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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우너 Jan 18. 2022

택시를 타고

서울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대구로 온지도 10년이 넘었다. 대구를 벗어나기는커녕 집과 책방만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을 몇 년째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점점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 동네를 벗어나 주기적으로 서울 나들이를 가서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괜찮은 전시나 공연을 보기도 하고, 관심 있는 책방이나 카페를 방문하는 등 이색적인 장소에서 다양한 인사이트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씩 서울행 기차를 타기 시작했다.


동대구역서 서울역까지 KTX나 SRT를 타면 2시간이 채 안 걸린다. 이른 아침 기차를 타고 올라가서 늦은 밤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 아주 알찬 당일치기 여행이 된다. 게다가 이른 아침과 늦은 밤 기차는 할인까지 되니 일석이조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 기차를 타기 위해 평소에는 지하철을 타고 동대구역까지 가는데 그날은 늦게 일어나서 택시를 타게 되었다. 택시에 타자마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기사님께서는 혹시 기차 시간이 급한지 물어보셨다. 급하지 않으면 그냥 가고, 급하면 날아갈 수 있다고 하셨다. 날아간다??? 원하면 날아서 기차 시간을 맞춰줄 수 있으니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둘째 아이가 자주 하는 자동차 경주 게임에서 어떤 버튼을 누르면 갑자기 속도가 붙는 부스터 옵션이라도 있는 것인가?


어쨌든 시간이 촉박하니 반신반의하며 날아가기 옵션을 주문했다. 뭐 엑셀을 좀 밟아서 속도를 내어 빨리 달리겠다는 이야기이겠거니 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평소에 우리 집에서 동대구역까지 차로 20-30분 정도가 걸리는데 날아가기로 정확히 12분 만에 도착했다. 그렇다고 기사님이 신호, 속도위반과 같은 교통법규를 어긴 것도 아니고 지켜야 할 것들을 모두 준수했는데 말이다.


놀랍게도 핵심은 속도가 아니었다. 물론 택시의 속도도 빠르긴 빨랐지만 중요한 건 빨간불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동대구역에 도착할 때까지 이상하게도 빨간 정차 신호에 거의 걸리지 않았고 계속 녹색불만 보고 달렸다. 처음에는 그저 운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기사님은 어떤 타이밍을 꿰고 있는 듯했다. 신호에 걸릴 것 같으면 신호에 걸리지 않는 우회로를 바로 선택했다. 이 역시 샛길들을 꿰뚫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난 기차 시간에 맞춰 도착한 정도가 아니고 일찍 도착해서 시간이 남았다. 택시에서 내리니 좀 얼떨떨했다.


승강장에서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며 기사님의 말이 계속 생각났다.


당신이 원하면 날아갈 수도 있다.

이 말인즉슨, '난 천천히 가기와 빨리 가기 모두 가능하니 네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면 된다.'는 것인데 누군가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것은 내가 그 어떤 선택이든 감당할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즉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상대에게 선택권을 줄 수 있다.


야구에서 투수가 모든 타자에게 전력을 다해 던지지 않고 강타자에게는 힘을 주고, 약한 타자에게는 힘을 아껴 던진다. 이렇게 상대에 따라 힘을 조절하는 것, 즉 완급조절은 운동뿐만이 아니라 삶의 곳곳에서 필요한 기술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니 너무 어렵다. 힘주기와 힘 빼기 양쪽을 다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야 하기에 어쩌면 완급조절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내가 만난 택시기사님은 자신의 일에서 진정한 프로가 아니었을까.


덕분에 난 서울행 기차에 커피까지 사서 여유롭게 탑승했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어떤 노래의 후렴구가 떠올랐다.  R.kelly의 <I believe I can fly>.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에게 질문했다.

'원할 때 날 수 있는가?' 그리고 '언제 날아야하는지 아는가?'


아직 그 질문에 당당하게 답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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