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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디지털 호더링

나는 보내지 못한다

by 하영


호더(hoarder). 당신은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호더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강박장애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손이 닿았던 모든 물건에 애착을 느끼고, 그 물건들을 모아 쓰레기집을 만드는가 하면, 누군가는 동물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들여 동물학대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엄연히 실존하는 질병이고, 고통받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기에 이런 명칭을 붙여도 되는가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잠시 해보았으나 이것은 나에게도 삶에 영향을 주는 고통이기에 병명으로 칭해본다. '선택장애'처럼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서론이 길었다. 그렇다. 나는 호더다. 무엇을 모으냐 하면 디지털 정보, 즉 데이터를 모은다.

'데이터 저장이라면 나도 하는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나의 경우는 다소 심각하다. 나는 친구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캡처한 카톡사진 한 장조차 지우지를 못한다. 메모장에 적어놓은 장보기 목록을 지우지 못한다. 심즈에서 잘못 만든 캐릭터를 지우지 못한다.

나의 디지털 세상에 삭제란 없다.


그 시작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윈도우XP에서 윈도우vista로 넘어가는 시기여서 OS업그레이드를 위해 컴퓨터 데이터를 백업해 두어야 했는데, 우리 아빠는 당시 우리 집 공용 컴퓨터에 있던 <하덩이통>(내 전용 폴더였다) 폴더의 백업 결정권을 나에게 일임해 주었다. 나는 당연히 폴더에 있던 모든 문서와 사진, 게임파일들을 모두 백업폴더로 옮겨두었고 안정감을 느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즐겨찾기 해 둔 사이트들을 나중에 들어가고 싶어 졌는데, 기억이 안 나면 어떡하지?'

그것이 내 호더링의 시작이었다.

나는 즐겨찾기 목록, 즉 링크를 바로가기 아이콘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 그것까지 백업 폴더에 옮겨둔 뒤에야 만족스럽게 컴퓨터를 끌 수 있었다.


가끔 데이터를 지울까 말까 고민할 때도 있다. 주로 일회성 모임 정산용 단톡, 전 남자친구와 찍은 사진들, 눈을 감고 찍었거나 비슷한 게 수십 장 있는 연속촬영 사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내 그조차 추억이라는 방향으로 결론지어지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순간을 떠올릴 증거가 될 거라는 생각.


이처럼 데이터를 삭제하지 못하는 심리는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1. 언젠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2. 이것도 추억이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저장된 데이터들은 나중에도 필요하지 않고, 추억이 될 수는 있으나 다시 꺼내 보지 않기에 의미가 없다. 나는 의미 없이 용량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2011년 첫 스마트폰을 구매했을 당시 내 휴대폰 용량은 16기가였다. 그리고 2025년 현재는 526기가, 벌써 4/5를 사용했다. 카카오톡 용량만 200기가가 넘는다. 사소한 채팅방도 나가지를 못해서. 미디어 지우기도 하지 않는다. 사진을 나중에 보고 싶어질까 봐.


나는 이토록 보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출근 중인데, 휴대폰 갤러리를 보다가 다시금 이 사실을 깨닫고 글을 적게 되었다.

왜 끌어안고 사는 것일까? 다시는 꺼내보지 않을 것임을 아는데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아는데도.


나는 이별에 약하다.

5년이 넘도록 연애한 전 남자친구와 이별한 뒤에는 사실 별로 울지도 않았고, 밥도 잘 먹었기에 이별에 강한 것인가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난 이별에 약하다.

나는 그가 줬던 편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이제는 촌스러운 디자인이 된 커플티도 가지고 있다. 사진첩에는 그와 찍은 사진 전용 폴더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이별에도 약하다.

초등학교 때 이별한 강아지 까미가 있다.

털이 까맣고 가슴에만 흰 털이 있는, 작고 정신없는 성격의 강아지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 가까이 되어가는 오늘날도 나는 까미가 보고 싶다. 까미를 만나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것들이라 그런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가 너무 많은 순간에 사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이별하기 싫다. 조용하고 잔잔한 울림이 있는 이 지하철의 분위기도 기억하고 싶다.


데이터는 보통 그저 생겨나지 않는다. 내가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입력을 했을 때 원하는 결괏값으로 출력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0과 1일뿐이다. 그래서 나는 내 생각과 의지의 결과물인 그 데이터를 추억이라 여기고 과의미부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시 난 아직도 모르겠다. 데이터가 너무 쌓여서 외장하드를 더 사야 하는 상황이기에 불편을 느끼고 있지만, 이게 합리적 사고가 이님을 알지만, 고쳐야 하는가 말이다.

전형적인 정신과 환자의 사고방식 중 하나이고 이 얘기를 주치의 선생님 앞에서 하면 타자가 조금 빨라지시겠지만, 뭐 어쩌겠어. 이렇게 생겨먹은 강박적 인간이 나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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