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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gowords Jun 10. 2024

엄마가 아닌, 언니

지난 토요일, 엄마를 보러 지방에 다녀왔다. 엄마가 있는 지역엔 나의 작은 언니도 살고 있는데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요양원과의 소통, 병원비 입금, 엄마가 필요한 물품이나 먹거리 등을 챙기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이번에도 나는 그런 작은 언니와 함께 막내딸의 얼굴을 비추러 갔다. 5개월 만이다.




우리 엄마는 늘 먹고 싶은 것도 많지. 김밥, 만두, 쌈장, 바나나, 두유, 고추장 등등.


김밥을 들고 가면, “쌈장은 안 사 왔니?”

쌈장을 들고 가면, “두유는 없어?”


...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떨어져 있던 시간이 많았기에 어린 나를 위한 돌봄의 빈자리는 대부분 나의 형제자매들이 채웠다. 보통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가는 목욕탕은 작은 언니 손을 잡고 갔으며, 방학 동안 밀린 숙제와 뒤쳐지는 공부는 큰언니와 오빠가 밤을 새워가며 봐줬다.


10살이나 나이 많은 작은 언니와 목욕탕을 가면, 아줌마들이 "어머~ 둘이 어쩜 이리 닮았어~ 자매가 사이가 참 좋네"하며, 내 나이를 훌쩍 올려 부르곤 했다.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언니와 사이가 좋다는 말에 금세 또 기분이 좋아져 헤실거렸다.


그래서일까? 나는 늘 내가 돌보는 존재들에게 나를 가리켜 '언니'라고 부른다.


“호랭아~ 언니 다녀올게” (호랭이는 수컷이다)

"호랭아~ 언니가 안약 넣어줄게"

“베베야~ 언니가 밥 차려놨어”

"마리, 우리 애기~ 언니한테 와"

(베베와 마리는 내 집에서 살고 있는 집냥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가리켜 냐옹이 엄마라고 부르니, 나도 잠깐,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자 마치 누군가 내 목을 틀어쥐고 있는 것처럼 숨이 턱 막히면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내가 받아왔던 방식으로 다른 이를 대하기 쉽다.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될 수 없는 건 유년의 아픔이지만,

내가 누군가의 언니라도 될 수 있는 건 안도이자 기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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