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제주에 있다. 남편은 육아휴직 중이다. 공대 출신 남편과 나는 24시간을 함께한다.
남편과 24시간 함께한다는 건, 세끼를 함께 먹는다는 의미다. 쉰에서 예순 사이의 중년이 되면 혹시나 만나게 될 수도 있으니 늘 살피고 조심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삼식씨를, 나는 제주도에서 조금 일찍 만나게 되었다.
우리 집 젊은 삼식씨는 요리에 재능이 있다. 계량, 시간, 재료를 넣는 순서에 매우 엄격하다. 공대 출신 답게 입력도, 출력도 오차 없이 해낸다. 그래서일까. 삼식씨의 요리는 늘 얄밉게 맛있다. 나는 삼식씨와 조금 다르다. “분명 블로그에서 시키는 그대로 했는데 맛이 왜 이러지?” 하고 둘러대지만, 사실은 창작을 많이 한다. 나의 요리는 맛보다 자꾸만 건강에 초점이 맞추어지곤 하는데, 넣으라는 걸 줄여서 넣고 넣지 않아도 되는 재료를 팍팍 넣게 된다. 요건 모르겠지 하고 넣은 건강 가루를 우리 집 삼식씨는 기가 막히게 알아내고야 만다. 마음속으로만 알아내면 될 걸 아이들 앞에서 우렁차게 알아내는 바람에 아이들까지 건강 음식을 안 먹게 만들어서 얼마나 얄미운지 모르겠다.
사실 아이들도 나와 식이씨의 쿠킹 레벨이 다른 것을 잘 알고 있는 눈치다. 특별식을 할 때면 기대에 찬 얼굴로 나에게 물어본다. "오늘 아빠가 만들어?" 식이씨도 특별식을 만들 때는 소매를 걷어붙인다. 나의 힘듦을 덜어주기 위해서라기보다 맛있게 먹고 싶어서, 혹은 아이들에게 임팩트 있는 한방을 남기고 싶어서임이 분명하다. 회사에 다닐 때 허드렛일은 내팽개치고 상사의 눈에 확 띄는 중요한 프로젝트에만 열과 성을 다하는 얌체 능력자들이 꼭 한 명씩 있었는데 요리에 있어 식이씨는 딱 그런 스타일이라고 보면 되겠다.
다이어트 중 고민을 거듭하다가 라면을 끓였는데 내가 상상한 그 맛이 아닐 때, 딱 하나 남은 소중한 커피믹스에 실수로 물을 콸콸 부어버렸을 때의 그 절망감이 얼마나 큰지는 나도 잘 안다. 남편이 매 끼니마다 느끼는 감정이 그 정도의 절망감이라면, 좀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요리에 감각이 있는 본인이 메인 셰프를 담당하면 될 것을, 밥 먹을 때마다 보이는 남편의 어두운 안색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도무지 이해는 되지 않는 나에게 굳이 메인 셰프 자리를 넘겨준다. 김치찌개를 연속해서 열 번은 족히 먹을 수 있는 나에게 말이다.
내 기분이 왜 나빠졌는지는 하나하나 설명해 줘야 아는 둔하디 둔한 삼식씨인데, 그런 삼식씨의 혀에 붙어있는 미뢰는 어찌 그리도 섬세하신지. 다 맛있는 막 입 쩝쩝 대장 삼식 씨와 함께 하는 중년의 여성이 부러운 요즘이다.
공대 출신 남편과 24시간 함께 한다는 건, 무모해 보이는 수많은 시도 들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 집 공대 출신 삼식씨는 공대 출신 중에서도 하이레벨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요즘 한풀이하는 사람처럼 과하게 부캐를 만들고 있다.
‘쓰레기장 기웃거려 주워 온 나무로 예쁜 쓰레기를 만드는 요술 손 목수’, ‘코드 바꿀 때면 한 템포 기다려야 하는, 맥 끊기 계의 대부 동요 전문 기타리스트’, ‘이것저것 사모아서 본체를 만들며 혼자서 만족하는 컴퓨터 수리공’, ‘그 전선도 쓰는 거다. 버리지 마라 전선 이선생’, ‘빨래 많이 쌓였다. 제발 그만 고치고 불러주라 세탁기 AS 기사’, ‘야구 축구 당구 테니스 골프 등 각종 스포츠와 스포츠 예능까지 섭렵한 나는 절대 뛰지 않아요. 프로관중러’, ‘돌처럼 딱딱한 떡을 만드는 옥수수 탈탈 떡집 삼촌’, ‘기름 콸콸 한 통 다 부어 단촐하게 두 마리 튀겨내는, 60계 치킨이 울고 갈 2계 치킨집 사장님’, ‘디카페도 못 먹어요. 나는야 카페인에 초 예민한 바리스타’, ‘반죽 한번 하고 나면 탈진해서 하루에 빵 한 개만 만들어요. 콧대 높은 파티쉐’, ‘고추장 그까이꺼 대충 집에서 만들면 되지 뭐. 장독까지 대령한 고추장 명인’, ‘중고나라에서 사기 세 번 당하고 숫자 욕을 내뱉으며 당근으로 갈아탄 중고 거래인’, ‘100살까지 장수해도 다 못 쓸 때비누와 테이프를 쌓아놓고 또 무얼 살까 기웃거리는, 개당 가격만 체크해요. 외골수 프로 쇼핑러’, ‘아무리 던지고 던져도 물고기가 미끼를 물지 않는 요술 낚싯대를 가진 프로 낚시꾼’ 절반도 못 썼지만, 너무 길어서 지루해지니 이쯤 해 두는 게 좋겠다. 그가 건조 하디 건조한 회사에서 왜 힘들었는지 알 것도 같다.
제주에 사는 만큼 요즘 식이씨는 낚시꾼 생활에 가장 큰 비중을 두며 지내고 있는데, 슬금슬금 낚시 관련 잡동사니를 자꾸만 사들이고 있다. 여기는 제주도라서 원래는 배송비가 많이 나오지만, 본인은 쿠팡에서 샀으므로 배송비가 없다는 것을 적극 어필하며 쿠팡맨을 자꾸만 우리 집으로 불러들인다.
아이들이 전학 한 학교에서 이번 주 내내 방과 후 참관 수업을 하고 있지만, 낚시꾼은 그런 것 따위는 일체 개의치 않기로 한다. 엄마들만 있는데 자기가 어떻게 가느냐며, 한시라도 빨리 바다로 나가서 일면식도 없는 물고기들의 생존 수영 수업을 참관할 생각에 설레어한다. 장장 대 여섯 시간을 요술 낚싯대 반신욕 시켜주고, 생존 수영 수업에 한창인 물고기들에게 고단백 지렁이를 곁들인 새우 정식과 고소한 빵가루 후식까지 살뜰히 챙겨 준 후 양손은 반드시 가볍게 해서 돌아온다. 수확도 없이 돌부처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오는 일에 왜 그리도 푹 빠진 건지.
사진출처 : Pixabay
이런 공대 출신 삼식씨를 나는 왜 사랑하게 된 걸까. 그의 때늦은 사춘기를 왜 이해하고 있는 걸까. 우리 삼식 씨는 키가 180이 넘는다. 비율이 좋아 다리가 길다. 내 눈에는 얼굴도 잘생겨 보인다. 팔에는 약소하지만 딱딱한 근육이 만져지고, 무언가 할 때 튀어나오는 초록빛 핏줄이 설렌다. 엄마가 남자 얼굴만 보고 그러지 말랬는데, 나는 엄마 딸인 것이 분명하다.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몹쓸 외모지상주의.
결혼을 목적으로 하는 30세 여성의 소개팅에는 주로 안경을 끼고 있는 170cm 전후의 몸도 얼굴도 인자한 과장님들이 자주 나오셨는데, 남편은 달랐다. 구남친을 못 잊어 꽃다운 20대 후반 3년을 혼자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금세 사랑에 빠져 밀당도 없이 매일 데이트 신청을 먼저 해댄 걸 보면. 30세가 되어서도 외모를 포기할 수 없었던 철없는 나와, 먼저 들이대는 것이 쑥스러워 밀당도 없이 들이대는 여자가 편하고 좋았던 미뢰만 섬세한 삼식씨와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삼식씨는 어깨에 요술 낚싯대를 들처 업고 푸르른 제주 바다에 반신욕을 시켜주러 집을 나선다.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당찬 포부를 밝히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