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가가 된 정신과 의사 이유진님. 그녀가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돕기 위해 해외 이주 여성들을 위한 웨비나를 가졌다.
갑상선기능저하증을 앓는 단짝을 돕고 싶어 백과사전을 뒤적이다가 인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윤리 수업 중 처음 접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매료되어 정신과 의사의 꿈을 품기 시작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님들 덕분에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고 노인정신의학 세부 전문의가 되었으며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했다.
같은 병원 암센터에서 근무하는 동안 암 환자들의 정신건강에 관심을 갖게 됐고 미국행을 결심했다. 2013년 미국 밴더빌트 대학병원에서 정신과 레지던트 과정을 다시 밟았다.
그 후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UCLA병원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 세부 전문의가 되었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산호세 근교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13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일주일 내내 친구들과 일상을 공유하며 사흘은 환자를 돌보고 이틀은 테니스를 치고 한 달에 한 번쯤 실리콘밸리의 디지털 헬스케어 동향을 기웃거리는 삶을 산다.
- <죽음을 읽는 시간> 작가 소개 -
그녀 역시 미국에서의 첫 해를 '낯섦'과 '힘듦'이 두 단어로 표현할 만큼 해외 이주 여성으로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 정신과 전문의로 일하다가 미국에서 다시 의사자격시험을 치고 레지던트로 일하던 시절, 그녀는 야간 당직 문서에 본인의 직함을 'MD(Doctor of Medicine, 의사)' 대신 'MDD(Major Depressive Disorder, 주요 우울장애)라고 적는 실수를 했다. 프로이트가 모든 사람이 하는 실수에는 사람의 무의식이 담겨 있다고 말했듯이 그녀는 당시에 이 실수가 우연이 아니라 스스로를 의사로 인정하지 않고 되레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었던 것의 증명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한 것과 같다. 가족, 친구, 지인 등 내 주변을 지키고 있던 인간관계와 단절이 된다. 나를 수식하던 직업, 학교, 학력이 사라진다. 고국에서 평생을 살아오던 기억과 멀어지고 나를 기억하던 이들로부터도 멀어진다. 타국에서 다시 나를 찾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좁은 한인사회에서 끝없는 비교에 파묻히고, 실수했을 때 사회적 낙인을 오히려 더 두려워하며 삶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해외 이주 여성들에게 이유진 님은 오늘 이 시간을 망설이지 말고 더 나를, 또 삶을 제대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셨다.
삶과 죽음은 0과 1인가요?
삶은 1, 죽음은 0이라고 흑과 백으로 분명히 나눌 수 있는 것일까? 이유진 님은 삶과 죽음이 1과 0이 아니라 스펙트럼으로 보는 게 맞다는 말로 웨비나를 시작하셨다. 다양한 형태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예시도 알려주셨다. 어린 딸을 겨우 설득해서 간단한 편도선 절제 수술을 했는데 갑자기 뇌사 판정을 받아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Jahi mcmath의 이야기. 극심한 다이어트 중에 신경안정제와 술을 섞어 마시다가 정신을 잃은 후 튜브로 영양제를 넣으면 9년을 생존한 Karen Ann Quinlan의 이야기. 운전 중 갑자기 심장마비가 왔는데 계속 영양제를 투여할 것인지를 두고 남편과 부모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던 Terri schiavo 이야기 등. 죽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살았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려면 무엇이 필요요건으로 있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 의지, 죽음에 의지
또 이유진 님은 다양한 영화를 통해 죽음과 삶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예시를 보여주셨다. 패러글라이딩 중 사지마비 된 백만장자가 빈민가에 살던 간병인을 만나 삶의 의지를 되찾는 <The untouchables>, 엘르 편집장으로 화려하게 살던 이가 갑자기 전신마비가 됐으나 눈알 움직임으로 책을 쓴 실화를 바탕으로 한 <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 영화는 최악의 조건에서도 'Will to live' 삶의 의지를 가진 이들을 보여준다. 반면에 <Me before you> 영화에서는 럭비 선수였다가 전신마비가 된 후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Will to die'가 주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지 보여준다.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떤 이들은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또 다른 이들은 죽겠다는 의지를 가진다. <Me before you>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 수 있겠죠.
하지만 내 인생은 아니에요. 난 내 인생을 사랑했어요. 진심으로
나답게 내 이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죽음보다 못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차라리 죽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강렬한 생의 의지인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죽을 거지만 지금 죽고 싶어요
이유진 님은 안락사 혹은 존엄사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예시를 보여주시며 좋은 죽음은 곧 좋은 삶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우리는 보통 사는 것이 당연히 죽는 것보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그다음에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다만, 죽는 게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치료 불가능한 질병에 걸려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치료의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질병으로 인하여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 그런 사람에게 삶이란 무한한 고통의 연장이며, 비록 진통제 등으로 그 고통을 경감할 수 있다고 해도 치료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그의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때 끔찍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삶보다 나은 죽음, 바로 안락사 일 것이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오히려 삶을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일까?
지금, 살 만한 삶인가요?
건강하게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사실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 중이 있다. 우리는 언제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죽음의 과정에서 어떻게 삶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이유진 님께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알려주신 것들 중에 '비교'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미국에 산다고 하면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삶을 경험하고 살 것 같지만, 좁은 한인 사회에 갇혀 있는 경우에는 오히려 국내에서 보다 더 보수적으로 살게 되기도 한다. 나 답지 살지 못할 때 우리는 비교의 굴레에 빠지고 아무리 훌륭해도 훌륭하지 않은 성취를 했다고 느끼기도 하며, 공허감에 시달린다. 이유진 님은 '비교'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므로 차단할 수 없기에 차라리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는 것이 건강한 비교라고 하셨다. 눈앞이 캄캄할 때는 주변과 비교하기보다 차라리 땅을 보고 걷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나아진 부분이 있다면 스스로를 칭찬하며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을 반복해서 산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최선의 선택을 하며 하루를 뚜벅뚜벅 걷다 보면 0과 1 사이에서 우리는 하루를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pilogue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책에서 김영민 작가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은 갱생의 상징이라고 한다. 물에 빠지는 것은 자칫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 죽음에 스스로 다가서기는 하나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수많은 예술에서 익사는 갱생을 상징해 왔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 구약에서 물에 떠내려온 모세가 갱생하는 이야기에서는 물을 통해 정화되고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빌 비올라가 2000년대 들어와 선보인 <밀레니엄의 다섯 천사> 연작(2001)의 일부분인 '떠나는 천사'는 천사가 물속을 뛰어들어 잠기는 과정을 극도로 느린 동영상으로 장대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빛과 크게 울리는 물소리가 어우러지면서 인간의 몸이 심연을 알 수 없는 우주적 세계로 들어가는 광경을 담았다.
거센 파도에 휩쓸리거나 깊은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더라도 우리는 그 순간에 어떤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결국 숨이 막혀 죽는 찰나의 순간까지도 나 다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바닷속을 유영하며 삶과 죽음의 스펙트럼을 유유히 즐기겠노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