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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우너 Jan 02. 2022

동지에는 팥죽을 드세요

양력 12월 22일경,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 동지. 동지를 지나면서부터 해가 길어지기 시작한단다. 실은 동지가 언제인지도 잘 몰랐고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던 날인데 난 이제 동짓날을 챙기는 사람이 되었다. 마흔 전까지 동짓날 팥죽을 먹어본 일이 거의 없다시피 살았건만 요즘은 12월이 되면 달력에 동그라미 해두었다가 잊으면 큰 일 날 것처럼 동지에는 꼭 찹쌀 새알심이 든 동지팥죽을 챙겨 먹는다. 심지어 친정엄마한테도 팥죽을 챙겨 먹으라고 전화를 건다. 엄마가 요즘 동지라고 누가 팥죽을 먹냐고 하시면 빨리 본죽에 가서 팥죽을 사 오라고 채근하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변한 데에는 주변 환경의 역할이 크다. 책방 바로 옆에는 40여 년 된 오래된 시장이 있는데 시장 옆에서 어르신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어떤 절기가 되면 '시절음식'을 조금씩 얻어먹게 되었고 결국 동지마다 팥죽을 얻어먹다 보니 어느덧 나 역시 챙기게 되었다. 굳이 그렇게 챙겨야 하냐고 묻는다면 동네 할머니들이 하시는 말씀과 똑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팥의 붉은색이 악귀를 쫓아 액운을 없애준다고. 그래서 잡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한 숟가락이라도 꼭 팥죽을 먹어야 한다고. '악귀', '액운', 그리고 '팥죽'으로 그 모든 걸 물리친다는 '미신'을 지금 정말 믿어서 그러는거냐 물으신다면 망설임 없이 "네. 믿습니다!"라고 외치겠다.


그 믿음으로 올해도 식구들과 팥죽을 먹었다. 나는 두 그릇을, 안 먹는다는 둘째에게는 억지로 몇 숟가락이라도 먹였다. 할머니들이 한 숟가락이도 꼭 먹어야 한다고 귀띔해주신 대로. 팥죽을 나누어 먹고 우리 가족이 모두 평안할 거라고 믿는다. '믿는다'라는 말을 더 솔직하게 풀어쓰면 '믿고 싶다'겠지만 그렇게 쓰지 않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은 크고 작은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크기와 모양과 상관없이 허술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밥을 먹는 건 배고픔이 없어질 거란 믿음, 내일 아침 살아서 눈을 뜰 거라는 믿음으로 밤에 편안히 잠이 든다. 열심히 돈을 버는 것, 성공을 위해 달리는 것도 더 나은 삶은 보장해줄 거라는 믿음이다. 로또를 사는 것도 내가 1등이 될 걸 확신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1등이 되어 내가 평생 만져볼 수 없는 돈을 가져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아니던가. 동지팥죽 역시 그런 마음 아닐까. 불안한 삶 속에서 팥죽 한 그릇으로 가족의 안위를 지키고 싶은 바람. 미신이라 불리는 것들의 두꺼운 믿음의 껍데기를 까고 보면 깊숙한 곳에는 그런 소박한 바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문재 시인의 시 <오래된 기도>처럼 우리의 삶 자체는 그런 바람으로 이루어진 나름의 기도이기도 하다.


-<오래된 기도>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 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책방 주변 동네 할머니들이 나에게 알려준 것은 근거없는 미신(迷信)이 아니라 아름다운 미신(美信)이었고, 나누어준 것은 팥죽이라는 기도 한 그릇이라는 걸 알아가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받은 기도처럼 언젠가는 동짓날 나도 팥죽을 직접 끓여 주변에 나누어주는 할머니가 된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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