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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소리 Jan 27. 2023

한 잔 할래요?

제주에 있다.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아늑하고 작은 시골 마을. 여섯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소담한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다.


이사 온 첫날. 긴 생머리의 그녀는 콧소리가 가미된 솔 톤으로 인사를 했다. 밝은 에너지가 넘친다. 누구지. 주인인가. 목과 팔에 주렁주렁 걸려있는 굵직하고 무거워 보이는 짙은 금빛의 장신구들을 보니 왠지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사모님이 맞았다. 이 타운하우스를 지은 건축주의 아내였다. 뒷 줄 맨 안쪽 집에 살고 있다고 하셨다. 'I'성향인 나는 'E'성향인 척 그녀와 비슷한 솔 톤으로 인사를 해 본다. 집을 직접 보지도 않고 덜컥 계약을 했던 우리는, 그녀와 함께 처음으로 우리의 보금자리 구석구석을 살폈다. 집의 컨디션이 예상보다 좋아서 기분이 좋았다. 계단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던 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신이 났다.


대화 중에 남편 얘기를 하는 그녀에게 나도 모르게 불쑥 아이는 몇 살이냐고 물어버렸다. 그때 내 머릿속은 온통 아이들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던 것 같다. 과한 걱정은 뇌를 마비시키는 게 분명하다. 상대에게 별생각 없이 말하곤 했던 시절, 결혼을 하지 않은 분께 혹은 결혼을 했으나 다양한 이유로 아이가 없는 분께 아무 생각 없이 그놈의 아이타령을 했다가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진 경험을 한 적이 있던 터라 평소 입조심을 한다고 하는데, 불쑥 또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아이들은 다 커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이 장성했다고 하기엔 그녀가 너무 젊어보였지만, 아이 이야기를 했을 때 살포시 굳어버렸던 그녀의 얼굴을 보고 번뜩 정신을 차린 나는 다행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끝으로 그녀와 마주칠 일은 잘 없었다.








타들어갈 듯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과 태풍 힌남노를 무사히 잘 보내고 나니, 시원한 바람과 적당한 따스함이 기분 좋은 화사한 날들이 선물처럼 찾아왔다.


어느 늦은 오후, 그녀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데크 테이블에서 맥주 한잔 할래요?" 갑작스러운 만남에 익숙지 않은 나는 그녀의 제안이 조금은 불편했지만, 아이들에게 잘 놀고 있으라고 일러두고는 삼식씨와 함께 슬리퍼를 끌고 뒷집으로 출동했다. 다른 집을 방문할 때 사 갈만한 가벼운 디저트를 파는 곳이 주변에 없어 저녁에 먹으려고 삼식씨가 준비하고 있던 특별식 닭볶음탕을 냄비째 들고 갔다. 양이 부족할 것 같아 아이들 저녁으로 먹을 것도 덜어 놓지 않고서 말이다.


잘 모르는 사람과의 술자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결혼 후엔 누군가를 새롭게 사귈 기회가 잘 없기도 했고, 남편과 둘이 치킨을 먹으며 수다를 떨거나(나는 얘기하고 남편은 주로 듣는다) 드라마나 예능을 함께 보는 것에 익숙해진 지 오래되어서인지 인간관계를 새롭게 맺는 것이 조금 어색하기도, 귀찮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는 성시경도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떠나오는 제주도, 듣기만 해도 모두가 설레는 제주도가 아닌가. 새로운 경험을 해 보고 싶었다. 잘 모르는 사람과 술 한잔 마시는 것이 뭐 그리 대단히 새로운 경험이냐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 우리에겐 새로운 게 맞았다. 'I' 부부는 용기를 내었다.


사진 출처 : Pixbay


바로 뒷집 부부도 함께 했다. 검은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아 보이는 뒷집 남편분은 대한항공 기장님이라고 하셨다.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을 연상케 하는 인자한 모습이었다. 기장님 내외는 제주에 집을 얻어두고 오며 가며 지내신다고 했다. 건설 사업을 하며 돈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지내는 주인집 부부, 대한항공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하다가 정년을 앞두고 은퇴 후의 삶을 생각하며 여유를 즐기는 부부.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던 부류의 이웃들이었다. 편안해 보였다.


안주로 가져간 삼식씨의 닭볶음탕은 별 인기가 없었다. 식이씨가 만들었으니 분명 맛은 있었을 텐데, 주인집 사장님이 잡으신 무려 150cm에 달하는 거대 물고기 부시리에 KO패 당했다. 한 점만 먹어도 입이 꽉 찰 정도로 두툼하게 썰어낸 회를 먹느라 모두가 바빴다. 식이씨의 닭볶음탕은 테이블 위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만 있을 뿐 그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한 채 외롭게 식어갔다. 나도 식이씨도 닭요리 대신 두툼한 회를 선택했으니 말이다. 사람들의 침은 몇 방울 방문했을지 모르겠다.


주변이 깜깜해질 때쯤 아이들 저녁을 챙기지 않은 것이 생각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져올때와 똑 같은 모습의 닭볶음탕을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던 내 마음을 꿰뚫어 보셨는지, 주인집 사장님께서 닭볶음탕 먹고 싶다며 두고 가라고 하셨다. 카리스마 넘치는 사장님의 섬세한 배려가 느껴졌다.  "맛 봐 주시면 감사하지요" 하고 반가이 얘기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이어서일까. 그들의 삶과 생각이, 그 중에서도 그녀가 나는 조금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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