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방법을 잊어버린 어른의 신세 한탄
"엄마! 놀자!!" 아들의 외침이 시작되었다. 뒷마당에만 나가면 더 신이 나는 지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지는 아들이다. 아들은 뒷마당에 장난감들을 쫙 펼쳐놓고 무얼 하는 건지 아주 신이 났다. 전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보물을 찾는 것 같기도 하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며 상황극 삼매경이다. 그러다 약간 지루해진 것 같으면 그제야 엄마를 찾는다. 자기 놀이 속 세계에 같이 들어와 놀자는 거다.
"엄마 지금 일하고 있어." 대부분 나의 대답은 이렇다. 뒷마당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나는 그곳에서 일할 거리를 찾는다. 처음 미국에 이사왔을 때는 뒷마당이 있는 게 축복 같았다. 아파트에서 층간소음 걱정하며 살다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 마냥 좋았다. 하지만 우기가 지나고 풀이 자라기 좋은 계절이 되자, 이곳은 노동의 공간이 되었다. 잡초들이 우후죽순 자라서 애써 못 본척 하고 지나칠 정도가 넘어섰다.
"어, 그래. 놀자.." 계속 놀자는 성화에 나는 슬쩍 같이 놀아주는 척을 한다. 아들은 신이 난다. 그런데 나는 노는 척을 하면서도, 손은 잡초을 계속 뽑고 있다. 잡초 뽑는 손을 멈출 수가 없다. 나에게는 잡초 뽑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다. 아들은 뒷마당이 우주가 되고, 바다가 되고, 조선시대가 되고 시공간을 넘나들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안, 나는 당장 뽑아야 할 일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문득 <어린왕자> 책에서 어린왕자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린왕자는 말한다. 어른들은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이야기 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묻지 않는다고. "그 애 목소리는 어떠니? 어떤 놀이를 제일 좋아하니?" 이렇게 묻지 않고 "그 애는 몇 살이니, 형제는 몇 명이니?" 어른들은 고작 이런 숫자들만 묻는다고 한다. 어린왕자는 한탄한다. 어른들은 하루종일 계산하는 일만 하면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고 한다. 어른들은 숫자의 세계에 살고, 아이들은 놀이의 세계에 산다.
어린왕자는 자신의 별 근처에 있는 소혹성들을 여행 나니며 그곳에 사는 6명의 사람들을 만난다. 왕, 허영심 많은 사람, 사업가, 술꾼... 그들은 마치 우리 일상에서 보는 인간상들에 대한 은유이다. 나는 그 중에서 나와 가장 닮은 인간상을 하나 찾았다. 가장 작은 별, 다섯번째 소혹성에서 만난 가로등 끄고 켜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1분마다 쉴 틈 없이 가로등을 끄고 켜는 일을 한다. 그 사람은 자기가 왜 가로등을 끄고 켜는지 모른다. 그저 명령이기 때문에 한다. 가로등을 켠다는 것은 적어도 의미 있는 일일지 모른다. 슬픈건, 1초도 쉴 틈 없이 일하면서 왜 일하는 지 의미를 찾을 새도 없이, 늘 쉬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라 나오는 잡초를 생각없이 뽑으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었을까? 매일매일 쏟아지는 to-do 리스트를 지워내며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해 노동했던 시간들이 스쳐지나간다. 나는 무엇을 위해, 왜 일하는 것일까.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는 당장 눈 앞에 놓인 행복을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린이의 놀이 세계에 동참할 기회를 눈 앞에 두고 잡초만 뽑고 있는 내가 언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잡초를 다 뽑고 놀겠다는 나의 약속은 지켜질 리가 없다. 잡초는 끊임없이 자라고, 아이와의 놀이는 계속 나중으로 미뤄진다.
어느 주말, 나처럼 마당에 아들과 함께 나가있던 남편이 잡초를 한더미 봉지에 담아왔다. 그리고 아들도 함께 잡초를 뽑았다고 한다. 아니, 어떻게 놀기만 하려는 아들과 같이 잡초를 뽑을 수 있었을까? 남편은 "내가 잡초를 잡초트루퍼(잡초+스톰트루퍼, 스톰트루퍼는 스타워즈에 나오는 군인들)라고 했더니 신나서 잡초 뽑던데?!" 라고 한다. 잡초 뽑는 것도 놀이로 만들면 저렇게 할 수 있는 거구나 남편의 신박한 아이디어에 놀랐다.
또 어느 날 아침. 아들이 학교 가기 싫어 아침밥을 먹다 말다, 숟가락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빠진다. "얼른 밥 먹어야지!"하고 윽박지르려다, 남편의 잡초트루퍼 전략이 떠올랐다. 그리고 던진 한마디, "잡아라!!". 그 말을 듣자 시들어 가던 아들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돋는다. 아들은 밥 먹는 걸 나쁜 녀석들과 착한 녀석들이 벌이는 전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다시 숟가락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밥 먹이는 일상도, 잡초 뽑는 일상도 그렇게 아들의 놀이 세계와 함께 물들어 조금은 생기가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