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웃음소리 Jun 09. 2023

특별한 능력

나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남편이 무엇을 먹자고 제안하면 그 음식이 진짜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만드는 신기한 능력.


남편이 돈가스를 먹자고 제안하면 재빠르게 돈가스를 상상한다. 그렇게 잠시 상상하면 입맛이 돌기 시작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돈가스가 진짜 먹고 싶어 진다. 억지로 남편의 입맛을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 진짜 먹고 싶어 지니까 기분 좋게 먹을 수 있다.


남편은 나의 이런 능력을 반기는 눈치다. 내가 메뉴 선택권을 남편에게 쉽게 넘겨주기 때문이다. 이제는 큰 기대를 접어두고 집밥은 오로지 배를 채우는 수단이라고 여기게 된 것 같은 남편은, 그래서인지 유독 맛집 검색에 진심인가 보다. 게다가 보통 사람들에 비해 미뢰가 섬세한 남편에게 메뉴선택권이란 쉽게 양보할 수 없는 매우 중대한 권한일 것이다. 그러니 나의 이런 능력을 반길 법도 하다. 


남편이 운을 띄운 음식이 먹고 싶어 졌다는 말을 나는 간단하게  "올라왔다"라고 표현한다. 이번엔 뭐. 중국집. 잠깐 있어봐. 올라왔다. 가자. 올리는 데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잠시 생각하면 먹고 싶어 진다. 금방 배부르게 밥을 먹었는데 또 고기를 먹자고 하거나 손발이 시릴 정도로 매서운 추위에 얼음 동동 물회나 냉면을 먹자고 하는 얼토당토않은 경우만 아니라면 거의 올릴 수 있다고 보면 되겠다.






가끔 남편이 아이들을 재우러 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2차?" 하고 말할 때가 있다. "2차"라는 것은 야식을 먹자는 말을 대신한 우리만의 암호이다. 연애할 때도 없었던 둘만의 암호가 아이들을 낳고서야 생겨났다. 남편이 외친 "2차?"라는 외마디 말에 나의 뇌는 크게 요동치며 소스가 듬뿍 발린 닭강정 스타일의 2,000칼로리 양념치킨을 둥실 떠올린다. 그 순간 애들 빨리 잠재우기 50%, 양념치킨 50%의 뇌구조가 설계된다.

                                                          

사진출처 : Pixabay


하지만 너무 쉬워 보이지 않게 '나는 분명 먹고 싶지 않았으나 너가 먹고 싶어 해서 어쩔 수 없이 먹어주는 거다' 라는 분위기는 꼭 풍겨주어야 한다. 남편의 건강검진 결과표를 보고 기름진 것 좀 그만 먹어보자고, 나도 함께 해보겠다고 잔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함께 하겠다고 하고서 남편이 철저하게 기름진 음식을 제한하면 어쩌지 싶긴 했다. 다행이다.


남편이 애들 재우러 가는 나에게 브이를 그리며 해맑게 "2차?"를 외쳐 놓고는 그냥 잠들어 버릴 때가 있다. 육퇴 직전 "2차?"라는 말을 들은 나는 기쁨을 감추고 시크하게 양념치킨을 한껏 올려놓았는데. 혹시나 아이들을 재우다가 내가 먼저 잠들까 봐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몸뚱이를 뉘었는데. 나의 본분을 망각한 채 아이들에게 오늘은 일찍 자자고 말하며, 불 끌 사람 정하기 가위바위보도 하지 않고 재빨리 내가 나서서 전등불을 꺼버렸는데. 사람 마음을 이렇게나 흔들어 놓고는 그냥 쿨쿨 자버리다니. 


내 특별한 능력에도 치명적 단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런 거다. 너무 선명하게 올라와서 포기가 아주 힘들다는 거. 그렇게 힘이 들 때는 안성탕면(진라면으로 대체가능하지만 신라면이나 너구리는 비추다.)을 한입크기로 잘 뿌신 뒤 전자레인지에 1분가량을 돌린 후 한 김 식혀 스프를 골고루 뿌려 먹어주어야 한다. 맥주를 곁들이고 조명을 낮추면 방구석 호프집이 완성된다.






내가 선택한 식당에 가서 냠냠 쩝쩝 맛있게 잘 먹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이 집 진짜 맛없다"라고 말할 때가 있다. 남편은 밥을 입에 넣고 서너 번 정도 대충 씹고 꿀꺽 삼키는 반면, 나는 밥을 오래 씹어 먹는 편이다. 남편이  8분 만에 밥을 해치우고 휴지로 코를 먼저 닦은 후 그 휴지로 다시 입을 닦으며(신기하게 반드시 코부터 닦는다) 냉철하게 음식 평가를 해댄다. 특히 상추쌈에 제육을 야무지게 올려서 입을 크게 벌리고는 상추쌈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바로 앞에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기에서 냄새가 난다고 말할 때는 밥을 절반도 안 먹었는데 흥이 뚝 떨어져 버리기도 한다. 그 냄새 나만 못 맡은겨. '미식가 납셨네 미식가 납셨어.' 하고 쏘아대고 싶지만, 밖에서는 온화한 척하는 나이므로 고비를 잘 넘기고서 다시 숟가락질에 흥을 올리는 것에 에너지를 쏟기로 한다. 쏘아대는 것을 잘 참아낸 후 식당을 나와서 내가 '맛있게' 먹고 있을 때는 냉철한 평가를 자제해 달라고 침착하게 요청한다. 하지만 이행은 잘 되지 않는다. 차라리 메뉴선택권을 남편에게 넘겨야겠다는 생각이 둥실 떠오른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에게 이런 특별한 능력이 생겨난 것은. 이런 남편과도 평화롭게 살아가라고 누군가 나에게 '메뉴선택권을 넘겨주고도 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주셨는지 모르겠다. 남편 덕에 내가 진화했다.







예전엔 남편과 참 많이도 다투었다. 잠투정이 많았던 첫째와 내가 씨름을 하고 있는 와중에 간 크게 거실에 세상 편하게 누워 각종 예능을 보며 웃고 있는 남편에게 얼마나 분노를 느꼈는지 모른다. 자기는 가슴이 없고 딱딱해서 그런지 내가 재우면 30분 걸릴 걸 본인이 재우면 한 시간이 족히 넘게 걸리니 내가 재우는 게 낫지 않느냐는 망언을 쏟아내던 엉터리 분석가 남편에게, 지금처럼 진화한 나였더라면 화를 내며 육아를 전담하는 대신 여유롭게 웃으며 나의 뽕브라에 뽕을 여러 개 끼워 넣어 남편에게 채워줬을 텐데.


남편도 나도 상대에 맞추어 여러모로 진화했다. 예전처럼 치열하게 다투지 않고도 위기 상황을 잘 넘기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결혼 초에는 대화할 때 도대체 왜 나의 눈을 마주 보지 않는 거냐며 속상해했지만, 진화를 거듭한 나는 남편이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연애할 때는 가장 독한 아이컨텍 알레르기 약을 복용한 것이 분명하다.)


사진출처 : Pixabay


그렇게 13년 차 부부는 상대에 맞추어 진화하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이렇게 진화를 거듭하게 된다면 10년쯤 후엔 서로의 뒤통수만 봐도 마음을 술술 읽어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진화하는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