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엠마 Jun 11. 2023

비파나무의 맛

본 글은 23년 6월 1일 미주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 [여성의 창]에 기고된 글입니다. 



 얼마 전 친구가 집에 놀러와 뒷마당을 보더니 한마디 했다. “저 열매 곧 먹을 수 있겠다.” 그 때는 영어로 열매 이름을 들어서 생소 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비파나무 열매였다. 매일 아침, 익어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만큼 많은 비파나무 열매가 열렸다. 짧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나 싶게 따뜻해 진 어느 날, 잘 익은 열매를 따서 한번 먹어보았다. 맛은 딴딴했다. 마트에서 파는 과일처럼 달지 않았다. 시고 떫고, 거친 맛이 났다. 흙과 공기, 햇살이 비파나무의 방식으로 표현된 것 같았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물러나고 해가 하늘 가운데 떠오르면, 쪼르르 다람쥐 몇 마리가 뒷마당에 온다. 다람쥐들은 비파나무에 올라 귀신 같이 제일 잘 익은 것만 갉아먹는다. 다람쥐가 먹지 못하게 열매를 미리 다 따버릴까, 철망을 두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비파나무 열매를 먹을 때 만큼은 자연스럽고 싶다. 햇살 가득한 마당에 서서 열매를 만들어낸 하늘과 땅을 보고 있으면 내가 다람쥐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비파나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먹을 만큼의 비파나무 열매만 따서 먹고, 더 축적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제철의 야생 식물을 먹으며 땅 속에 내가 자연스럽게 녹아 드는 기분을 즐긴다. 봄이면 쑥과 고사리를 따고, 가을에는 도토리를 줍던 어르신들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미국에 와서 가장 놀란 점은 모든 것이 쉽고 편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음식 또한 최대한 저렴하게 생산하여 칼로리만 높이는 방식으로 유통된다. 마트에 가면 다양한 냉동식품이 즐비하고,식당에 가도 세계 각국의 음식들이 한 입에 싸서 먹을 수 있게 미국식으로 변형되어 판매되고 있다. 음식에 소스를 발라 자극적인 맛으로 본연의 맛을 가리고 먹는 미국 음식들. 나는 비파나무 열매를 먹으며 ‘맛있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본연의 맛이 궁금해졌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날 밤, 달을 보려고 혼자 뒷마당에 나왔다. 소원을 빌어야지, 비파나무 옆에서 희끗한 달을 올려다 보며 나는 뭔가 더 바랄 만한 것을 생각해 보려고 했다. 그냥, 이 마음을 잃지 않게만. 그러고는 더 바랄 게 없었다. 어둠과 불켜진 창들, 죽어간 것들과 살아 꿈틀 거리는 것들 속에서 모든 것이 생생했다. 자연과 바로 잇닿아 있다는 감각은 그렇게 현재에 대한 선명한 확신으로 돌아온다. 오후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쿠키 대신 딴딴한 비파나무 열매를 들었다. 한 잎 베어 물으니, 그 생생함이 내 안을 가득 채운다. 




매일 아침 따는 비파나무. 곳곳에 다람쥐가 먹은 자국이 남아있다. 다람쥐랑 나눠 먹는 비파나무의 맛.
뜨거운 햇빛 받으며 무럭무럭 익어가고 있다. 아침에 볼 때랑 늦은 오후에 볼 때랑 열매 색깔이 달라져 있다.
이 의자에 앉아 비파 나무를 종종 올려다 본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눈찢기'를 보고 웃었던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