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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소리 Feb 17. 2023

아빠,

"아빠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밤늦게까지 일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지."




엄마가 우리 사 남매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항상 퇴근이 늦은 아빠였다.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주말이면 방에 길게 누워 입을 열었다 닫았다,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던 아빠를 보며 혹시라도 아빠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질까, 우리 마음에 어둠이 찾아올까 애를 쓰셨던가 보다. 엄마는 우리에게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엄마의 그런 노력 덕분인지 나는 어린 시절에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집인 줄만 알고 자랐다.


어릴 적 기억을 잘 못하는 나의 머릿속에도 아빠가 안방에 누워 주무시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아마도 아빠는 늘 그러셨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두 분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살아보니 부부가 살면서 싸우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데, 엄마는 참 많이도 참으셨겠다 싶다.


엄마는 모성애가 남달랐다. 아이 둘을 키워보니 우리 엄마의 모성애는 정말 남달랐던 것 같다. 엄마에게 모진 말을 들었던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아직도 엄마의 따뜻했던 눈빛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면, 엄마가 곁에 없는데도 힘이 들 때마다 엄마가 해 주었던 따뜻한 말들을 떠올리며 힘을 내는 나를 보면. 정말로 그랬나 보다.


남편이나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날 때 폭발하지 않고, 아이들 모르게 뒤돌아서서 미친 여자처럼 혼자 중얼중얼 숫자욕을 내뱉거나 허공을 향해 도끼눈을 뜨며 화를 가라앉힐 수 있는 건 아마도 엄마의 사랑 덕분인 것 같다. 도끼눈이 뜨고 싶을 때 선글라스라도 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아이들이 나의 눈빛을 선명하게 떠올릴 것을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아빠. 아빠에 대한 나의 감정은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엄마에 대한 감정은 사랑, 따뜻함, 존경이라고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할 수 있는데. 아빠에 대한 내 마음은 한참을 생각해도 모르겠다. 요즘도 아빠를 볼 때마다 아빠의 귀지를 파고 이마와 등 가운데 항상 같은 자리에 나 있는 블랙헤드를 짜대는 걸 보면 아빠와 그리 어색한 관계는 아닌 게 확실한데. 사랑까지는 확신이 안 서고, 마음이 쓰이고 챙겨 드리고 싶은 정도라 하면 될까. 그러니까 내가 기대기보다는 챙겨드려야 할 것 같은 느낌. 나이 드셔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런 느낌. 엄마의 현명한 실드 덕에 아빠에 대한 분노는 없지만, 실드의 커버력은 나쁜 감정이 파고드는 것을 막는 것. 딱 거기까지인가보다.



어딜 가든 엄마가 앞장섰던 것 같다. 나들이를 갈 때면 도시락 준비부터 계획까지 모두 꼼꼼하고 발 빠른 엄마의 차지였다. 아이처럼 부지런히 자기 몫의 음식을 냠냠 쩝쩝 맛있게 드시던 아빠의 모습은 기억이 나는데, 엄마 입에 음식을 넣어주거나 당신도 먹어보라는 따뜻한 말을 건네었던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빠가 우리에게 먹을 음식을 먼저 챙겨 주신적은 없는 것 같다. 함께 경쟁하며 먹었다. 그런 아빠여서 슬프고 엄마가 가여웠던 게 아니라 원래 다들 그런 줄 알고 자란 것 같다. 엄마가 외롭고 힘들었겠다 싶다.


우리 다섯 명 중 유일하게 식탐이 없었던, 국어는 전교 1등 (국어시험 문제를 왜 틀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망언을 진지하게 남겼다. 잘난 척이 아니라 진짜 모르겠다고 했다.) 문학소녀 작은언니는 곧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전투적으로 숨 가쁘게 먹어대는 우리 네 명(아빠, 큰언니, 오빠, 나)을 보며 어릴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왜 우리랑 똑같이 먹기만 하지. 고기는 왜 엄마만 굽지.' 하고 말이다. 우리 네 명이 제육에 취해있는 동안 엄마와 작은언니만 제정신이었나 보다. 아. 아빠, 오빠, 나 이렇게 세 명이 제육에 취했던 건 확실한데 큰언니는 좀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어봐야겠다. 그때 솔직히 취했었냐고.


엄마는 1박 2일로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면(거의 없는 일이었다) 아빠에게 우리 밥을 챙기라고 하는 대신 언니들에게 아빠의 끼니를 챙겨 드리도록 했다. 눈치 없이 해맑던 나는 다 커서 작은언니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다. 큰언니도 알고 보면 어렸을 텐데. 맏이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었을 텐데.








제육에 목숨을 걸며 엄마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지 마는지를 전혀 모르고 40년을 넘게 살았던 아빠는, 엄마를 보내고 꽤 오랫동안 엄마를 그리워하며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아빠집에 들를 때마다 장롱 깊숙이 숨겨 둔 그 노트를 아빠 몰래 열어보며 눈물을 훔치곤 했었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글이 있다.


" 여보,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모르겠어. 그래도 잘 살아보리다. "


아빠는 이제야 홀로서기를 하는가 보다. 모든 걸 척척 알아서 해 주었던 엄마 뒤에서 지내며, 주어진 일만 부지런히 하면서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일 하면서. 그렇게 살아왔던가보다. 일흔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를 스스로 떠올려보며 막막했을테다. 엄마에게 아이처럼 하소연하며, 일흔이 넘었지만 모든 것에 서투른 아빠는 그렇게 조금씩 홀로서기를 하고 있나 보다.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사진 속 엄마에게 생전에는 한 적 없을 다정한 말들을 매일같이 건네며.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홀어머니와 외롭게 자라서였는지, 자식들과 아내에게 어떻게 주어야 할지 잘 몰랐을 아빠를 떠올려본다. 아빠와 진지한 대화를 기억이 없는데, 지금이라도 아빠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빠. 잘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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