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을 만나보면 고민의 주제로 자주 언급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닥 심각한 고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문제에 사로잡혀 본 사람은 안다. 이 고민이 사람 참 힘들게 만든다는 거. 그리고 이 고민은 비단 10-20대에만 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적성을 찾아서 일을 하고 승승장구하는거 같은데 나만 '나 사용법'을 모르는 것 같은 기분... 이 느낌은 오랜 세월 따라다니면서 자존감을 갉아먹고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쓰고 헤매이게 만든다. 타인의 얘기처럼 말하지만 이는 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경험에 비추어 던지는 질문이 하나 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긍정적 피드백을 받았던 일들, 아니면 '너 이거 하면 잘 하겠다'라고 권유받았던 일들이 무엇인지 돌이켜보는 것이다. 오히려 나에 대해서 나보다 주변인들이 더 잘, 정확히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충고는 뒤로 한 채 '그거 말고 다른 거!'를 외치며 파랑새를 찾아 전문가를 찾아가고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다니는 경우를 많이 본다. 답은 멀리 있지 않다. 나를 잘 아는 가족들, 친한 친구들, 어릴 적 선생님들, 동네 사람들이 툭툭 던졌던 말들에 자신이 미쳐 놓친 실마리가 숨어있곤 하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뭐였지....하고 돌이켜보면 '너 글 써봐라'는 소리였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내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글이야 누구든 쓸 수 있는거 아닌가? 글쓰기야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하는거 아닌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말이다. 그렇게 나는 오래동안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살았다. 쓰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소하지 않아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었기에 삶의 우선순위에서 늘 밀렸다. 책방을 시작하면서 다른건 몰라도 이 공간에서 책 읽고 글을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책방에서 지난 6년간 글을 쓴 적이 없다. 그저 글 쓰는 삶, 창작하는 삶을 주변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렇게 6년이 흐르고 나니 갑자기 허무한 마음이 밀려왔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책이 남고 출판사도 작업한 책들이 남고... 책방에도 분명 책이 있지만, 그것도 아주 많지만 오롯이 나의 작업물로 남는게 없었다. 물론 돈이라도 넉넉히 남으면 모르겠는데 그렇지도 않았고. 나에게 쌓인건 뭘까. 물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무형의 자산들이 쌓였지만 그런거 말고 나의 시간들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젠 정말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되뇌이는 사이 어떤 계기가 생겼다.
우연히 책방을 취재 오셨던 지역신문 기자분께서 13주 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지면에 글을 써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매주 한편씩 신문에 글을 쓴다고 생각하니 힘들 것 같기도 하고 부담스러웠지만 직감적으로 이걸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난 자유로운 상황을 원하면서도 어떤 강제성을 부여받았을 때 최선의 자발적 노력을 하는 유형이니까. 그렇게 13주 동안 글을 마감해야하는 일요일에는 아무데도 못 나가고 하루종일 글을 썼다. 너무 힘들었지만 13주가 지나고나니 13꼭지의 글이 생겼다. 뿌듯했다. 잊고 있던 글쓰기에 대한 즐거움을 느꼈고 오래동안 쓰지 않던 펌프에 마중물 한 바가지 부은 기분이었다. 신문에 글쓰기가 끝난 후엔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글쓰기를 원하는 동지들을 만나 일주일에 한번씩 글을 쓰게 되었다.
글쓰기를 시작하기까지 돌고 돌아 참 오래걸렸다. 마음만 먹으면 쉽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가장 시작하기 어려웠다. 마음 먹는게 가장 어려우니까.
작년 봄, 내가 사회초년생일 때 나에게 글쓰기를 적극 권유했던 선배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었다. 얼마나 오랜만의 통화인지 그 선배는 내가 책방을 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선배는 출판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고 첫 책을 쓰고 있다고 했다. 나에게 뭐하면서 지내냐고 묻기에 대구에 살고 있고 책 언저리에서 배회하고 있다고 답했다. 선배는 술을 마신건지 약간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언저리가 중심이야.
중심과 주변은 누가 정하는가. 내가 동쪽에 있으면 네가 서쪽, 내가 서쪽에 있으면 네가 동쪽일 뿐, 중심은 그 어디에도 정해져있지 않다. 내가 언저리에 있다는 느낌은 타인을 중심에 두었을 때 그러하다는 걸, 나도 모르게 그런 열등감인지 뭔지 모를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닌지 그 선배의 한마디에 정신이 확 깼다. 원래 실없는 말을 잘 하기로 유명한 선배였지만 '언저리가 중심'이라는 말은 그가 여태껏 한 말 중에 가장 실있게 들렸다. 책 나오면 조만간 한번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는데 안타깝게도 선배의 책 소식을 듣기 전, 그의 휴대전화 번호로 온 부고문자를 먼저 만나야 했지만 말이다.
글쓰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면 그 선배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삶의 언저리에서 중심을 잡는 것, 그래서 나만의 서사로 내가 어디에 있던지 삶의 주인이되는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