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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소리 Mar 10. 2023

뭐해요?_ [2]

우리가 살고있는 소담한 타운하우스의 건축주인 사장님 댁에는 차가 세 대 있다. 아주 매끈하고 고급져 보이는 영롱한 빛깔의 반짝반짝 벤츠, 사장님이 낚시를 할 때 타고 다니시는 트럭, 그리고 용도를 모르겠는 (얼마 후 진짜 용도를 알게 되었다) 스타렉스.


사장님의 아내인 긴 생머리 그녀와 나는 스타렉스를 타고 귤밭으로 갔다. 멀지 않은 곳에 귤밭이 있었다.



"이거 약도 안 친 완전 유기농이에요. 보낼 곳 있으면 따서 보내요. 귤 진짜 맛있어~"



나는 사실 귤을 따는 것보다 귤을 따며 그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람이 그리웠나 보다. 물론 삼식씨가 늘 곁에 있기는 하지만, 관심 없는 얘기를 할 때면 단답형 서타일로 변하는 삼식씨가 나의 수다욕구를 충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낚시 유튜브를 보면서 내 얘기를 듣고 있다는 표시로  0.3초 정도씩 아이컨택을 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정도로는 내 수다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녀는 매우 바빴다. 귤 주문을 열몇 박스나 받았다며 귤을 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귤을 딸 일손이 부족해서 어차피 귤을 다 못 딴다며, 귤을 마음껏 따서 가족들에게 보내라고 말했다. 귤을 따서 먹어보니 유기농 귤이 정말 진하고 맛있었다. 귤을 좋아하는 우리 아이들과 삼식씨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가족들 얼굴도 떠올랐다. 그렇다고 아직 친하지도 않은 남의 밭에서 눈에 불을 켜고 몇 박스를 주워 담으려니 내 마음이 영 편치가 않았다. 우리 네 명 먹을 것만 적당히 따서 담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귤을 따는 것을 도왔다. 아담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긴 생머리 그녀는 처음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얼마나 손이 빠른지, 귤 한 박스를 금세 채우고는 10kg 귤 박스를 번쩍번쩍 날랐다. 나도 함께 박스를 나르려고 하면, 무거워서 절대 안 된다며 내 손에 들려 있던 박스를 잽싸게 낚아채서 스타렉스 옆에 놓았다. 그녀는 자기보다 나이가 세 살 어린 나에게도 늘 존대를 하며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야무진 그녀는 주문받은 양을 어느 정도 처리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는지, 천천히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귤을 따기 시작했다.











데크에서 사장님 내외와 처음 맥주를 마시던 날, 사장님은 우리에게 새하얀 요트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선물 받은 있어?" 하고 장난처럼 말씀하셨다. 그날 삼식씨는 집에 와서 "요트를 사장님이 선물 받으셨다는 건가?" 하고 나에게 물었다. 별생각 없이 "당연히 사장님이 사모님께 선물해 주신 게 아닐까?" 하고 대답했다. 자연스럽게 '당연히'라고 말하며, 어쩌면 나는 마음속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생머리 그녀와 그녀보다 열네 살이 많은 사장님. 분이 사랑하게 이야기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대하여. 그때 나는 별 생각 없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와 하루 종일 있다 보니 사장님과 그녀의 통화를 의도치 않게 계속 듣게 되었다. 두 분은 서로에게 매우 다정했다. 털을 싫어해서 머리카락을 그냥 다 밀어버렸다는 아주 화끈하신 사장님은 카리스마가 정말 남달랐는데, 그녀에게만은 애교가 넘치셨다. 사장님은 결혼 한 딸들을 만나러 육지에 나가셨다고 했다. 육지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녀에게 모두 보고하셨다. 카리스마 넘치는 사장님의 섬세한 배려를 또 한 번 느꼈다.



"남편이 아들 하나 낳아 달라는데 이 나이에 뭐 하려고."

"아! 나 아이 한 번도 안 가져 봤어요. 결혼도 한 번도 안 했어. 아이 낳을 수 있어"



아들 이야기를 꺼내던 그녀는 다급한듯 연이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 듣고만 있었는데. 순간, 열네 살이 많은 남편과 함께하며 그녀가 숱하게 받았을 오해들을 떠올려 보았다. 사람들이 농담이라며 대 놓고 건네는 뾰족하고 무례한 이야기들, 혹은 돌고 돌아 귀에 들어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로 상처도 받았겠지. 뒤에서 수군거리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나도 속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업을 하다가 믿었던 이들에게 수억 원의 돈을 잃고, 돈을 찾는데 인생을 낭비하기보다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는 혼자서 씩씩하게 연고도 없는 제주로 내려오게 된 이야기. 그리고 사장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 그로 인해 상처받은 이야기까지.



우리 아이들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처음 그녀에게 대뜸 아이가 있냐고 물어본 무례했던 나를 떠올렸다. 당연히 사장님이 그녀에게 과한 선물들을 해 주었을 것이고 그래서 사장님과 그녀가 사랑하게 되었을 거라 생각한 나를 떠올렸다. 참, 미안했다. 그녀가 받았을 상처들을 생각하니 그녀가 안쓰러웠다. 상처를 받았음에도 그것에 매몰되거나 연연해하지 않고, 너무나 밝고 경쾌하고 당당하게 지내는 그녀가 멋있어 보였다.





  




그녀가 귤이 가득 담긴 박스를 잡으면 내가 테이프를 쫙 붙이고, 내가 박스를 잡으면 그녀가 테이프를 쫙 붙였다. 손발이 잘 맞았다. 테이프를 다 붙인 귤 박스를 스타렉스에 척척 실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이었지만 꽤나 재미있었다. 목장갑을 벗고 손을 탈탈 털고는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스타렉스를 능숙하게 몰며, 대화도 가능했다. 운전을 하다가 당황할 때면 여전히 겨터파크를 활짝 개장하고 대화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는 나로서는 그녀의 유연한 핸들링마저 멋있어 보였다.



"아니,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어떡해요. 이러려고 같이 귤 따자고 한 게 아닌데. 오늘 힘 많이 썼는데 다음에 맛있는 거 좀 먹여야겠어."  맛있는 걸 좀 먹여야겠다는 말,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라는 말보다 조금 더 마음이 몽글해지는 말. 엄마한테만 들어봤던 말. 삼식씨는 한 번도 안 해준 말. (삼식씨는 본인 먹기 바쁨)



사업을 하며 믿었던 이들의 등을 보아야 했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음에도 그녀는 참 다정하고 사랑이 넘쳤다. 밝은 빛이 반짝였다.



며칠 후 사장님은 또 거대 물고기를 낚으셨고, 그녀는 경쾌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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