서가에 붙어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방학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서가에 가득 꽂혀 있는 책들은 거의 대부분 이념 서적들이었다. 아직까지는 이름만 봐도 가슴이 덜컹 하는 레닌, 모택동 이런 이름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출입문과 서가 사이에 걸려 있는 코르크 보드에는 메모지들이 빽빽하게 핀에 꽂혀 있었다.
-정민이 형 왔다 가요. 7월 2일 한시에 또 올게요, 수민
-미선아 나 고향 간다. 전화 한 번 해라. 051-934-3455, 국환
이런 식으로 소식을 주고 받았다. 명호도 여기에 소식을 남길 생각이었다. 여기가 필시 진이라는 참새의 방앗간일테니 말이다.
명호는 코르크 보드 옆에 꽂힌 볼펜을 꺼내 메모지에 몇 자 적었다.
-To 성진, 나 박연철 룸메이트 김명호다. 궁금한게 있어서 얘기 좀 하고 싶으니 여기 연락처 좀 남겨주기 바란다.
대충 몇 글자 끄적끄적 적고 있는데 문득 반대편 서가에서 낯 익은 얼굴이 보였다.
명호는 0.1 초만에 쓸모 없어진 메모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성진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뛸듯이 반가웠지만 다른 곳도 아닌 책방이기 때문에 “어이, 진이 아니냐?” 이렇게 부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명호는 책 읽는 진,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 학우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다가가 조용히 그 옆에 섰다.
헛기침을 한다거나 등의 기척도 일체 하지 않았다. 진이 자신의 존재를 먼저 알아차릴 때 까지 가만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은 1초도 지나지 않아 명호의 존재를 알아챘다.
“어, 명호?”
“그래.”
“너도 책 보러 왔냐?”
“아니.”
“약속 있어?”
“그것도 아니고, 사실은 너 한번 볼라고 왔다.”
“내가 여기 있는건 어떻게 알고?”
“몰랐다. 그냥 메모나 남기려고 왔는데, 운이 좋았다.”
“그러게? 이거 인연인가? 그런데 난 왜?"
“뭣 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나한테?”
“그려.”
“뭔데?”
“6. 29 선언이 말이다.”
“6. 29 선언?”
“내가 우리가 이겼다고 좋아했더니 연철이 녀석이 골을 내고 나가 버리더라. 오히려 우리가 당한 거라 그러면서.”
“아하.”
“그냥 아하, 할 일이 아니고.”
“미안.”
명호가 맺힌 것이 많은지 말을 쏟아냈다.
“오늘이 어떤 날이냐? 국민이 똘똘 뭉쳐 싸워 독재정권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날 아니냐? 그러니까 세상에 오늘같이 즐거운 날이 또 어디 있겠냐? 오늘은 좋은 날 그러면서 밥값인지 차값인지 안 받겠다는 상인도 있고. 그런데 연철이 녀석이 왜 저러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다. 그래서 똑똑한 진이 너라면 알 것 같아 물어보고 싶었다. 여기 오면 혹시 있을까 싶어 왔더니 여기가 방앗간이었구마.”
진이 피식 웃었다.
“하하. 방앗간? 그럼 난 참샌가? 참새 머리로 생각해 보면, 음, 연철이 말이 맞아. 이건 승리도 뭐도 아니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그럼.”
“그럼, 왜 그런지 좀 말해 주지 않겠냐?”
“음, 이거 여기서 이렇게 서서 할 게 아니라, 날도 더운데 어디 가서 시원한 거 마시면서 이야기 하자.”
명호는 진이 ‘시원한 거’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반사적으로 주머니로 가는 손이 부끄러웠다. 주머니로 가 보나 마나 빈털털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진의 표정은 너무 편안했다.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어쨌든 명호에게는 “아니, 그냥 여기서 이야기 하자, 뭐 사 먹을 돈 없다.” 이렇게 말할만한 배짱은 없었다. 경찰과 치고박고 싸우는 겁 없는 명호를 이렇게 한심하게 찌그러뜨리는 것, 그게 바로 가난의 힘이었다. 돈도 없는 주제에 진이 가자는 대로 따라 갈 수 밖에.
진은 명호를 이끌고 명호가 방금 건너왔던 도림천 다리를 다시 건너 녹두 거리 쪽으로 갔다. 명호도 줄래줄래 따라갔다.
학사주점들이 있는 구역을 지나 베리 라는 이름의 카페, 엘리트 호프 라는 맥주집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던 진이 결국 카페 베리로 명호를 끌고 들어갔다.
명호는 여기를 몇 번 오가며 보기는 했지만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다. 학교 자판기로 100원이면 뽑아 마실수 있는 커피며 음료수를 700원씩이나 주고 마신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700원이면 공대 간이식당, 일명 공대 깡통 기준으로 세끼 밥값이 아닌가?
처음 들어와 본 베리는 카페인지 레스토랑인지 헷갈리는 조금은 어두 침침한 공간이었다.
카페 주인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기숙사 사감 같아 보이는 엄격한 표정의 여자분이 카운터에서 무뚝뚝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웬지 주인이 “어서오십시오.” 하는 대신 손님이 “다녀왔습니다.” 해야 할 분위기였다.
테이블 위에 주스 한 잔씩 놓이고 나서야 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6.29 선언 이야기 하고 있었지?”
“그래.”
“넌 우리가 이겼다, 이랬지?”
“당연한거 아니냐? 4.19 처럼 민주주의가 또 한 번 이긴 거 아니냐?”
“민주주의, 민주주의라. 좋아. 그럼 한 번 들어보자. 민주주의가 대체 뭔데?”
“그거야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아니겠냐?”
“그래? 그런데 국민이라고 하면 그거 너무 애매한 거 아닐까? 국민에는 전두환, 노태우, 장영자도 다 포함되는데?”
“음. 그건 좀 그렇다.”
“좀 그렇지? 그럴 수 밖에. 데모크라시의 데모는 국민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의 일부를 말하는 거니까. 그러니 전두환, 노태우는 절대 데모크라시의 데모가 될 수 없지.”
“그건 나도 안다. 데모크라시가 데모스와 크라티아의 합성어란 거. 그런데 데모스가 결국 국민 아니냐?”
“아니, 아니. 데모스는 아리스토스, 즉 귀족인 특정 집단의 반대를 말하는 거야. 그러니 민주주의는 귀족, 특권층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 인민이라고 불러도 좋고 민중이라도 불러도 좋은 바로 그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정치란 뜻이지.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 노태우 같은 놈들은 민주의 민에서 배제되는 것이지.”
“그럼 이병철, 정주영 같은 사람들도 빼야 하는 것 아니냐?”
“당연하지.”
“그럼 누가 데모스에 들어가냐? 결국 일하는 사람들 아니겠냐? 노동자, 농민….”
“그래. 꼭 노동자, 농민으로 한정 지을 필요는 없지만, 일단 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겠지. 그런데 6. 29 선언에서 대통령 직선제 말고 어떤 내용이 있는지 한 번 들여다 볼래?”
“대통령 직선제, 지방 자치제, 언론 자율화….”
“거기 노동조합에 대한 내용이 보이냐? 노동 3권에 대한 내용이 보여?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한 줄이라도 보여?”
“글쎄다. 딱 부러지게 보이는 건 없다.”
“그럼 이놈의 6. 29 선언은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한 것일까? 민주주의의 민, 이 민에게 얼마나 보탬이 되는 것이냐는 것이지.”
순간 명호의 얼굴이 곤봉으로 한대 얻어맞은 것 처럼 확 바뀌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듣고 보니 네 말이 일리는 있다. 지금 보니까, 여긴 노동자 농민에게 이득 될 것은 하나도 안 들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쓸 데 없는 내용으로 무시해 버리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100미터를 전진하든 1미터를 전진하든 전진은 전진 아니겠냐?”
“허허허허.”
진이 큰 코를 흔들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주스를 쭈욱 빨아 마셔 버렸다.
“내가 뭔 말을 잘못했냐?”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니까. 뭐 순진한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
순진하다고? 그러고 보면 진이 이 녀석은 걸핏하면 순수, 순진 이런 말을 쓰는데, 지금 시점에서 이 말은 명호에게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명호는 슬슬 골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또 먼 소리냐?”
“바로 너처럼 행복해 하는 학생들을 보고 하는 소리다.”
말투를 들어보니 확실히 칭찬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명호가 핏대를 올렸다.
“너도 그렇고 연철이도 그렇고 윤리과 아그들은 하나같이 어찌 이리 말을 뼁뼁 돌리냐? 그냥 까놓고 말해 봐라.”
“까놓고? 좋아. 까놓고 얘기할게. 6.29 선언을 전두환이 하지 않고 노태우가 했다. 자, 여기에서 뭐 안 느껴지냐?”
“전두환이나 노태우나 그 놈이 그 놈 아니냐? 언 놈이 선언 하건 마찬가지 아니겠냐?”
“마찬가지가 아니야. 자, 생각해 보자. 4.13 호헌 선언한게 누구야? 전두환이야. 그럼 호헌 철폐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하겠습니다 이 말을 누가 해야 해? 전두환이야. 그랬다면 네 말마따나 국민이 이겼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현재 대통령도 뭣도 아닌 노태우가 그랬어. 노태우가 무슨 권한으로 호헌을 철폐하고 직선제 헌법을 만들겠다는 거야?”
“어, 그러네?”
“6.29 선언이라고 하는 건 결국 뭘 한다 이게 아니라 노태우가 전두환에게 뭘 해 달라고 청원하겠다는 선언이야. 그리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겠다 이런 조건이고. 물론 호헌은 철폐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겠지. 하지만 그 모양새는 전두환이 국민에게 항복해서가 아니라 자비롭게도 노태우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그렇게 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고.”
“어라, 노태우가 영웅 되네? 전두환은 대인배 되고?”
“아까 네가 그랬지? 그놈이 그놈이라고. 그런데 이젠 아니야. 전두환은 그 놈인데 노태우는 이 분이 되셨다고.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어.”
“거기서 더?”
“화이트칼라, 대학생. 이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 싸울 동기가 없어. 대통령 직선제 하겠다잖아? 언론 자유화 한다잖아? 그럼 된거잖아? 하지만 노동자, 농민은? 민주 할 때 진짜 민, 그들은 뭘 얻었지?”
순간 명호는 눈 앞이 번쩍했다. 누가 방망이로 뒤통수를 한 대 친 것 같았다. 명호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따 이건 완전히 고의 4구 아니냐?”
기숙사 사감 같은 카페 주인이 안경 너머로 명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진이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 눈총을 함께 맞아주었다.
“우하하하하! 네 말이 맞다. 육이구 선언은 고의 4구야. 고의 4구. 저놈들은 대학생들이나 화이트칼라가 어려운 상대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고의 4구로 걸려 보내고, 그 대신 다음에 등장할 노동자들 막는데 힘을 쏟아 부을 생각이야. 대단해 명호야. 넌 지금 이 정국을 너무도 정확히 봤어. 너무도 정확히.”
“에이. 장님 문고리 잡기다. 너무 그러지 마라. 쪽팔리게.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 말 아니냐?”
“그렇지. 고의 4구로 출루한 주자는 도루를 하던지, 리드를 길게 하던지 하여간 어떻게든 투수의 신경을 긁어서 타석에 선 타자를 도와야지. 주자는 학생, 타자는 노동자, 투수는 바로 자본가와 파쇼정권. 다만 열심이 지나치면 화가 되지만.”
“그건 또 뭔 소리냐?”
“무리한 도루를 한다거나 너무 깐족 거리다 견제구에 걸려버리거나 하면 안 된다는 뜻이지.”
“그런데 지금 노동자들은 암 껏도 안 하고 있지 않냐?”
“조금만 두고 봐. 3번 타자를 고의 4구로 걸린 다음 등장하는 4번 타자의 거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릴 테니까.”
진이 살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진의 움켜쥔 주먹을 슬쩍 봤음에도 불구하고 명호의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못 알아 들은 건 아니었다. 학생의 싸움은 끝나고 지금부터는 노동자의 싸움이라는 말.
그런데 명호의 문제는 이거다.
어째서 학생이 노동자 싸움에 끼어들어야 하는가? 노동자들이 가난하니까 불우이웃 돕기라도 하자는 말인가?
마침내 명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진아. 너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니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서도, 나는 아니다. 우리 집은 솔직하니 말해 노동자만도 못하다. 우리집 겁나 가난하단 말이다. 우리집 식구들 다 나만 쳐다본다. 내 처지는 노동자들이 어렵다고 돕기는 켜녕 우리 식구 중 누구라도 어디 가서 노동자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단 말이다.”
“노동자가 가난하고 어려워서 돕는다? 이런이런. 명호야, 넌 지금 완전히 잘못알고 있어.”
“어째서?”
“넌 지난 6·10, 6·26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나가서 열심히 싸웠냐?”
“민주주의를 위해서지.”
“민주주의가 너랑 무슨 상관인데? 응?”
“아니, 그것이 무슨 소리냐?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국민 된 도리이고 또 권리가 아니냐?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에 이해타산을 같다 붙여서 쓰겠냐?”
“좋아. 좋아. 흥분하지 말고. 그럼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노동자가 승리하지 않는 한 네가 그렇게 바라는 민주주의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어째서?”
“생각해 봐. 일하는 사람일수록, 생산하는 사람일수록 더 어렵게 산다. 역사과니까 네가 더 잘 알지 모르겠지만 사마천도 탄식하면서 악인이 잘살고 선인이 고통을 받으니 과연 하늘이 있기나 하냐면서 눈물을 흘렸지? 그런데 그로부터 수 천 년 뒤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 모양이다. 넌 이런 상황에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딱지만 붙인다고 해서,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다고 해서 민주주의라는 거룩한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까?”
“그것은…. 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중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고 하는 없는 것인데, 너 하나 출세해서 너희 집안을 가난에서 탈출 시키는 것과, 우리나라 자체를 바꾸어서 너희 집 뿐 아니라 모든 노동자, 농민을 가난에서 탈출 시키는 것. 이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래?”
“그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두 번째 것에는 이미 첫 번째 것이 포함된 것 아니냐? 선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않냐?”
“하지만 난이도에 차이가 있지.”
“그렇겠지? 두 번째 것이 겁나게 어렵겠지?”
“그 뿐 아니라, 정작 자신은 그 열매를 맛도 못 볼 수 있지.”
“그런데 너는 그걸 왜 하냐?”
“나?”
“그래. 너 말이다. 내가 정우나 너 같은 부잣집 아그들한테 늘 궁금한게 그거다. 나야 뭐 뭐 두 번째 것을 선택해도 이상할 것 없다. 막말로 밑져야 본전 아니냐? 성공하면 좋은 세상 되어 우리 집도 잘 사는 것이고, 실패하면 그냥 제 자리 걸음이고. 하지만 너는? 그냥 독일 유학 가서 철학박사 따서 돌아오면 아버님 연줄 있겠다, 그냥 탄탄대로 아니냐? 좋은 세상이 온다고 너한테 특별히 더 좋아질 것이 뭐가 있냐?”
“뭐,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가난한집 아이들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어째서?”
“일단 이 괴물 같은 국립대학에 들어왔으니까. 굳이 첫 번째니 두 번째니 따질 필요 없단 말이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그래. 모르겠지. 그게 정상이야. 허허허.”
진이 웃었다.
“어찌 웃냐?”
“역시 학생운동은 오래 할 만한 게 못되는 거란 생각이 들어서. 너가 궁금해 하는거,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내가 왜 민주주의니 좋은 세상이니 하고 있는지. 굳이 말한다면 난 철학도고, 또 철학은 현실과 유리된 신선놀음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현실에 치열하게 참여하고 싶은 거라고 할까? 내가 면밀히 분석하고 거기에 따라 예측한 현상이 실제로 나타나면 그걸 보는 것도 즐겁고, 설령 전혀 예측하지 않은 일이 발생해도, 왜 내 예측이 틀렸는가를 성찰하고, 이 일이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 다시 한 번 예상해 보고. 뭐 그런 거지.”
“정우는? 정우는 뭘 얻지?”
“정우는 참여함으로써 예술 하는 거지 뭐. 참여함으로써 많은 소재도 얻을 수 있고, 또 경험과 감성이 풍부해지니까 연주도 훨씬 성숙하게 할 수 있는 거고. 화석같이 굳어버린 음악이 아니라 살아서 펄펄 뛰는 음악을 할 수 있는 거고. 뭐, 이런 걸 얻을 수 있겠지. 사실 이건 아주 값진 거거든.”
“순 신선 놀음!”
“신선 놀음?”
“그려. 신선 놀음 아니냐? 노동자들은 삶을 위해서 싸우는 것인데, 너나 정우는 그 싸움을 가지고서 철학하고 예술 한다는 말 아니냐? 그러니 그것이 신선 놀음 아니냐?”
명호는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늘 이런다. 말을 좀 돌려서 해야 쓸텐데 꼭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리고 후회한다.
“미안하다. 말이 좀 심했다.”
얼른 사과 했지만 진은 전혀 사과를 받을 태세가 아니었다. 화가 안 풀려서가 아니라 애초에 명호가 한 말에 별로 마음 상한 것 같지도 않았다. 독일에서 살다 와서 그런가?
오히려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한 긍정의 뜻을 드러냈다.
“신선 놀음 맞다. 그래. 어쩜 그동안 난 투쟁을 유희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나는 다만 그 어려운 투쟁을 신선놀음처럼 즐기는 네가 너무 신기해서 한 말이었다. 그런 거 아니다.”
“됐어. 네 맘 알아.”
진이 손을 살짝 흔들며 가볍게 웃는다.
“내 마음?”
“너 한테는 이게 결코 신선 놀음이 되어선 안되겠지?”
아무래도 진이 말로 끝장을 볼 모양이다. 그렇다면 명호도 솔직해지는 수 밖에 없다.
“그래. 나같이 없이 사는 놈한테는 그것이 절대 신선 놀음이 될 수 없는 문제다. 혼자 잘 사냐 다 같이 잘 사냐 이건데, 아무래도 난 두 번째를 고를란다.”
“그래? 진심이야?”
“난 빈 말 안한다.”
“너 지금 이른바 빨갱이 카드 뽑았다는 거 알지?”
“그 정도는 이미 안다. 하지만 빨갱이다 퍼랭이다에 어디 선악의 의미가 있겠냐? 난 빨강도 파랑도 다 세상 좋게 만들자는 좋은 생각이라고 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처지에는 레드카드를 뽑을 수밖에 없다.”
말 하면서도 명호는 자신이 대체 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진의 웃음소리가 머리속을 맴돌 뿐이었다. 대학 와서야 처음 구경했던 대한 극장 서라운드 입체음향처럼 360도 회전을 하며 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진과 헤어져 집에 돌아오는 내내 명호는 그 웃음소리를 떨쳐 내려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회전시켜 가며 걸었다. 그렇게 어이없는 모습으로 방에 돌아오니 밥상을 펼쳐 놓고 책을 읽고 있는 연철이 뒷모습이 보였다.
얇고 왜소한 등판이다. 심지어 조금 굽기까지 했다. 하지만 창백한 연철의 얼굴 색과 의외로 잘 어울렸다.
“이제 오냐?”
연철이 녀석, 사람 들어오는데 돌아 보지도 않고 등으로 인사했다. 그래도 인사는 했으니 대답은 해 주어야겠다.
“그래. 넌? 청춘 사업 잘 했냐?”
“뭐, 그런데로. 그나저나 생각 많이 해 봤냐?”
“생각도 많이 하고, 진이 만나서 강의까지 들었다.”
“그럼 너도 빨갱이 되겠군.”
“아따. 자식 무슨 말을 고따위로 하냐?”
“진이는 사회주의를 퍼뜨리고 다니는 소크라테스니까.”
뭔 말인지 도통. 명호는 윤리과 놈들은 쉬운 말도 어렵게 한다고 생각하며 육이구인지 속이구인지 하루를 마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