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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우너 Nov 07. 2021

책방을 하며 배우는 것들

책방을 한다고 하면 주변에서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아주 작은 구멍가게 같은 책방일지라도 “나도 책방 주인이 꿈이었다”, “부럽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흔히 책방 일을 영화에서처럼 햇살 내리쬐는 창가에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좋아하는 책을 즐기는, 여유 있게 일 하는 모습으로 상상하는 것 같다. '그럼 한번 해 보세요.'라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킨다. 책방일은 그런 낭만적인 모습이라기보다 여느 자영업자의 반복적인 일상과 다르지 않다. 아침에 출근하면 청소하고 카페에서 사용하는 식자재들 확인하고 오전에 책 입고 주문서 넣고 입금하고, 책 정리하고, 독서모임 준비하고, 손님 응대하고, 전기세 고지서 확인하고 월세 걱정하는 일의 무한 반복이다. 영화 노팅힐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윌리엄(휴그랜트)가 그녀를 만나기 전처럼.

      


어느 의미 없는 수요일이었다. 

출근하기 위해 시장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고 있었다.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바로 그날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채. 

여기가 나의 일터, 나의 작은 여행책 서점이다. 

음, 그러니까 여행책을 파는 곳이다. 

솔직히 말하면, 항상 많이 팔리는 건 아니다. 


(영화 노팅힐의 대사 중)

    


책방도 아주 오래된 시장에 붙어있다. 물론 노팅힐 거리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고 나에겐 운명의 연인이 나타날 일도 없다. 나의 일터, 작은 그림책방을 꾸려나가는 일은 조금 건조하게 바라본다면 책이라는 재화를 판매하는 일이고, 그렇다고 늘 많이 팔리는 것도 아니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많은 일들이 그렇듯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지지고 볶는’ 과정이다. 책을 사러 오는 손님들, 독서모임을 하며 오랜 시간 알고 지내는 단골들뿐만 아니라 책을 거래하며 만나게 되는 출판사, 편집자, 영업자, 작가들도 있고 책방에서 쓰는 물건들을 거래하며 만나게 되는 여러 사장님들, 책방 주변의 시장 상인 분들 등 다양한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한 소통방식과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몇 년 동안 책을 거래해도 전화 한 통 없이 이메일만 주고받는 사이도 있고, 모임에서 자주 보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지만 정작 속마음을 모르는 사이도 있는 반면, 지역도 다르고 몇 번 만나지 않았어도 고민이 있으면 서로 의논하는 사이도 있다. 스치듯 만난 누군가와 책을 좋아한다는 매개로 서로 성장을 응원하는 사이가 되기도 하고 함께 어떤 일을 도모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관계들을 통해 아이처럼 의사소통의 방식을 다시 배워가고 또 개선해 나간다. 일을 하면서 얻은 어떤 통찰이나 깨달음은 기분 좋은 일들을 통해서만 오지는 않았다. 기분 나쁜 경험들이 오히려 더 좋은 약이 되었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성격이 조금 급해서 결정이 빠른 편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제안을 했을 경우, 결정을 미루지 않고 가타부타를 빨리 얘기한다. 일의 특성상 혼자 판단해야 할 일들이 대부분이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일이라면 결정을 빨리 전달하는 것이 상대방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방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점들이 나름 효과적이라 자부했었는데 얼마 전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책과 관련된 제안을 하고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상대는 생각해보고 연락을 준다고 하더니 2주가 지나도 답이 없었고 성질이 급한 나로서는 몹시 답답했다. 결국 조심스레 전화로 의사를 다시 물었더니 못할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럴 거면 진작 말할 것이지, 왜 이렇게 일처리를 하는 거지?’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슬쩍 그 사람을 내 머릿속의 ‘나쁜 사람 상자’에 넣었다. 물론 그 상자에는 이미 수십 명의 수감자들이 있었다.

      

꽉 찬 상자를 바라보며 수사학 관련 책에서 읽은 ‘자비의 원칙’(상대방이 합리적이라는 가정 하에 상대의 발언을 이치에 맞는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태도)을 떠올리고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지만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나에게는 매력적이었던 일이 그에게는 매력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2주가 2개월 같았지만 그에겐 2일 같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의사결정이 빠른 만큼 그는 느리되 신중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는 것.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자신에게는 한량없이 자비롭고 타인에게는 무자비한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참 느리고 답답한 사람일 수도 있고, 때로는 피해를 주는 사람일 수도 있을 텐데. 그리고 문득 책방 이메일로 오는 독립출판 서적들의 입고 문의에 대부분 답을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서늘했다. ‘나쁜 사람 상자’에는 나도 같이 들어가던가 갇힌 사람들을 다 풀어주던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당연히 나는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에 그들을 특별 사면해주었다. 이러한 통찰들을 통해 내 작은 경계들을 하나둘씩 허물어간다.


일본에서 존경받는 기업가 이나모리 가즈오는 <왜 일하는가>라는 책을 1년에 한 번씩은 읽는데 그 책에서 이 구절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내면을 키우는 것은 오랜 시간 엄격한 수행에 전념해도 이루기 힘들지만,
일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힘이 숨어 있다.
매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내면을 단련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놀라운 작용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일을 하면 할수록 더더욱 공감하는 말이다. 나는 책방이라는 일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고 느낀다. 물론 나아진 게 이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책방을 통해 그나마 이 모양이라도 되었다.


누군가 일이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하면 자신의 일을 내면을 단련하는 수단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하고 제안한다. 내가 일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나를 단련시켜주는 수단으로 삼아보는 것이다. 의도적 주객전도. 우리가 하는 일들이 늘 즐겁지만은 않고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너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지라도 나를 단련시켜주는 도구가 된다. 

       

책방을 운영하며 만나는 사람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 부족한 나를 발견하고 고쳐나가는 중이다. 그렇게 오늘도, 내일도 어제보다는 덜 부끄러운 내가 되길 바란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 ‘홍익인간’ 새끼 발가락 정도는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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