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9년 만에 부부싸움을 하다

제대로 화내는 방법에 대해

by 엠마


지난 9년 간 결혼생활을 되짚어 보면 부부싸움이 이번이 아애 처음은 아니다. 신혼 초 시부모님께서 처음 신혼집에 방문하실 때, 내가 요리 준비에 분주하여 예민해져 남편과 한번 싸운 적이 있었다. 몇 시간 뒤에 시부모님들이 곧 집에 들어오실 예정이었기에 둘 다 화를 가라앉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싸움은 곧 흐지부지하게 잊혔다.


제대로 언성을 높여서 부부싸움을 한 건 결혼생활 9년, 연애기간까지 포함하면 11년 만에 이번이 처음이다. 남편과 나는 서로 다른 점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지만, 기본적으로 감정적이지 않고 성격이 차분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남편은 워낙에 배려심이 깊고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성격이라 싸울 일이 있더라도 서로 웃으면서 잘 넘어갔던 것 같다. (나는 MBTI가 ISTJ, 남편은 ISFJ로 둘 다 내성적/현실적/계획형)


그런데 미국에 올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부터 그리 순하던 남편이 조금씩 변하는 걸 느꼈다. 외국이라는 낯설고 위험한 환경에서 예민한 감각의 날을 세우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일까. 새로운 일까지 해야 하는 남편은 더욱이 심리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 예민해져 있다고 느꼈다.


나 역시 평소에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먼저 찾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편인데, 임신 말기에 접어들어 육체적으로 힘들어지면서 인내심이 종종 한계에 부딪혔다. 미국에 도착해선 한 달가량 아들이 학교도 가지 않고 하루 종일 나와 함께 있었었는데, 영어가 부족하여 일상생활이 어려운 것에 장난꾸러기 아들을 하루 종일 케어하는 것까지... 매일매일이 만삭 임산부로서도 버거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부부싸움을 하게 된 나의 긴 변명이었고, 정작 부부싸움을 한 이야기를 하자면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사소한 일이다. 그래도 왜 그때 내가 화를 낼 수밖에 없었는지 되짚어 보고 그게 의미 있는 싸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 글로 남겨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날의 일을 적어본다.


매주 일요일 미국에서는 지역 곳곳에서 famer's market이 열린다. 농산물 생산자들이 직접 과일, 채소 등을 가지고 와서 판매하는 장터 같은 행사이다. 그날 우리는 집 근처에서 열리는 campbell farmer's market에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는데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아들은 나설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고 구경을 하는 내내 짜증이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복숭아, 자두를 사고 나서야 기분이 약간 풀렸는데, 당장 이 과일들을 먹어야겠다고 하는 것이다. 근처에 화장실이 있는 스타벅스를 찾아서 남편은 화장실에서 과일들을 씻어오겠다고 했고, 아들과 나는 자리에 앉아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화장실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서 아들의 짜증이 또 시작되었다.


그날 찍은 사진. 아들은 화장실 쪽만 바라보며 짜증을 계속 냈다.


아들의 짜증이 하루 이틀은 아니기에 나는 그냥 영혼 없이 달래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도 마켓을 걸어 다니느라 힘들어서 적극적으로 달랠 기운도 없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화가 쌓이고 있었으리라.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남편이 돌아왔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복숭아랑 자두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복숭아, 자두 같은 여름 과일을 아주 좋아하고 첫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는 정말 많이 먹어서 임신성 당뇨 경고를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둘째 임신 후에는 건강을 위해 과일이 먹고 싶어도 많이 참고 있었다. farmer's market에서 사 온 싱싱한 과일들은 정말 맛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먹는 걸 참았다. 마침 아들이 한참 신나게 과일을 먹다가 배가 부르다며 남기겠다고 했다. 나는 그걸 남편에게 먹어보라고 양보를 했는데, 남편은 본인 배가 부른데 왜 억지로 먹으라고 하냐고 나에게 짜증을 내는 것이다. 그 순간 나도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솟았다.


안 그래도 남편은 미국에 온 뒤로 체중이 3킬로 정도 빠져있는 상태였고, 원래 마른 체형의 남편이 더 말라 가는 모습을 보면서 먹는 걸 더 챙겨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는데 음식을 줄 때마다 많이 준다며 불만스러워하는 남편이 얄미웠다. 그리고 나는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고 있는데 그걸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남편이 야속했고, 갑자기 둘째 임신 후에 산부인과 진료를 거의 혼자 다닌 것까지 생각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커졌다. 그래서 아들이 옆에 있는 상태에서 남편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눈물까지 나기 시작했는데 남편이 왜 우냐는 말에 "나는 화나면 울지도 못해?!"라고 말한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아애 아무 말도 하기 싫어졌고 입을 닫은 채 눈물만 자꾸 났다. 입을 열면 계속 나쁜 말만 나올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날의 일은 싸움이 아니라, 그냥 나의 일방적인 '화'가 문제였다.


그날 아들은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것도 처음 보고, 엄마가 이렇게 우는 모습도 처음 봤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화를 가라앉히기가 어려웠다. 그 상태로 우리는 차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아들은 "엄마가 말을 안 하네", "누가 잘못해서 싸우는 거야?", "아빠가 사과해야겠는데" 등등의 혼잣말을 했다. 평소에 아들이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면 '마음 다스리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 나인데, 정작 아들 앞에서 마음 다스리기를 전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과의 관계 외에서도 누군가에게 별로 화를 낸 적이 거의 없다. 그게 쉽게 생각하면 성격 좋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 무의식 속에 억압된 분노가 있어서 '분노'라는 감정을 잘 다루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최근에 읽은 [사람 풍경], 김형경 저 책에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 중 '분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화를 잘 낸다 함은 '분노를 느낄 때 그 감정의 원인을 빨리 알아차리고, 화가 났다는 사실을 적대감 없이 상대에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평소에 어떤 부당한 일 앞에서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아이가 엄마에게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하면 그 감정을 표출하지 못한 채 내면 깊은 곳으로 억눌러 감추는 법부터 배우게 되어 어른이 되어도 제대로 화를 내지 못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엄격한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 내 욕망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그와 똑같은 정도로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며, 거절당했을 때도 그 감정을 성숙하게 처리하는 태도를 잘 표현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거절당하기 전에 경쟁을 피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듯한 선의를 가장한 모습으로 사실은 겁쟁이인 나 자신을 감춰왔던 것이 아닐까. 나이 마흔이 되도록 화를 제대로 내는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결혼생활 내내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은근한 자랑거리로 생각해왔던 것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 내가 갑자기 감정이 폭발한 것처럼,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쌓아놓고 있다가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보다는 그때그때 적절하게 내 감정을 표현하고 해결했다면 이런 싸움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싸움이 있고 며칠 후, 아들을 태우고 학원을 가던 차 안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아들에게 그날의 일을 꺼내었다. "엄마에 며칠 전에 아빠랑 싸우고 엄청 울었잖아. 그때 많이 놀랐지? 엄마가 마음 다스리기를 못해서 그렇게 했어. 정말 미안해." 남편은 심하게 울었던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남았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아들은 "괜찮아 엄마, 부끄러우면 그럴 수 있어! 엄마도 마음 다스리기 못했구나? 근데 아빠는 절대 안 울더라. 진짜 대단해!"라고 해맑게 답해 주었다. 그리고 또 며칠 후 아들은 잠자리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남편에게 "아빠, 엄마가 예전에 화내서 미안한데 부끄러워서 말 못 했대."라는 말을 꺼내었다. 나는 그때가 타이밍인 것 같아 바로 남편에게 그때 화내서 미안했다고, 사실은 이러저러한 마음 때문에 힘들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이럴 때 보면 6살 난 아들이 나보다 더 용감하고 감정에 솔직한 것 같다.


이번 싸움을 물꼬로 나는 앞으로 더 많은 화를 내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둘째가 태어나고 나면 더 많이 남편과 부딪힐 일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지금처럼 내면의 화를 참기만 하지는 않으리라. 적절히 화를 내고 그걸 잘 표현하고 다스릴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되고 싶다. 9년 만의 부부싸움을 기점으로 앞으로 다가올 갈등과 싸움을 환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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