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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소리 Nov 30. 2022

다시 여기, 제주

45세 남편 : 자기한텐 미안한데 예순까지 여기 계속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답답해. 웬만하면 다니겠는데 요즘 너무 힘들어.    

  

42세 아내 : 그럼 일단 육아 휴직하고 제주에 가자. 가서 푹 쉬고 나서 어떤 세상이 있는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한번 알아보자.    

 



출근하기 전, 퇴근한 후, 힘들어하는 남편을 지켜만 보는 일은 꽤나 힘이 들었다. 아무런 이벤트 없이 1년 내내 똑같은 일만 반복하는 성취감 없는 생활. 늘 지루하고 건조하다가 무슨 일만 터지면 책임이 주어지고 분주해지는 공기업 생활에 매너리즘을 느낄 법도 했다. 20년 가까이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해 온 탓인지 남편은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도 여기저기 삐걱대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아들 둘이 초등학생인데, 내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여기가 싫어서 쉬고 싶다니. 이런 상황에 대책도 없는 제주살이가 사실은 나도 막막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도 여과 없이 뿜어져 나오던 남편의 검은 기운은 나의 결심을 더 단단하게 굳혀 주었다. 머리끝까지 꽉 찬 무언가를 제때 소화시켜 내지 못해 아이들을 배려할 여유조차 없었던 남편을 이해하기에, 아이들에게 향하는 날 선 말들이 아이들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 일인지를 잘 알기에 나는 더욱 빨리 움직여야 했다. 웃음기 사라진 무채색 표정으로 회색 말들을 내뱉고 있는 남편에게, 그리고 뭔지 모르게 달라진 집의 분위기에 불안해할 아들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알록달록 화사한 무지개색을 채워 주고 싶었다. 마음이 급했다

 

그냥 쉬고 싶었던 거지 제주살이를 할 생각도 에너지도 없었던 남편은 한 달도 아니고 얼마가 될지 모를 제주살이에 자신 없어했다.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나는 여기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바득바득 남편을 설득했다. 잔소리를 하다가도 몇 분만 지나면 금세 실실거리던 내가 며칠 동안 묵언 수행을 하는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남편은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지금 여기, 제주에 ‘살고’ 있다.   





왜 다시 제주였던 걸까. 두 번째 한 달 살이를 마무리하면서 이제 제주는 이만하면 됐고 다음에는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 다짐했었는데. 그러고 보면 사실은 나도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는 조금 두려웠던 것 같다. 잘 다니던 회사에 냅다 사표를 던지던 나였는데, 남편 회사에서 페루 파견 공지가 떴을 때 겁도 없이 빨리 지원하라며 남편 옆구리를 콕콕 찔러 결국 지원하게 만들던 나였는데. 두려움이 많아졌다기보단 지킬 것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는 편이 여러모로 나으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한 달 살이를 두 번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걸까. 제주에 오면 왠지 들숨과 날숨을 내가 쉬고 싶은 만큼 막힘없이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주에 이사를 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전학시킬 학교를 정해야 했고, 집을 좀 더 신중히 알아봐야 했다. 첫 번째 한 달 살이 집에서는 근처의 농장에서 바람에 실려 바지런히 날아오는 누우런 암모니아 향기에 취하곤 했다. 두 번째 한 달 살이 집에서는 창문 너머 1m 거리에 사시는, 유달리 아침잠이 없으신 노부부가 목청 높여 싸우시는 소리를 모닝콜 삼아 깨어나곤 했다. 그때는 그런 것들을 애써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즐거운 마음으로 한 달 살이를 마무리해 내었지만, 이번에는 최소 1년이다.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제주에서 장기간 머무를 집을 구할 때 가장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갬성 가득한 인테리어도 아니요, 파릇파릇 싱그러운 외관과 마당도 아니요, 바로 반경 1km 이내 농장의 유무와 최소한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지 여부라는 것을 체득할 수 있었다. 몰랐으면 어쩔 뻔했나 아찔하기까지 하다. 역시 경험은 무조건 도움이 된다. 깨닫는 바만 있다면. 우리는 감사하게도 그 두 가지를 잘 갖추고 있는 소담한 이층 집을 극적으로 구할 수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 남편과 함께 산을 오르며 과연 1년 후엔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남편과 나의 취미이자 특기가 이사였기 때문에 이런 삶은 어떨까 저런 삶은 어떨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하는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이제는 쉽게 이동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지었더랬다. 그런데 또, 게다가 이번에는 멀리 제주까지 와 있는 우리라니. 인생은 역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맞나 보다.     


지금 우리는 다시 여기,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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