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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소리 Mar 03. 2023

뭐해요?_ [1]

핸드폰이 울린다.

남편도 늘 나와 같이 있고, 언니들과는 단톡방으로 소통을 하고. 제주에 있는 나한테 전화할 사람이 거의 없는데. 가끔 친한 친구들에게 걸려오는 안부 전화 말고는. 그 마저도 다들 일을 하고 있으니 퇴근하면서 어스름 해 질 무렵에 전화를 하는 게 보통인데.


전화벨이 울리면 전화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제는 짐작 할 수 있다.


"뭐해요? 우리 남편이 또 히라스(부시리)를 잡아 보았어요. 한 잔 하러 와요"


긴 생머리 그녀의 경쾌한 목소리다.


남편과 나, 둘 다 급작스런 만남을 선호하지 않는다. 미리 약속을 정하고 나서도 에너지를 모아서 사람을 만나야 하는 편이다. 편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때의 온도차가 극명하다 해야 할까. 인간관계의 폭이 좁고 깊은 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이를 먹으면서는 조금 불편한 만남도 세련되게 감당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러다보면 보물같이 따뜻한 인연들을 또 발견해 낼 수 있을 텐데. 우리 부부에겐 그것이 참 쉽지가 않았다.


그랬던 내가 그녀의 급작스런 전화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데크에서 맥주 한 잔을 한 이후 우리는 가끔씩 급만남을 했다. 말 그대로 급만남이었다. 그녀는 문자나 카톡보다는 전화를 선호하는 편이었는데, 처음에는 그게 조금은 불편했다. 그녀는 매번 전화를 받자마자 "뭐해요?" 하고 질문을 한다. 집에 있으면 그냥 집에 있다고 말하고 밖에 있으면 밖에 있다고 말하면 될 걸,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지금 진짜 무얼 하고 있는지를 술술 말해버리곤 했다. 화장실에 앉아서 전화를 받은 적이 없는 게 다행일 정도로 말이다. (반신욕 하는 중이라고 말한 적은 있다. 휴) 아마도 엎어지면 코 닿을만큼 가까운 바로 뒷집에 살고 있는 그녀여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전화를 끊고 나면 갑작스러운 전화에 살짝 당황을 하며 TMI를 남발한 내가 조금 웃겨서 창피하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오래 쉬면서 어색한 사람과의 만남을 거의 하지 않다 보니 사회성이 점점 퇴화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지금은 그녀 덕분에 급작스런 제안을 하는 전화에 응대(?)하는 능력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와의 가벼운 술자리는 늘 유쾌하고 즐거웠다. 대한항공 기장님 내외가 살던 집에는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인으로 지내다가 새로운 삶을 꿈꾸며 제주에 내려온 부부가 이사를 왔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재미를 느끼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아이와 연결되지 않고, 직장과도 연결되지 않은 그냥 아무 목적이 없는 만남이어서일까. 가벼운 술자리가 참 편하고 좋았다.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그들의 이야기는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우리의 솔직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그들이 고맙기도 했다.


그녀는 기꺼이 그녀의 거실을 내어 주었다. 날씨가 쌀쌀해져서 데크에서는 맥주 한잔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사장님이 대왕 물고기(진짜 대왕물고기를 잡으신다. 160cm가 넘는 물고기를 잡기도 하셨다. 아무리 던지고 던져도 물고기가 미끼를 물지 않는 요술낚싯대를 가진 프로 낚시꾼 우리 삼식씨는 사장님께 물고기 낚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반짝이곤 한다.)를 잡는 날이면 그녀는 종종 우리를 초대해 주었다.


음식을 담는 모든 그릇은 일회용이었다. 환경을 생각해야 하긴 하지만, 일회용 용기가 내심 반가웠다. 뒷정리를 도우려 하면 그냥 가라며 매우 강하게 내 등을 떠밀곤 하는 그녀였는데, 일회용 용기를 보며 정리를 하지 않고 주섬주섬 신발을 신는 내 마음이 조금 편하긴 했으니 말이다.








나는 밝고 경쾌한 그녀가 좀 더 궁금해졌다. 함께 술잔을 여러번 기울이기는 했지만,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선 그녀도 나도 개인적인 이야기나 깊은 고민을 꺼내기는 어려웠기에 그녀와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처음에 제주에 왔을 때 그녀는 나에게 시내에 카페도 함께 가고 운동도 함께 하자며 나를 격 없이 반겨 주었지만, 나의 성향을 파악했는지 더 이상 그런 제안을 하지는 않는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그녀의 귤밭에 함께 귤을 따러 가자고 제안했다.


"여보세요." 와 비슷한 느낌의 뭐 하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TMI를 남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하며,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였다. 몇 번의 술자리를 통해 그녀가 조금 편해졌던가 보다. 사실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느낌은 없었다. 아마도 솔 톤의 콧소리와 주렁주렁 화려하게 달려있던 순금의 장신구들이 나에게는 익숙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나였는데, 정작 내가 그녀의 겉모습만 보고 거리를 두려 했던가보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삼식씨는 낚시를 하러 간 화창한 어느 날, 나는 그녀와 단 둘이 그녀의 귤밭에서 귤을 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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