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으로서 정치
일단 미리 면피부터 한다. 나는 독창적인 정치사상을 펼칠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위인들의 정치사상은 많이 공부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펼칠 이야기들은 내 생각이 아니라 그 위인들의 정치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그 중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한나 아렌트, 그리고 로버트 달 등을 많이 참고했다. 그러니 이 글이 마음에 안 들면 나 말고 그들에게 따지라.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는 엉망이다. 엄밀히 말하면 정치가 엉망인 것이 아니라 아예 정치 자체가 실종되고 있다. 정치는 인간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성, 다원성에서 분출되는 이해상충과 가치상충을 조정하는 과정이다. 만약 이 과정이 없으면 이 충돌은 무력으로 정리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정치는 사라지고 오직 폭력과 굴종만이 남게 된다.
심지어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두환조차 억압 기관만으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모든 독재자들은 억압 기관보다 각종 선전 기관, 교육 기관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 그걸 교육이 아니라 세뇌라 불려야 하지만 말이다.
마오쩌뚱은 수많은 뇌 빻은 소리를 남겼고, 수천만명의 중국 인민을 죽음으로 몰고 갔고, 중화 5천년의 문화유산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인물이지만, 그 중 최악의 헛소리를 뽑으라고 한다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꼽을 것이다. 정작 그렇게 말해 놓고 자기 자신도 총구로부터 권력을 얻지 않았다. 산수만 할 줄 알아도 총구는 오히려 장제스가 훨씬 더 많이 가졌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마오쩌뚱이 얻은 것은 총구가 아니라 권위였다.그 권위는 산적한 여러 어려움과 혼란을 장제스보다 더 훌륭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민의 믿음이었다. 인민은 마오쩌뚱의 총구를 보고 그를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형적인 군관인 장제스야 말로 철저히 "총구에서 권력이 나온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 때문에 망했다.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권위에서 온다.그 권위는 사람들이 부여하는 정당성에서 온다. 정당성은 그 권력 주체가 행하는 조정의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사람들의 암묵적인 합의다. 따라서 권력에 복종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들 스스로에게 복종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러한 정당성에 근거한 권력이기에 갈등 상황의 사람들이 그 조정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정치다.
그런데 다양성, 다원성은 인간의 조건이다. 다수의 사람이 모여 사는 한 반드시 이해와 가치의 충돌이 일어난다. 이 충돌을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같이 사는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하는 한 충돌의 조정과정인 정치가 필수적이다. 모두 알다시피 사람은 공동체를 이루는 동물(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일개 사람은 “인간 이하의 존재이거나 인간 이상의 존재다.” 따라서 이 충돌의 조정에 실패하면 무력으로 어느 일방의 완전한 복종 혹은 파괴나 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진다. 동아시아 전근대 역사를 보면 왕실이 권위를 상실하면 순식간에 나라가 여러개의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분열되어버리는 일을 반복했다.
이 중 이해의 충돌은 결국 누가 더 많은 자원을 분배 받느냐(혹은 덜 일하느냐)의 문제다. 이는 그 순간 순간의 분배 양에 대한 불만 보다는 분배의 규칙에 대한 불만이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가치의 충돌은 주로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방향, 도덕의 기준 같은 것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의 충돌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걸핏하면 유혈충돌로 발전하는 종교간의 갈등, 그리고 진보 보수의 이념 갈등이다.
이 분배 규칙에서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분배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좌파, 모든 구성원이 저마다의 자격과 기여에 따라 분배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우파가 된다. 물론 이 좌파와 우파는 이념형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좌파와 우파 사이 어딘가에 있다. 가치 충돌에서 현재의 가치 기준을 유지하고자 하면 보수, 바꾸고자 하면 진보가 된다. 정치는 바로 이 좌/우, 보수/ 진보의 두 축이 만들어내는 메트릭스 상에서 발생하는 충돌을 조정하여 동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과정이다. 겉 보기에는 매우안정적으로 보이는 정치조차 실제로는 복잡하고 일촉즉발인 여러 충돌들이 끊임없이 조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어느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악”이나 “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정치가 흔들린다. 즉 입장이나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니라 절멸해 버려야 할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어떤 조정도 필요 없게 되며, 상대방이 완전히 절멸해 버리지 않는 한 어떤 균형 상태도 용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싸우지 않는 상태”즉 “악”이나 “적”을 공격하고 있지 않는 상태는 굴종의 상태이며 불의의 상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정치학>에서 정의를 구체적인 덕목에서 찾지 않고, 서로 다른 것들이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찾은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이 ‘정의’에 구체적인 내용을 넣어 버리게 되면 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 그것과 다른 내용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을 ‘불의’로 규정하게 되며, 결국 파괴와 살상을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게 된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정치가 실종되고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의 진보진영은 보수를 조정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제거해야 할 적폐로 본다. 마찬가지로 보수는 진보를 몰아내야 할 악으로 본다. 이런 나이브한 사고방식을 심지어 국제정치에까지 끌어 들인다. 가령 우리나라 정부는 일본과의 충돌이나 갈등을 조정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으며 완전히 상대를 굴복시켜야 할 사안으로 본다. “어느 정도 수준”에서 서로 만족하고 물러서는 정치가 설 자리가 없다. 심지어 지도적 위치에 있는 정치인이 “죽창가”를 들먹이며 “토착왜구”라는 혐오성 발언까지 일삼고 있다. 상대를 “토착왜구”로 보는 세력과 “빨갱이”로 보는 세력이 서로 진보와 보수라는 타이틀을 꿰차고 정치진영을 이루고 있으니, 여기에는 도무지 정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 어느 한쪽의 폭력적 절멸 혹은 공동체의 해체와 무질서라는 길이 열린다. 현재 상태로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이 위기를 극복할 길은 결국 진보와 보수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진보는 무엇을 의미하며 보수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기들의 그러한 입장이 어떤 사고방식과 준거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반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상태는 서로 자기들의 주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저쪽은 나쁜 것들. 사악한 것들”로 규정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고 보자는 정치실종의 상태다. 이 상태가 오래 가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진보는 무엇이고 보수는 또 무엇일까? 이제 그 근원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져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