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이 시작될 때, 나와 한가지를 약속했다.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라는 책 제목을 보고(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결심을 굳혔다. 1년간 단 한 벌의 옷도 사 지 않기로. 게다가 이미 너무 많은 옷이 있기에 1 년 정도 옷을 사지 않는 것은 큰 일도 아니었다. 이미 수십년간 축적한 많은 옷이 있기에 당연히 옷을 안사도 불편함이 없다. 새옷은 잠시 심리적 허기를 메우는 사탕이었을 뿐이다. 물론 초반에 유혹이 몇번 있었지만 1년을 하기로 했던 프로젝트는 어느덧 2년이 지났다.
그 약속을 지키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옷을 사고 안 사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옷이라는 주제로 내게 있던 한 욕망이 소멸하는 과정을 경험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돈 절약의 문제가 아니고 그간 내가 얼마나 작은 물결에 휩쓸려 옷을 샀는가를 느낀다. 하나의 불필요한 욕구가 맥을 못 추고 사라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중 이다.
자기 훈육. 정신과 의사 스캇펙이 강조했던 개념이다.
스캇펙은 진정한 자기훈육은 비본능적인 것을 제2의 본능이 되도록 스스로를 교육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에게 좀더 쉬운 말로 바꾸면 나에게 불편한 것을 편하게,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하게, 두려운 것을 두렵지 않게, 피하던 것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스캇펙의 말처럼 비본능이 본능이 되는 과정을 절실히 느꼈다. 처음에는 옷사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시간이 지날 수록 옷사고 싶은 마음자체가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참지 않아도되었다. 그 마음이 없어지니 1년, 2년 기간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식주에서 첫번째, 의에서 벗어나니 홀가분했다. 이런 식으로라면 매년 하나씩 여러 가지 욕구를 다스릴 수 있겠구나 감이 왔다.
옷 구매를 끊으니 예전에 사두고 입지 않은 옷들을 하나씩 꺼내 어 입게 되는데 예상 외로 예전보다 옷이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집에 처박혀 있던 청남방을 입었을 때 좋은 피드백이 있어서 요즘 한 달에 반 이상은 청남방을 입는 중이다.
그러다보니 또다른 자유가 느껴졌다. 학교 다닐 때는 교복이 복장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옷에 짓눌려 살아보니 복장 제한이야말로 의복으로부터의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2009년 한 인도 여성이 원피스 1벌로 1년을 살아 가는 '유니폼 프로젝트'를 신문기사를 통해 인상적 으로 봤었다. 나도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굳이 그런 불 편함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비슷하게 스티브 잡스나 앙드레김도 스타일을 하나로 정했지만 물론 그들은 같은 옷을 여러 벌을 가지고 스타일을 유지했다. 사는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옵션 선택에 에너지를 빼앗긴다.라면만 파는 집에서는 라면만 맛있게 먹으면 되지만 만두국 제육볶음 된장찌개가 메뉴에 있으면 라면 먹으려했다가도 솔깃해진다. 옵션이 적어지면 고민도 준다. 삶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은 옵션을 되도록 줄여간다. 옷을 사지 않음으로 얻게된 것은 옷에 대한 제한이 아니라 옷에 대한 온전한 자유였다.
이 감으로 뭐든지 나를 훈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빨리 변화하고 다양한 선택의 스트레스를 받는 세상에서 하나라도 변하지 않는 상수가 있다는 것이 참 좋겠다 싶어서 옷 안사기 프로젝트에 이어 유니폼이라는 상수를 만들기로 했다. 하나의 유니폼을 정하면 지금껏 소유한 잡다구레한 복장의 많은 부분이 정리되고 아침마다 선택의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아 한걸음씩 접근해보는 중이다.
오늘도 청남방을 입고 서울에 유영국 전시를 보러 왔다. 전시장 영상에서는 작가가 좋아했다는 몬드리안의 말이 나온다. “우리는 외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비극을 극복하고 일어서서 모든 것 속에 있는 평온함을 의식적으로 관조할 수 있게 된다.” 나도 그러기를 바란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부터 결정하라. 그런 연후에 마땅히 해야할 일을 성심껏 수행하라.
-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