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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Jun 20. 2023

밥짓기의 지겨움

(본 글은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패러디 했습니다.)

 

 아! 밥짓기의 지겨움!!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책으로 거리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비애를 노래했으나, 밥하느라 집 안에 갇힌 노동자의 괴로움은 헤아려 보았을까. ‘밥짓기’, ‘글짓기’에서 ‘짓다’라는 동사가 함께 쓰이는 걸 보면 두 행위에 공통점이 있을터인데, 글을 지어 돈을 버는 사람에게도 ‘밥짓기’의 고단함은 왜 생략되었을까.


 건강한 집밥에 대한 신화, 돌봄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는 ‘밥짓기’의 본질적인 지겨움을 가렸다. ‘밥짓기’는 냉장고에 썩는 재료 없이 알뜰하게 경영하고, 영양소에 맞춰 메뉴를 상상해 만드는 고차원적인 노동이다. 하지만 이것이 특별한 누구 한명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이 될 때, 신이 된 자는 입을 열 수 없게 된다. 숭고한 희생에 값을 매길 수 없듯이, 신화화된 ‘밥짓기’도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못한다. ‘밥짓기’는 정성과 상상력만 있으면 누구나 배워 할 수 있는 일상의 노동이고, 무거운 바위덩이를 산 정산으로 끝없이 밀고 올라가야 하는 시지프의 형벌같은 지리멸렬한 반복이다.


 콩나물을 한번이라도 스스로 다듬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술이 덜 깬 동거인을 위해 콩나물 국을 아침으로 차려 놓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콩나물 다듬기에는 꼼수가 없다. 바쁜 아침에 키가 들쭉날쭉한 아이들을 일일이 손질하는 하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공들여 만든 콩나물 국도 호로록 마셔버리면 끝이다. 준비한 시간에 비해 식사 시간은 언제나 짧다. 속이 쓰려 밥상 앞에 인상 찌푸리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 ‘국물은 파뿌리랑 무로 채수 낸 거고, 쪽파는 텃밭에서 키운 거야.’라는 말을 해보지만 밥짓기가 주는 본질적인 허무함을 채울 수는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양념 묻은 그릇으로 가득 찼다가, 다시 깨끗하게 비워지는 개수대를 보고도, 다시 한번 새 끼니를 준비할 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밥짓기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시간 들여 밥 지어 주는 것이 얼마나 큰 마음 표현 인지 아는 사람들을 모아, 밥을 지어주고 싶다. 우리는 그 온기를 서로 나눠 먹은 후, 집에 돌아가 끝끝내 다시 돌아온 시지프의 바위덩이를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아, 밥짓기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짓기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꾸역꾸역 밥을 짓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어느 날의 베이킹 기록. 요즘엔 떡만들기 삼매경에 빠져있다.


 밀키트와 배달음식의 단맛을 아는 토종 한국인이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해야만 하는 미국에 와서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미국에 온 지 1년 남짓. 나는 이제 김치도 떡도 빵도 직접 만들어 먹는 게 당연하게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밥짓기가 너무 지겨웠던 어느 날에 밥짓기 대신 밥짓기의 지겨움에 대한 글짓기를 했다.


 <장자>의 열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집을 나가 공부를 하다 결국 고향에 돌아와, 3년 간 밖에 나가지 않고 아내를 위해 밥을 짓다가 도를 깨쳤다고 한다. 따로 마음 쓰는 것 없이 그렇게 소박하게, 소란스러운 일이 있어도 죽을 때까지 한결 같았다는 열자.


 미국에 있는 동안 나도 그저 그렇게 살았다는 일상 생활만으로도 충분하다. 대단치 않은 삶이지만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렇기에 오늘도 맛은 없더라도 최선을 다해 밥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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