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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집 Jul 31. 2024

시, 창조, 그리고 초월

박참새의 시를 통해 보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철학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철학관은 비슷한 뿌리에서 출발해 각자의 오묘한 매력을 내뿜는다. 마치 그들의 미묘한 관계처럼 말이다. 

    인간 내면에서부터 세계 전체까지의 인식 과정을 세세하게 다루는 와중, 예술관은 특히나 눈길을 끄는 무언가가 있다. 예술관은 인간과 세계 등에 관한 앞선 철학들을 모두 아우르는 특성이 있다. 그만큼 종합적이기에 다소 모호하거나 아리송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명확히 풀어 설명할 수 없는 갈래인 예술을 정의하고, 그에 역할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철학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한 철학의 참된 역할을 긍정하며 필자는 ‘박참새 시인’의 작품과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의 철학을 연계해 설명하고자 한다. 박참새 시인을 알게 된 데에는 우연에 우연이 겹쳐있다. 평소 글 구독 서비스로 즐겨보던 작가가 보낸 글에 박참새 시인과 자신의 일화가 담겨있었다. 그녀가 시인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약간의 흠모와 당시 시인 이전의 그녀를 저평가한 자신에 대한 반성적 내용이었다. 흥미로운 필명에 이끌려 찾아보았고, 우연은 그녀와 나 사이의 공통점을 또다시 만들었다.





1. 시인 박참새 소개

    시인 박참새는 제 42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며 「정신머리」라는 시집과 함께 문학계에 정식 등단했다. 그 이전에는 온오프라인 플랫폼 ‘모이(moi)’의 북 큐레이터, 도서 리뷰 팟캐스트 ‘참새책책’ 운영자 등으로 활동했다. ‘박참새’라는 필명은 ‘참새’에서 따왔으며 스스로 “내가 아는 새에게는 둥지가 없다. 대신 운이 좋게도 무리가 있다.”라고 설명한다. 앞서 언급했던 박참새와 필자의 공통점은 취향적인 일치이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존경하는 시인으로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를 언급하며 “누가 시 왜 쓰냐고 하면은, 내 깡패 되려고 그렇소,라고 답하겠다. 내 글은 나의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해석되고 통용되고 전이될 테지만 단 하나의 진실만을 향해 간다면, 그런다면 그 이상의 다행은 없으리라 생각된다.”라고 이야기했다. 부코스키를 좋아하는 사람, 심지어는 그를 알고만 있는 사람조차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다. 그만큼 부코스키는 대중적인 시를 노래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호불호가 강한 축에 속한다. 그런 그의 깡패다운, 투우 같은 배짱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박참새는 나에게 있어 큰 인상을 남겼다. 


    그녀의 시집, 「정신머리」에 대해 소개한다. ‘건축’ 외 51편으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기성의 것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 특유의 신선한 무례함으로 무장되어 있다. 박참새는 시를 통해 언어는 일종의 표식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그 껍데기에서는 악취가 난다고 고발한다. 또 언어에 대한 고찰과 시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독특한 형태로 풀어낸다. 이를 두고 조강석 문학평론가는 “형식적 파괴 속 보이는 단단함”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이제 그 몇 개의 작품들을 보며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2. 대자존재와 타인: 「유머와 센스」, 「국어」

    「유머와 센스」는 삶이란/의지와 신념의/간극을 뛰어넘어/극한으로 치닫는 일/을 말한다라는 연으로 시작한다. 시의 첫 연에서부터 대자존재의 철학이 드러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생명체는 지향적 의식의 유무에 따라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로 나뉜다. 즉자존재는 돌멩이와 같이 독단적으로 존재하며, 그 자체로 꽉 차 있어 다른 존재적 가능성이 없다. 그에 반해 인간이 해당하는 대자존재는 즉자로서의 자기 자신, 즉 본질이 결여되어 있다. 이는 곧 수많은 선택과 시간, 사건들에 의해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자존재는 삶의 마지막까지 자기와의 일치를 향한 과정에 놓인다. 그렇게 매 순간 스스로를 넘어서 극한으로 치달으려 한다. 이러한 대자존재의 노력을 두고 사르트르는 ‘기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세계에 던져져 있으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계속해서 재건하고 욕구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와 반대로 본질을 스스로 만들려 하지 않는 안일한 삶의 태도를 ‘근엄한 정신’이라 부르며 그것을 경계할 것을 당부한다. 이 대목에서 니체가 생각난다. 니체 역시 사르트르와 같이 인간을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월해야 하는 존재’로 정의한다. 또한 사르트르가 말한 ‘근엄한 정신’의 소유자를 더 강렬한 단어인 ‘인간 말종’으로 표현한다. 필자는 이와 같은 사르트르와 니체의 자기 초월적 삶의 태도를 강하게 긍정한다. 모든 게 이미 정해져 있는 답과 같은 삶이라 생각하면 사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기 어렵다. 대신 매 순간 나 자신을 초월하고 이겨내는 삶이라면, 결코 완벽한 결말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대자존재의 정의도 이와 유사하다. 다만 그는 시간성,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더욱 강조한다. 의식은 존재와 시간에 뿌리내리고 있으므로 시간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며 주관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라 설명한다. 즉 대자존재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시간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유머와 센스」 3연과 6연이다. 그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사물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사/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게 아닐까” “편견과 편견에 갇혀서/해맑은 미소로/질투와 증오로/지쳐 버린 마음을/도려내고 있다 이 부분에서 드러나는 대자존재와 세계의 관계 및 타인의 존재에 대해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조금 다른 견해를 밝힌다. 우선 사르트르는 이분법적 논리를 통해 대자는 그에게 출현되는 다른 대자나 즉자존재에 대해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롯이 존재하며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메를로퐁티의 입장에서 이는 대자가 던져진 그 세계와의 관계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세계와 대자존재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그렇기에 세계 내의 다른 존재, 심지어는 즉자존재까지도 개인적 실존의 토대가 된다고 역설한다. 위의 3연, 6연과 더불어 「국어」의 2, 3, 4, 5연을 소개한다. 집 앞 마지막 골목에서/모르는 그 애가 불러 주던/깨끗하고 단단한 노래 내음//모국어였던 것 같다//다시//우리는 서로를 잘 아는 이방인이었다 즉자존재와의 관계에서 나아가 타인, 다른 대자존재와의 관계에서도 둘 다 비슷한 논지를 취한다. 사르트르는 후기에 가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은 해명할 수 없고 타인과의 관계는 갈등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국어」의 내용처럼 메를로퐁티에게 타인은 또 하나의 신체로서 시에서의 ‘모국어’와 같은, 세계의 뿌리를 공유하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서로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소통이 되며, 사르트르가 말한 갈등조차도 일종의 소통이 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시의 ‘서로를 잘 아는 이방인’이라는 표현처럼 타자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의식이 아닌 감각적 지각을 통해 그들을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머와 센스」 6연의 내용처럼, 우리는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감각적 지각이 때로는 고정관념을 강화하기도, 약화하기도 하지만 이는 우리가 새로운 사람을 맞닥뜨렸을 때 그를 판단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실행되는 인지적 경로이다. 물론 이러한 선입견을 최대한 약화하는 것이 타자와의 이로운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될 터이다. 하버드 철학과 교수 수재나 시걸(Susanna Siegel)은 그에 새로운 만남을 지속하며 지각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3. 언어와 시: 「청강」, 「Defense」, 「정신머리」

    다음은 「청강」의 일부이다. 저는 아주 오래되었습니다그리고 낡았습니다./왜 이렇게 됐냐구요나를 이해하려 드는 인간들이 과하게 많았기 때문입니다미치는 줄 알았어요사실 나는 아아아무것도 아닌데요./나는 그들이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껍데기입니다진리를 덮기 위한 진리입니다.//관념어 드림 시는 교수님에게 수업 청강을 요청하는 한 학생의 이메일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학생의 이름은 ‘관념어’이다. 관념어는 스스로를 낡고 늙은 것, 껍데기로 정의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명확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관념’의 추상성을 파훼하고 규정하고자 하는 언어 계승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관습적인 것에서 벗어나 원초적인 것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러한 태도는 메를로퐁티와 궤를 같이한다. 메를로퐁티는 세계를 인식함에 있어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관습을 던지고 ‘세계와의 소박한 접촉의 회복’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만연한 객관적 실재로의 맹목적 추구를 저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 「청강」 역시 대자와의 주관적 관계를 통해 언어를 정립하길 바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사르트르는 후기에 어느 정도 철회하긴 했지만, 그의 ‘참여문학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작가의 책임으로 간주했는데, 본 시는 앞서 설명했듯 고발적 성격을 가지기에 그로서는 참된 행동적 언어화일 것이다. 더불어 사르트르가 이분법적 논리로 정의한 시적 사용과 산문적 사용이 시 속에 혼재되어 있다. ‘껍데기’와 ‘관념어’를 이미지로 활용해 다의성을 추구한 것은 시적 태도이며 그 다의적인 문장들을 통해 일의적 주장을 했다는 점에서 산문적 태도 역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언어의 사용에서 그것이 시적 태도이든 산문적 태도이든 사용했다는 그 사실만으로 사용자가 언어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익혔다고 보기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앞서 설명한 「유머와 센스」와 새롭게 소개할 「Defense」는 모두 chat-GPT를 활용한 작품이다. 「유머와 센스」는 시를 쓰는 과정에서, 그리고 「Defense」는 박참새가 영어로 쓴 원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AI를 사용했다. “i wish i had that,/that fantasy, only exists on/the other side,/on your side.” “그런 걸 가졌으면 좋겠다,/그 판타지를오직/그 반대편에만 존재하는/너의 편에서.” “그러길 바라겠지/그 허상오로지 반대에서만/존재하는/너라는 반대.” 이처럼 박참새 시인의 영어 원문, AI 번역본, 박참새 시인의 번역본이 차례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는 모국어를 배반하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시를 쓸 때 한글과 영어의 간극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한국어에만 갇혀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메를로퐁티가 언어를 공동 세계의 산물로 규정하는 것도 이와 같다. 언어는 각 세계를 떠맡고 있는 표상이기에 박참새의 말처럼 시적 이미지로 활용할 때도 표현에서의 개성적 차이가 존재한다. 더욱이 언어의 진정한 사용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데에 있다고 메를로퐁티는 역설한다. 각기 다른 언어를 넘나들며 시로서 승화시키는 것은 언어의 창조적 역할을 혁신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신머리」를 소개한다. 약을 먹고 더 힘을 내서 찾아올게요 미친새끼/돈자랑 하는 것도 아니고 개밥그릇 갖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제가 가본 집 중에서 진짜 제일 좋아요 이 시는 인용된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비규칙적인 띄어쓰기와 문장부호의 남용으로 비문의 구성을 띤다. 또한 행과 연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맥락 파악이 어렵다. 메를로퐁티가 이야기했듯, 문학에서의 언어는 주로 간접적으로 사용된다. 박참새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도 이 시가 조직한 분위기와 시공간의 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읽는 이는 이 애매성 속에서 나름의 의미와 관점을 찾는 일종의 모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좌측 사진은 「정신머리」의 또 다른 부분이다. 시언어가 이미지로 기능하는 예시는 「청강」에서도 앞서 소개했다. 그러나 「정신머리」에서의 시 언어적 특성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곧게’라는 어의를 그대로 가시화함으로써 언어의 갈래를 곧바로 기호에서 이미지로 탈바꿈한다. 대부분의 시가 구성적으로는 사물의 형식을 띠지 않는 것과 다르게 마치 미술에서의 것처럼 창조한 사물을 시각적으로 도출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사르트르가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또 다른 자아’라고 말했듯이, 이 시 역시 박참새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은 결과물일 것이다. 필자는 이미 박참새의 상상이 창조한 그 시의 세계에 닻을 내렸다. 잠시 거주한 그 세계는 필자의 상상과 맞물려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가는 시작점에 선 시인 박참새. 그의 시들을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접목해 소개했다. 



시는 신비롭다. 

시인은 언어를 삼킨다. 꿀꺽 삼키고 소화한다.

그리고 잉태한다, 그들만의 규정될 수 없는 세계를.

시인은 태어난다. 그렇게 시인이 되어버린다.



    같은 땅에 뿌리 내린 우리, 대자존재들은 언어와 문화라는 유산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창조물을 건설해 내며 연대의 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모든 예술가는 각자의 언어를 통해 타자와 소통하며 가끔은 잃어버린 본질로도 회귀할 것이다. 필자를 품은 세계는 모든 창조물에서 비롯된 상상들을 영위하는 것으로 응답할 것이다. 그렇게 예술은 세계에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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