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386 담론이 유행이다. 20-30대들은 386 세대를 꿀 빠는 세대의 상징처럼 이야기 한다. 민주화에 기여한 바는 인정하지만 그거 하나로 너무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젊은 세대를 가로막다 못해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도 다만 과거의 그림자 이자 추상적 구호일뿐, 정작 그들이 실제 삶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킬 때만 해도 진보와 혁신의 코드와 같았던 386 이라는 숫자는 이제 기득권과 위선의 666이 되어 버렸다. 조국 교수의 등장, 영광, 그리고 몰락은 다만 한 개인의 일이 아니다. 386이라는 숫자가 명멸하는 과정을 인격화 한 것이다. 토템의 나라이니 만큼 386 세대를 대표하는 살아있는 우상, 나아가 살아있는 제물이 필요했던 셈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정작 386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루어지는 이러한 담론에서 한 발 물러나 있다. 현재 386 세대를 가장 격렬하게 비난하는 세대는 60대 이상 세대와 20-30대다. 20-30대가 386 세대를 기득권, 위선의 코드로 비판하고 있다면 60대는 좌파 이념에 매몰된 의심스러운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이들에 맞서 386 세대와 그들이 대변했던 이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집단은 엉뚱하게 40대, 구체적으로는 70-76년생들이다. 1990년부터 1996년 연세대 사건을 정점으로 학생운동이 무너질 때 까지 대학을 다닌 세대들로 이른바 ‘강경대 세대’라고 불리기도 하는 세대다. 분명 거기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그들에 속하지 않는 50대인 나로서는 뭐라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당사자들인 50대는 침묵하고 있을까? 침묵하지 않는다. 다만 당혹감 속에 모색하고있을 뿐이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아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신과 386의 일반적인 정서는 무관하다고 선을 긋고 있던가. 즉 386세대는 지금 혼란에 빠져있다. 분노, 회한, 당혹, 부끄러움, 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실 386 세대 중 그 청년기의 삶과 은퇴를 앞둔 지금의 삶 사이를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단절되었다. 마치 1989년을 계기로 역사가 서로 단절되어버린 중국, 러시아처럼.
지금의 40대들이 당사자인 50대 보다도 386과 그 이념, 운동에 대해 더 적극적인 옹호자로 나서는 까닭은 어쩌면 그 단절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386 세대를 다만 영광의 그림자로 만났다. 그들은 그 전설과 신화가 아직 힘을 남겨두고 있는 시기에 대학을 다녔다. 그 전설과 신화가 마치 일제강점기나 6.25 이야기처럼 역사가 되어버린 시기에 대학을 다닌 젊은 세대와는 다른 것이며, 실제 그 시기를 살면서 그 빛 뿐 아니라 그림자까지 경험한 당사자와도 다른 것이다.
따라서 386 세대를 놓고 벌어지는 이런 저런 담론이 불필요한 사회 갈등과 분열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당사자가 입을 열어야 한다. 당사자가 자신의 현재의 삶과 그 때의 삶을 어떻게든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엮어서 보여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처절한 반성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이때 반성은 “잘못했어요.”의 의미가 아니라 되돌아 보며 그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는 뜻이다.
나는 87학번이다. 87학번은 이른바 386 세대의 정점에 해당된다. 그 이전의 선배들은 주로 뼈아픈 탄압과 통곡의 정서를, 그 이후 후배들은 이미 민주화가 이루어진 다음의 과감한 이념적 전진을 공유하고 있다면 87학번은 탄압과 죽음과 통곡에 이은 승리와 전진, 그리고 그 타락과 몰락까지 골고루 경험했다. 386 세대를 대표하여 기나긴 반성문을 작성하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앞으로 틈날 때 마다 이 반성문을 써 내려가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